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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QT

짐승되지 않기(계13:1-10)

주하인 2006. 8. 14. 09:23

(요한계시록13:1-13:10) 

 

5 또 짐승이 큰 말과 참람된 말 하는 입(utter퍼뜨리다  proud words교만한 말을 and blasphemies

   신성모독 , 독설 )을 받고 또 마흔두 달 일할 권세를 받으니라

6 짐승이 입을 벌려 하나님을 향하여 훼방하되 그의 이름과 그의 장막 곧 하늘에 거하는 자들을

   훼방하더라

( 지옥이 따로 있습니까?   서로 미워하고 말함부로 하면 그게 그거지.. )

 

 개그 프로를 보면 여자 개그맨이 당연히 치마를 입고 당연한 역할을 해도 재밌을 것을 남자가 치마를 입고 역할을 해야 재밌는 것처럼 하더만, 이제는 그렇지 않으면 안 웃기는 얘기가 되어버렸다.

 영화 선전에는 공공연히 남자가 남자를 뽀뽀하는 것이 나오고, 그게 어딘지 모를 수준 높은 영화를 의미하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도록 되어 있다.

 대박나는 영화는 동성을 주제로 펼쳐지는 영화이고

세계적인 영화 시상에도 별로 재미없는 (ㅎㅎ 개인적 생각) 동성애 영화가 탄다.

굳이 동성애에 대한 문제를 토론하고 싶지 않지만  이런 성역할의 붕괴가 너무도 당연하게 느껴지도록 세상이 마구 돌아간다는 게 문제다.

 또,  예전에는 어르신들은 말을  조심하고 , 아이처럼 함부로 말을 뱉는게 굉장히 가문의 수치였다.

이제는 대통령도 '못해 먹겠다'..등의 단어를 툭툭 내뱉어도 아무렇지도 않다.

곳곳에서 어르신들이 '독설'을 거침없이 내뱉는다.

얼마 전까지는 그런일이 이슈가 되던 세상이었지만

지금은 가십거리도 못된다.

이런 어리석은 일들은 세상 어디에서나 어느 계층에서나 거의 비슷하게 진행된다.

 주말 TV에서  연예인들이 게임하는 프로그램에서는 새디스트 적인 발언들이 마구 난무한다.

한 사람의 왕따 인물을 설정해놓고 갖은 모욕하면서 재미를 유도하는 건 아주 오래되었다.

 자기 자랑이 없으면 바보다.

자기를 높이기 위해 성형외과는 문전성시를 이룬다.

 교계에서도 교육보다는 이득이 우선이 되어감이 당연하게 되어가는 추세다.

나라는 망해도 자기 만 챙기기에 급급하다.

 아이들은 인터넷에 빠져 허우적 거린다.

거기에는 의미나 사랑이나 긍휼이나 온유나 ... 따질 여유가 없다.

그냥 의미없는 말들이 마구 난무한다.

 이벤트가 될 듯한 곳에는 광풍처럼 몰려들어 악플..들이 꼬리를 물어 한 사람을 짓이긴다.

( 이 짐승도 앙칼지면 보기 싫어 집니다.  ㅎㅎ )

 

 짐승같은 일들이 도처에서 우리의 도덕성을 검증할 겨를도 없이 사람들을 휘몰아쳐 간다.

 

 기독교인은 점차로 줄어간다.

기도하는 자들도 줄어간다.

성령이니 보혈이니 얘기하면 어이없는 자로 몰린다.

고리타분한 사람처럼 느껴지게 한다.

점차로 냉랭해져간다.

 

 

짐승이

후3년 반 동안

사탄의 권세를 받고

온통 교만한 말과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마구 늘어 놓고

독설을 마구 쏟아놓으며

그게 진리인양 만들어 간다.

 거기에는 그들 만의 권능이 있다.

사람들은 저항할 힘이 없다.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들은 모조리 그 안으로 쓸려 들어간다.

 

 사람이 정신 차리지 못하게 몰아간다.

이유가 있다.

그들은 짐승이기 때문이다.

 

 이런 일들이 나에게 당연히 벌어지기 전에 우리는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

 

 

혹시 지금 나는 짐승의 궤변을 흉내내고는 있지 않은가?

혹시 나는 짐승의 문화에 눈돌리고 있지 않은가?

