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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을 두려워 하지만은 않다[창15:1-21]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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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을 두려워 하지만은 않다[창15:1-21]

주하인 2020. 1. 21. 09:29

 만일

나이든 육신을 부끄러워 하고

움직일 때마다 버걱거리며 아픈

근육들의 증상을 두려워 하여

그날

그렇게

자전거 캠핑 시도를 포기 했더라면


아름다운 자연과

그 안에 흐르는 생기의 생동과

내 자유로운 영혼이

주님의 살아계심에 화합하여 느껴지는

 저런 평강의 기쁨을

어찌 조금이라도 

체험했을 수 있었을까?


두려움이

두렵지만 않음은

주님 안에서는

날이 갈 수록 새롭기 때문이다

할렐루야




1.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두려움'

경외.

너무 크시기에 감당치 못할 경외 감으로 두려워함이다.

 강원도 태백 산중 '무의촌 근무'할 때도

로키산 중에 들어가기만 해도 그 너무 깍아지른 아름다움에

압도되어 두렵더니

수백억광년을 넘나드는 우주의 큼에는

상상을 불허하는 경외로 압도 당하였다.

그를 만드신 하나님,

그 하나님 앞에서 느껴지는 두려움은 또 어떠할까?


 두려움.

경외 말고 느껴지는 두려움,

사단으로 부터 나오는 두려움.......

허전한, 외로운, 진짜 더러운 무서움.........으로 인한 두려움이

또 있다.


연초 , 연말에

느껴지는 터부에 마주하기 위하여 허락되어진

여러 증상 (^^;;) 들이 있었다.

분..두려움...

그리하며 다가오던 '불면의 밤'.

그때,

자려는 데 몸 한쪽을 잡아다니는 듯한

소름끼치는 느낌으로 번뜩 일어나

순간 , 기도하는 아내가 있는 'AY' 내 집으로 올라갈까 하다가

다시는 지금의 이곳 PT에서 지금처럼 사는 것이 불가할 것 같다는 생각과 더불어

무서움, 더러운 두려움은 '사단' 내지 영적 오류들의 문제일 것이고

그것은 반대편에 더 큰 존재이신

하나님을 사모함을 방해하려는 것이기에

오히려 두려울 수록

크게 느껴지는 하나님이란 생각이

더 퍼뜩 들어왔다. ^^*

그리고는 그 후로는 '아무렇지 ' 않은..

그리고 불면의 이후

말씀대로 이끌어지는 것은 이 블로그에 적어 놓았다.


무슨 이야기던가?


 두려움에 대한 이야기다.

세상이 복잡해지고 유혹이 많아짐에 따라

공황장애니, 공포니.. .많이 나온다.

외로움에 두려움으로 자살하고

허무함에 두려움으로 우울....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반대적 행동들..

문제있는 말초적 몸부림들.......

뭐.......두려움은

우리 존재들이 마주할 근본 장해물이다.


 결국은 벗어나야 할 근본 명제 말이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가장 좋은 것...

'수고하고 무거운 짐'. .

'멍에'......로 표현되는 인생의 버거운 두려움으로 부터

날 붙들어 위로 하시고

가볍게 해주시는

그 평강이

이 모진 인생,

다시 돌아가라면 절대로 살아내지 못할 이 힘들었던 삶에

그래도 기쁘게 유지하게 하는

유일한 이유가 된다는 이야기다.

 이제 남은 여명..

이전 젊을 때 보다 더 희망이 있을 세상의 그 어떤 조건도 없지만

그래도 소망이 있음이 느껴짐은

주의 그 평안 때문이다.

두려움이 두렵지 않은

그것.

내 두려워 할 것이 오직

하나님의 이유임을 알아챈 깨달음 말이다.




6.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로 여기시고

보라.


두렵지만

주님을 믿음으로 인하여

'의'롭다 하지 않으시는가?

그게..

진정 두렵지 않은 이유다.

'주님 안에서 의로운'  자의 확신,

그래서 느껴지는 평강.



8.그가 이르되 주 여호와여 내가 이 땅을 소유로 받을 것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그리고는

무엇을 말해야 하는

무엇을 해야 하는 지

어떤 게 옳고 그름인지

무엇을 두려워 해야하는지..

확연하게 느껴지는 것.. 말이다.


내 살아가는 이유.

