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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를 향하여( 막8:27-9:1) 본문

신약 QT

하나님 나라를 향하여( 막8:27-9:1)

주하인 2011. 1. 25. 11:45

제 8 장 ( Chapter 8, Mark )

 

또 하루가 밝았습니다

새로운 날이 시작되었습니다

주님의 해가 다시 떠올랐습니다

 

주여

이제 저도 

하나님 나라를 향하여

새로운 발길을

내 딛겠습니다

 

29.  또 물으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매 
 가장 믿음이 좋다고 알고 있는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라 고백한다.

맞다.

훌륭하다.


  
31.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저희에게 가르치시되 
32.  드러내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매 
 그러나 , 주님이 '십자가의 죽음'을

드러내놓고

말씀하시자 

격렬한 베드로의 반응이 나온다.

새삼스럽다.

'붙들고 간하매'라 한다.

 

그의 저 당당한 믿음의 신앙인인 '주는 그리스도니이다.'라는 

답이 나온지 얼마 되지 않은 반응이라서

더욱 놀랍다.

 

 결국 그의 고백은

세상의 영화를 염두에 둔 신앙에 국한됨이다.

 
 
33.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가라사대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제 9 장 ( Chapter 9, Mark )
1.  또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하시니라

  더욱 더욱 놀라운 것은

그런 그를 보고 꾸짖으시는 예수님이시다.

그것도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하신다.

  

  그 이유가 ..........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일'에 있으시다.

 

 그렇다면 베드로의 저러한 격변과

예수님의 칭찬 다음에 저러하신 질책이란

두 분 모두에서 보이시는 급격한 감정의 변화의 중심은

' 하나님 나라'를 생각함과 생각하지 않음 사이의 격변이시다.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했지만

그것은 이 땅의 번영을 의미한 것이고

십자가의 고난은 생각도 해보지 않은 것이다.

예수님 공생애 사역 중의 고난에 동참함은

현실의 보상을 감안했기에 가능했던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희망이 꺾임을 느끼고 격렬한 반응을 보인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리스도' 메시야는

하나님의 나라가 궁극적 목적이시고

거기에는 고난은 필수 임을 말씀하시는 것이시다.

세상의  번영이 궁극은 아니다.

 

" 하나님의 나라. "

 

 여기에 모든 인생의 비밀이 담겨 있다.

 예수께서 성육신 하시고 고생을 하시며 십자가에 주님이 달리신 이유도 '하나님의 나라'다.

세상을 살게 하는 이유도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 만들기 위함이다.

환란과 고난을 통하여 연단을 이루어 정금 같이 나오게 함이시다.

그러기에 환란이 목적은 아니더라도

환란은 필수 불가결한 과정이다.

환란이 없음은 버림이다.

그러나, 환란 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즈음의 베드로는 성령체험이 없는 상태다.

성령으로 영적, 육적, 심적.. 온전한 전인적 도움을 받는다.

 

 하나님 나라는

내가 살아가는 궁극의 목표다.

주님은 모두가 그리 하길 기원하신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성령으로 느끼게 하시긴 한다.

그것이 중요하다.

 

 나.

열심히 열심히 나아가다

한참 흔들리다가

다시 열심히 나가다

또 한참을 흔들린다.

점점 진폭은 줄어들지만

진동한다.

왔다 갔다 한다.

 그러다 점차로 안 흔들림이 오래 지속되면서

살그머니 옛날 버릇이 나온다.

그러다가 메마르고...흔들리다가

다시 정신을 차린다.

요즈음이 그런 거 같다.

진폭이 적으니 고통도 적은 반면 감동도 적다.

감동이 적으니 멍하다.

죄가 죄인지도 모르고 죄를 짓는 경우도 많다.

아마 이 상태로 지속이 되면

딱딱한,

주위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오래된 장닭신앙이 되지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다.

그래도 말씀이 있으시기에

자꾸만 일어서지만

시간이 지날 수록 그 뜨거움은 소실이 되어가고 미지근해짐을 느낀다.

그럴 때 가끔은 깊은 믿음의 회의까지 슬그머니 들때도 없지 않아

아...이것은 무엇인가 잘못된게 아닌가 할 때가 있다.

그래서 요 며칠 작정기도의 결심도 있고 해서

'기도원'을 올랐다.

마음이 후련하다.

기도원 올때마다 '통쾌하다'는 느낌을 들 때가 자주 생긴다.

나.

그래서 믿음을 유지하고 있다.

이 통쾌함은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느낄 수 없음을 안다.

'뻥~'하고 뚫리는 기분.

얼마나 그럴 때 마음이 시원하고 통쾌한지

하나님은 살아계시다.....하며 연신 입으로 되뇌이는 경우가 없지 않아 많다.

세상의 어떤 논리로도 설명할 수 없고

어떤 의학적 도구로도 환우들에게 줄 수 없는 그 통쾌함.

 성령이 허락하신 ..

 

 이제 보니 그렇다.

내가 추구하는 것이 '심리적 안정 ' 만은 아니던가

스스로 당혹해 하던 문제..

하나님 나라 가기 위해 허락 받아야 할 당연한 부분이다.

문제는 진정으로 더욱 내가 바라고 추구해야 할 부분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를 더욱 간절히 바라는

영적 에너지의 집중이다.

 

 하나님 나라를 간절히 바라게 되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나를 흔들 수 없게 된다.