세상을 지배하는 강력한 다수가 혹시 짐승의 권세에 속하는 것은 아닌가?

 이렇듯 짐승훈련을 하다가 막상 짐승이 지배하는 세상이 되어도 짐승을 그리스도로 착각하는 것은 아닌가?

 

 

 

 

 

 

9 누구든지 귀가 있거든 들을찌어다

10 사로잡는 자는 사로잡힐 것이요 칼로 죽이는 자는 자기도 마땅히 칼에 죽으리니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

( 귀없어도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 )

 

 귀가 있다고 다 들리는가?

 

오직 했으면 '귀가 있거든' 이란 표현을 하셨을 까?

 

왜 주님은 그토록 들으라고 소리내시는가?

( 들을 찌어다.. 라는 소리가 아침 묵상에 절규처럼 느껴진다...)

 귀가 있어도 들을 수 있는 자가 되어야 한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도 행치 아니하면.. 이라고 하신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말을 조심하여야 한다.

가능하면 순리에 어긋나는 말은 하지 말아야 한다.

 세상에 어디 순리가 있는가?

오직 귀를 열고 주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늘 성경을 읽어야 한다.

거기에 가치가 있고 기준이 있다.

아니면

순식간에 짐승의 권능에 유혹되어 들어간다.

그것은 찝찝하다.

그것은 냄새가 난다.

유혹적이지만 두렵다.

 

 10절의 NIV 번역은 이렇다.

' 사로잡히게 되어 있는 자는 다 사로잡힐 것이요, 칼로 죽게 되어 있는 자는 다 죽을 것이다. '

 

무슨 뜻인가?

 

 사로잡히게 되어 있다는 것은 주님의 말씀이 나에게 들려 왔음에도 , 내 귀로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귀를 닫고 들은 체 하지 않는 자는 결국은 사로 잡히게 되어 있고, 이러한 자들은 결국 사로잡힐 것이고 죽을 것이라는 얘기다.

 

두렵다.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있다 고 하신다.

 

 이 말씀이 귀에 들려올 때

귀를 열고 듣고

그 말씀을 준행하고자 인내해야 한다.

그리고

그 말씀이 주님의 말씀이였으며

그 말씀을 준행하면 반드시 주께서 기뻐하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 짐승이 횡포를 부릴 때 흔들리지 않는다.

그래야 '죽을 예정이 된 자'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

 

이 3년 반의 횡포는 무섭다.

 

세상의 기준이

그냥 감각적으로 이쁘면 '선'이다.

거기에는 어떠한 객관적 기준이 없다.

 

매체나 다른 경로를 통해서

다수가 옳다고 인정하면 봇물처럼 쫓아가고

거기에 쫓아가지 못하면 과감하게 왕따 당한다.

 

그러니 이유없이 쫓아다닌다.

명품도 그 하나다.

 

 우리는 참으로 어려운 이 시대에 눈을 들어 세상을 한번 멀리 떨어져 쳐다볼 관조의 눈이 필요하다.

다시 말씀하시지만

주님의 말씀에 귀를 열어야 한다.  

귀를 열고 인내와 믿음으로 자신을 돌이키고 다져야 짐승의 권세와 횡포에 견뎌낼 수 있다.

그래야 7년의 대 환란이 끝난 후에 웃을 수 있다.

 

 

적용

 

1. 오늘 하루는 TV를 보지 않겠다.

 

2. 재미 보다는 성경을 읽고 묵상을 하겠다.

 

3. 유행보다는 침묵을 택하겠다.

  침묵 가운데 주님의 소리를 듣겠다.

 

4. 우리 아이들에게 고리타분하지만 믿음의 기쁨을 가르치는 아빠가 되도록 노력하겠다.

 

 

기도

 

주님

세상의 험악하고

본능적인 돌아감이

오늘의 묵상의 짐승의 본질과 너무 유사하여

소름이 끼칩니다.

 

이제 세상의 변화를 보아도

묵상의 징조와

세상인심의 돌변을 보아도

얼마남지 않았을 듯 보입니다.

 

이제

눈을 들고

귀를 열어

주님의 말씀을 늘 묵상키를 원합니다.

 

도우소서.

예수님의 이름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참된 영광을 이루는 것은 믿음의 경주를 완전히 마칠 때까지 지속하는 인내다.

- 토마스 칼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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