삶의 목적.

그리고는 흔들릴 때

여쭈어 볼 대상이 있고

그 대상의 너무도 크고 옳으심의 확신.


 아브람은

'무엇으로 알리까?' 하고 여쭈였다.

이전에는 그랬다.

세상 살면서

눈치 살피고 (아... 가슴조림.. )


알지 모르는 것에 대하여 두렵고

두려움을 느끼는 내 부족함이 들키는 것이 무섭고......

뭐.....


아브람은

주님이 의롭다하고

예언하여 주시고

그 위용과 위세로 확신하게 해주었을 것임에도

자신의 모름을

여쭈어 볼..

자연스러운 의지가 있었다.

그게 좋다.

나..

이제 더.. 자유롭다.




12.해 질 때에 아브람에게 깊은 잠이 임하고 큰 흑암과 두려움이 그에게 임하였더니

 또 두려웠다.

너무도 큰 흑암과 두려움이 임했단다.


'사단'의 것은

어둡고 으슬하고.. 뭐 그렇다.

그럴 것이다.



13.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그리고

그 결말이

처참하고 힘들 수 있다 .

그러함에도

그 마져

주님이 인도하시고 허락되어진 과정 중에 있음은

우리는 이제

잘안다.


며칠전, 수개월 전.. .

너무도 오랫동안의 그러함에 의하여

오늘 날 내가 있게 된 것이다.

반드시 '사단'의 그러한 횡포가

힘들고 어렵고 두렵지만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로 인하여 '하나님'의 역사가 또 이루어지는 매개체이니

그 어느 것 하나 주님 안에서

'선하지 않은 것'이 없다.

사단은 악하다.

그러나 그를 허락하시는 주님 안에서는 그렇지 않을 수 있다.

문제는

우리가

얼마나

아브람의 믿음처럼

그래도 주님이 .. 라는 믿음 안에서 바라보고 기다리냐다.


 두려움은

피하고 싶은 본질적 장애다.

그로 인하여서도 주님이 쓰게 하시고

그 두려움을 구분하고

그러함 속에도 주님이 인도하실 것임을 믿으며

기다리고 기도하면

그 안에서

크고 놀라운 주님의 뜻을 또 알 수 있는 계기가 된다는 것이다.

어렵지만

좁고 귀한 길.

두려움의 진실을

아브람님에게서 보고 있다.


감사하다.



주여.

그렇습니다.

주님의 평강 안에 거하면서도

가끔.. 원치 않는 두려움으로 흔들릴 때가

아직도 있습니다.

이전의 저항하지 못할 강한 두려움으로

내 삶을 붙들던 그 장애들은

주님의 허락하신 평강의 기조 아래

많이 들 무너졌으나

아직도 들여다 보고 마주할 두려움들이

좀 남아 있습니다.


주여.

그러함 가운데 깨달아지는

영적 원리들이 있습니다.


주여.

결국 두려움은

주의 허락되어짐 가운데

우리네 인생에서 펼쳐지지만

그를

주님의 허락되어짐으로 받아들임과

주님을 인식하지 못하고 피해야 만 하는 것으로

잘못 인식되어짐..

그 가운데 우리의 선택이 있음을요.

그리고 그 선택이 필요함을

깨닫고 알아챌 지혜와

그를 딛고 일어설 힘과 능력,

그리고 마침내

주 안에서 의 뜻을 알아채리고

우리네 삶속에서

받아들여 감사함으로 익혀 나가는데는

하나님을 사모하고

그리함으로 허락되어지는 '성령의 은혜'와

매일 매일 주 안에서 깨어 있을 우리의 노력이

하모니를 이루어 감도

이제는 알아채리게 되었습니다.


주여.

두려움을 두려워 하지만은 않겠습니다.


가능하면 없기를 기도하겠지만

허락되어지는 두려움이라면

더 깨달아 알고 돌이키어

내 영혼의 성숙과

깨닫는 원리를 세상에 베풀 자원의 축적으로 이루어 내길 기대합니다.

주여.


말씀대로 인도하소서.


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감사하며 기도하나이다.

아멘



 


-------------- (과거 묵상 분)


1.그런 나를 알고 계신다[2014.05.19] 
 

2 아브람이 이르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 하나이까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니이다
 아브람의 이 소리.

' 하나님.

 내게 무엇을 주시려 합니까?'