그렇다고 세상을 도피하는 것과는 다르다.

도피함은 '평강'이란 단어와는 거리가 멀다.

망각이다.

 하나님 나라를 사모함은 통쾌함이고 에너지 충만함이 따라온다.

 

어제 신문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행복하기 위해서는 ' 이라는 내용의 글을 실은 것을 보았다.

최대한 빨리 빨리 살아오면서

세상에 유래없는 경제적 성공을 이루었지만

행복지수는 전 세계 최하라 하며

그 행복하지 못함의 이유가

부를 추구함과 '비교'에 있다한다.

당연하겠지만..

 나.

이제 예수님 믿어 시간이 지난 지금은

거의 상당히 행복하다.

평강은 행복을 넘어서는 개념이다.

눈물나는 기쁨,

촉촉한 안온감.. 행복이 터져나올 듯함...이다.

그러나, 가끔 가끔 잊을 때가 있다.

흔들릴 때가 있다.

예를 들어 많이 놓았다 하는 자식들 부분에서 그렇다.

또.. 말하기 힘든.. 몇가지에서 그렇다.

 그래서, 행복이란 면에서 다시한번 생각해 본다.

객관적인 부는 그리 행복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비교'가 문제다.

 비교.

참으로 오랜 시간 나를 묶어 오고 있는 내적 문제.

그렇게 그렇게 키워져 습득해 온 논리가 그득하다.

말씀 안에서 아주 많이 흐려졌음에도

몇 부분에서 강하게 나를 밀고 들어올 때는

힘이 들때가 없지 않다.

그러나, 그런 그러함도

실은 가만히 생각하면

이땅에 욕심이 많음이다.

  마치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 하며

가장 신앙이 뛰어난 자 처럼 이야기 하지만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다 말씀하시니

깜짝 놀라며 그동안의 고생과 장래의 희망이 사라질

이 ... 세상적 관점에 묶여 있음이

불현듯 그의 전 영혼에 사로잡아 옴이

그로 하여금 펄쩍 뛰며

심지어는 예수님을 '질타'하듯이 - 주석에 그리 나온다 ㅜ.ㅜ;;- 매달리는 것이다.

그는 '세상의 욕심'에 사로 잡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통렬히 혼내신다.

심지어는 '사단'이라고 까지 한다.

 

그렇다.

어느 정도까지는 주님은 다 이해하고 받아 주신다.

그러나 , 제자의 믿음은 '하나님 나라'에 눈을 고정해야 한다.

하나님 나라를 바라봄은

세상의 유혹과 흔들림에서 자유로와짐을 의미한다.

행복하여 진다.

그 것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그렇게 됨이다.

하나님 나라를 바라봄은

비단 '선교'나 '전도' 가 목적이 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어떠한 자리에 있던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최선을 다하기에

전도가 자연히 나오게 되고

찬양이 나오게 되고

기도가 자신도 모르게 쌓이게 되며

주님께서 필요하다시면 ' 선교'에 목숨을 버리게도 된다.

그것은 '자유로움'이다.

흐름이고 순리다.

 

나.

조금 흔들린다.

자꾸 편안해지니 눈이 아래로 향한다.

베드로의 입신이나 양명에 눈을 돌리게 된다.

편안함만 기뻐하게 된다.

하지만 주님은 하나님 나라를 보길 바라신다.

지금 나에게 그러신다.

 

 

 

적용

1. 하나님 나라..를 묵상하자.

 하나님을 위하여 내가 산다.

 나를 위하여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다.

 

2. 평안함 만이 목표는 아니다.

 하지만 평안함과 기쁨은 없으면 안된다.

 하나님 나라를 추구하는 자에게는 반드시 증상으로 나타나야 하는 현상이다.

 

3. 기도한다.

 아내를 위하여 작정기도한다.

 

4. 성경 세장 읽겠다.

 

5. 베드로와 닮은 나.

  나를 위하여 하나님을 믿는지

  착각하는 것은 아닌지

 하나님 나라가 우선이 되어야 한다.

 회개한다.

 

기도

주님.

쉽고도 어려운 묵상입니다.

주님 나라를 위해 산다는 것은 때로는 세상의 모든 것도

포기하고 내려 놓을 수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기에

감히 저 같은 자는 어찌할 수없지만

묵상의 진행상 특별한 경우를 빼고는

주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자연스레이 흐르는 듯

기쁨으로 나아갈 수 있음이 이해가 됩니다.

주님.

그리되기 위해서

제 믿음의 성장이 필요합니다.

주님의 평안을 저에게 주소서.

주님의 나라를 사모하고 또 사모함으로

세상의 어떤 것도 절 사로잡지 못하게 하소서.

흔들리지 않게 하소서.

성령으로 강하게 붙드소서.

 아내.

세상에서 짝지워주신 제 아내를 위해 기도합니다.

주님 오시기 까지

하나님 나라를 죽도록 사모하는 믿음의 동역자로

굳게 서도록 주님 밝혀주신

아내의 그 질병을 잘 치유시켜 주소서.

집도하시는 선생님의 손길 흔들리지 않게 하시고

끝나고서도 무사한 쾌유를 기원합니다.

끝까지 지키소서.

사단 틈타이지 않게 하시고

두려움을 뚫고 오려는 사단의 그럴 듯한 논리로 부터

아내의 마음을 잡으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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