 이 소리의 깊은 본심은 무엇일까?

하나님께 구하는 것,

하나님께 여쭈어 보는 것.

하나님께 하소연 하는 것..

그것은 분명코 훌륭하지만

그 뒤의 소리를 보라.

나이 그렇게 많은데 아직 아들이 없는데

바라기는 하지만

맘에는 포기하고 있어서

하나님이시라도 가능치 않으실 이야기는 아니던가?

하지만.. 그래도 하나님이시니 '속상한 마음'을 다 내려 놓고

하소연이라도 해보자.. 하는 마음이 아닌가?

그게 정확할 것이다 .

그렇다면 그게 '믿음'인가.. 혹 의혹,  불신앙인가?

어찌 구분할까?

 

실은 이러한 구분이 중요한 것은

나름 깊은 고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게 '불신앙의 죄'일지도 모를 두려움 때문에

아주 많은 깊은 신앙인들 조차

주님 앞에 더 나가지 못하고 주저 앉아 버려

늙은 닭의 신앙이 되어 버리는 것이 아닐까?

아브람의 이 '무엇을 내게 주시려 합니까?"라는 고백이

오늘 내게는 절절한 원함의 본질인 것 같고

인간의 한계,

신앙인의 어려움의 본질인 것 처럼 느껴져

새삼 가슴을 흔든다.

 

 

 

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공의로 여기시고
 그런 그에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아브람이 하나님을 믿는다'

그래서 공의로 여긴다... 하신다.

분명코 그는 인간의 눈으로 하나님을 원망하는 듯한 뉘앙스의 어조로

하나님께 하소연 했는데.. .

그것을 뭐라하지 않으시고

그분은 '아브람의 믿음'만 보셨다 .

그리고 그를 공의를 소유한 자로 여기셨단다 .

 

그것..

어디까지 믿음의 수준을 높이냐도 아주 중요하지만

한계가 있는 것이다 .

개인의 특성,

그 사람의 자라온 환경,

믿음의 시간..

그리고 하나님이 그에게 원하시는 정도...........

그 복합적인 결과로 인하여 그가 어느 정도 성숙되어가는 지 결정되어 지는 것이다 .

그러기에 정말 중요한 것은

어떻게 믿는가도 중요하지만

하나님과 매일 동행하며 주의 말씀을 듣는 가와

그가 하나님과 대화하고 있는 가이다 .

나머지 , 성장 부분으로 인한 가장 아름다운 물음과 믿음의 정도는

하나님이 결정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 아직 아브람의 그 허탄한 조롱투의 말에도

하나님은 이리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시다.

 

 

7 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소유를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니라
그것...

아는 것이

나에게

많은 자유를 준다 .

난. . 단점이 많은 자다.

정말이다.

무척 급하고 다혈질이다 .

좋게 표현해서 그렇지 욱.. 하면 .. 끝이다.

매일 올라오는 죄성이 나를 사로잡는다.

그러고 나면 난.. 깊이 죄송함을 느낀다 .

그래서 한동안 주님 앞에 나가기 힘들었었다.

이제는 아니다.

그래도 나간다 .

그래도 '날 의롭다' .. 내 믿음을 .. 주님이 기뻐하셔서

내게 ' 네가 나 , 여호와를 믿으니.. ' 라시는 하나님이 계시므로

난 하나님 앞에 나간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들이 내게도 해당한다는 것을 믿게 되고

그것은 나로 '소망'이 커짐을 의미한다 .

 

소망이 있는 삶.

매일 매일 소망을 인정하며 사는 것은

행복한 삶이다 .

나이 불문, 날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이

영생을 약속까지 하니..

점차 두려움이 없어지고 가벼워 지기에 그렇다 .

 그분이 내게 '이땅을 주려고 갈대아 우르에서 빼어낸 하나님'이시라니

그렇다 .

 

감사하다 .

 

 

주님.

오늘 하루.. 수술 하고 나니 또 반나절이 다 지나가고

따사로운 햇살이 조금은 뉘역거리는

그 시간이 또 왔습니다.

정처없이 시간만 보내어 버리는 것 같고

오늘 무엇을 해도

더 이상의 의미가 없을 것 같던

그 어두움의 시간들은 점차 멀리 지나가고

참 가벼히

지금의 이 부드러운 가을 날씨의 양광을 즐기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창밖을 내다보면서

글을 완성해가고 있습니다.

 주님.

제게 주시는 말씀을 알 것 같습니다.

 

아직도 제게는

''아직 주여.. 제가 이루어 깨닫지 못하는

막힌.. 그래서 마음을 잠시 흐트리면 몰려들듯한

무거움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얼마 남지 않은 이 땅에서 인생이

꼭 그리 행복하지만 않을 것 같아요.. ' 하고 외치고 싶은

'아브람의 갖지 못한 축복'인 아들에 대한

허탈한 외침이 저와 비슷한 듯합니다.

하나님을 깊이 믿고

하나님으로 인한 소망은 있지만

어딘 지 모르게 이루어지지 않은 듯한

그런 조금은 안정되지 못한 믿음 .. 말입니다.

그러나.. 너무나 감사하게

그런 나를 알고 계신다. .. 고 하시는 듯

주님이 위로하십니다.

그게 감사합니다.

오늘 하루 .. .무거우려는 마음을

주님이 이렇듯 도장 찍으십니다.

 

그게 좋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묵상을 놓지 않고 잇습니다.

살아계신 내 아버지를 만나는.. .

정말.. 저는 이토록 부족한 믿음이지만

주하인.. 네가 나를 믿는 구나.. 하시니

그게 정말 감사합니다.

예수님..

살아게신 하나님 아버지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받들어

감사하며 기도합니다.

아멘

 

 



2. Θ와 대화(2005.08.21)

 

2절 ; 주님 나에게 무엇을 해주실 수 있습니까 나는 무자하나이다

창15: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1. 질문

 

1) 왜 '두려워 말라'고 하셨을까? 

 계속 아브라함과 말씀하셨는데...


: 이상(vision)중에 나타나셨다는 것으로 보아 이전에는 '말씀'과 '느낌'만으로

응답하셨으나  처음으로 현신하셨거나, 이전에 보이셨던 모습 보다 훨씬 웅장하고

 위압적인 모습이셨을 가능성이 크고 , 어쨋든 이전과는 다른 '성인'의 신앙심을

보이는 아브람에게 새로운 지표를 주시려는 행사적 목적인 듯

 

 

2) 2절에 다소 불손한 듯한 '무엇을 주실 수 있느냐?'는 아브람의 어떤 마음을

나타내는가? 

주님은 왜 당연하다는 듯이 받으셨을까?


; 아브라함은 많은 재물과 축복에도 불구하고 자손이 없음을 가슴 속으로 허전해

하고 있었으며 이런 마음은 주님이 가장 큰 상급을 주신다는 데도 , 현실적 판단

으로 가장 중요한 것이 '자식'이고 그것은 나이상 '불가능 할 것이고 주님을 괴롭

히지 않는 성인 성도의 할 일은 현실에서 최대한 주님께 누가 되지 않는 자신의

타협으로 종의 하나를 뽑아 후사를 택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는 하나님을 순종하고 그 분과 대화하는 믿음의 사람이었지만, 시선이 인간의

능력에 고정이 되어 있어서, Θ의 전능성에 대해서는 무의식적으로  믿지 못하거나

 아니면 자기 자신에 대한 자책감.. 이 있어 더 이상의 축복 - 최대한이 자손인데..

-을 기대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러한 포기함이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하나이다'라고 나온 것이다.


 Θ께서는 그러나 아브라함의 모든 마음을 다 알므로 그의 다소 불손해보이는 표현

조차 아무렇지 않게 넘어 갔다.

 

 주님과의 대화는 격식 보다는 솔직함을 원하신다.


그분은 그 분을 인정하고 의지하고 순종함을 원하지 나의 깨끗하고 무죄함을 먼저

요구하지는 않으신다. 
 아버지로서 자식을 도와주고 사랑하시려는 것이지 아들의 깨끗함으로 당신의

잘키움을 남들에게 칭찬 받으시려는 유치함은 전혀 아니신 것이시다.

 

 

3) 4절에서 6절까지의 상황은?

;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여'라는 상황은 아브라함과 Θ사이의 번갈아 진행되는

대화의 양상을 나타내는 듯 싶다.

 Θ는 그에게 후사를 주신다고 하시고 그를 이끌고 나가셨다.

마치 아버지와 아들 모습처럼.. 그런데 이끄는 상황이 어쩌셨을까?  

현신하셔서 어깨를 감싸안고 데리고 나가셨을까? 

아니면 느낌으로?

말씀으로 '가자'고 하셨을까?

 

 어쨋든 천막을 밀치고 초원으로 나가자 밤중에 눈앞에 펼쳐진 별들의 대 향연이 보인다. 

 

코를 통하여서는 풀들의 싱그러운 냄새, 아버지의 인자하신 지지는 굉장한 평안을

아브라함에게 가져왔다.  


잠시 믿기지는 않았었고 원망의 마음도 일 순간 있었으나, 그는 주님의 말씀이 그대로

믿겨졌다.  

 

 전혀 서두름과 터질듯한 격정적 기쁨도 아니었다. 

그냥 자연스레이, 평안히, 잔잔한 기쁨이 밀려오며 믿어졌다.

그러자 주님이 기뻐하신다.
그리하여 그를 의롭게 생각하신다. 

 

 '역시 아브라함은 귀한 아들이야.'

 

 

4) '이땅을 네게 주어 업을 삼게 하시려고' 데리고 나오셨다는 의미는 ?

 

; 주님은 확실히 영원 전 부터 당신의 프로그램을 착착 진행 시키시고 계셨다.   

 아브람이라는 인물이 갈대아 우르에서 나기를 기다리시고 그가 여러 세상적

어리석음을 통하여 자신을 깨닫고 성숙하기를 기다리신 것이다. 

  아직은 아니지만 주님의 시간이 되셨을 때 그 분은 당신의 개입을 선언 하신 것이시다. 

 

  상기한 것처럼 '성인식'같은 행사를 치르시면서 '아브라함'을 초원의 별밤을 보게

하며 그에게 앞으로 있을 당신이 장구한 계획의 일부분에 아브라함을 참가 시키기

위해 그토록 연단하신 비밀을 말씀하시고 계신 것이시다.


아들이 커서 대학교 들어가니 그동안 그렇게 가지고 있는 인생의 플랜에 그 아들을

동참시켜 거대한 사업을 이루려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는 것같아 마치 영화같다.

 

 

5) 6절에서 어리석은 질문처럼 보이는 '무엇으로 알리이까'라는 것은 왜인가?


; 아브라함은 모든 걸 명확히 알기를 원했다.  

모르는 것은 모르는 것이다.   마치 Θ을 위하는 것 처럼 , 의심하며 좋은 말로

비위를 맞추기 보다는 솔직하게 자신의 의문점을 물어보는 것이다.

 

 '물어보고 솔직히 대화를 하는 자를 주님은 이뻐하신다.'


 
6) 아브람은 제사를 준비하고 한참을 기다렸다 . 

그리고 그 사이에 '솔개'가 채려는 불손한 광경도 연출이 되었다.  

 그리고 캄캄하여 심히 무서운 밤이 연출이 되었다. 

Θ께서는 왜 갑자기 침묵으로 기다리시게 하셨는가?


: 이후에 있을 이스라엘 백성의 어려움을 알게 하시는 목적이셨을 것이다.  

성인으로 거듭난 자의 앞길에는 마귀의 호시탐탐한 공격과 깊은 어둠을 통한

연단이 있을 것이며 그 동안 주님은 안계신 것 처럼 무응답의 시간이 있을 것

이라는 것을 보이시기 위함일 것이다.


 그래서 곧 주님이 아브람에게 이르는 말씀이 진행이 된다.

 

 

7) 나에게 하시고자 하는 말씀은 무엇인가?


; 현실적인 모든 것을 아들 처럼 주님께 여쭙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주님을 믿는 과정은 반드시 연단 과정을 거쳐야 할 것이며 때가 되면 주님은

 내 앞에 현신하실 것이시다.  

그리고 말씀도 주실 것이시다.  

그리고 나서도 주님은 주님의 시간표 대로 진행할 것이시며 가장 중요한 것은

 그 과정에서도 주님과 대화를 진행하고 기다리는 것이다.  

 

  주님은 어떤 상황이 있어서도 아브람에게 평안히 지내다가 장사지낼 것이시란

언약처럼, 어찌 되어도 '선'을 위한 어려움일 것이다란 보장을 하신 것이다.
 


 2. 적용

 

. 물어보는 기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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