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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福 (시72:12-20 )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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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福 (시72:12-20 )

주하인 2009. 7. 29. 11:49

제 72 장 ( Chapter 72, Psalm )

 

 

 

나와 내 가족은

주님의 福만 원한다.

 

그냥

주님 계신 곳만 쳐다보고

주님의 주신 그 광활한 은혜로

에너지 삼아 살아가는

그 놀라운 福을 원한다.

 

주님의 그 福으로 인하여

나와 우리 주위에

같은 福이 임하길

간절히 원한다.

 

  


12.  저는 궁핍한 자의 부르짖을 때에 건지며 도움이 없는 가난한 자도 건지며  
13.  저는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긍휼히 여기며 궁핍한 자의 생명을 구원하며 
  

' 저'- '그'-는 이라고 표현 하셨지만

'나'는 이 되기를 원합니다.

 '나' 뿐 아니라 '나의 아들 들'도 되기를 원합니다.

아니 주님을 기뻐하려는 모든 선택받은 자들이 그리되길 원합니다.

 어찌되었는 '나'는 궁핍한 자들이 부르짖을 때 건지는 자가 되길 원합니다.

도움을 받을 수 없는 가난한 자들도 건질 수 있기를 원합니다.

아닙니다.

솔직히 그럴 능력도 자격도 없습니다.

그냥 일단 그들을 긍휼히 여기는 자가 될 수 있길 원합니다.

궁핍한 자의 생명 (!)을 구할 수 있는 자가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가난한 자 궁핍한 자...를 떠올리면

이상하게도 아픈 허리가 더욱 당겨지는 것 만 같다.

왜인지 모르지만 가난한 자..라면 움찔 하게 된다.

냄새가 날 것 만 같고

꼭 매달릴 것 만 같다.

 마음이 여려서 불쌍한 것을 그냥 지나치지는 못하지만

적극적으로 나서서 불쌍한 자를 긍휼히 여기지는 못한다.

특별히 부탁을 하려 다가 오거나

필요에 의해서 다가오려는 자들을 경계하는 편이다.

적극적으로 봉사하는 것을 상상하고 바래 보기도 하지만

위에 적은 증상들이 느껴지면 뒤로 움찔해진다.

열심히 도와 주다가도 금방 지칠 것만 같은 두려움도 없지 않아 있다.

그렇다면 도와주는 나에게나 그들에게 서로 상처가 되지 않을 까하는 걱정도 있다.

 왜 그런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내 특질에 문제가 있다. ^^;

역기능 가정.....이라고 생각될 수 있는..ㅎ

장남의 조금 떨어짐과 질투.

과도한 기대와 의지하려는 .......................

나도 모르게 그래서 '의지하고 도움 받으려는 '자 들에 대한 혐오 비슷한 감정과 더불어

여린 마음이 날 복잡하게 만들었던 것 만 같다.

 이제 주님의 긍휼이 꺼끌한 심령을 바로 잡아 가신다.

자주 긍휼의 마음이 솟아 난다.

 의지적으로 나가서 그들 가난한 자나 도움이 필요한 궁핍한 자들을 도울 자신은 없지만

내 마음에 자주 소록소록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솟아남을 느낀다.

그때 참 평화롭다.

그것이 주님이 내 구겨진 영혼을 세탁하는 과정의 산물이라 생각하면

참 기쁘기 한량이 없다.

그래.

영생을 산다면 이러한 평화를 가지고 사는 것이 옳다..라는 것을 깨달아가고 있다.

진실로 주님이 세상에 오셔서 주시고 자 하셨던 것이

구원을 통하여 얻어진 천국 백성의 자격 후에

연단을 통하여 정결해진 후에야

얻어지는 이 긍휼의 마음이 아닐까?

 

 긍휼한 마음이 세상에 넘친다면 세상은 어찌 변할까?

다툼이 없어질 것이다.

남이 잘되는 것이 '기쁨'이고 그 기쁨은 자신의 영혼의 놀라운 평강을 가져오는데

싸움이 어디있고 다툼이 어디있는가?

방법이야 틀렸지만 세상에 유토피아를 건설하고 싶었던 공산주의자들의 처음 마음도

이런것은 아니지 않았을까?

 인간의 방법으로는 절대로 불가능 한 것이 다툼없는 온전한 나눔이지만..

그래 .

주님 만으로 가능하다.

주님의 기쁨을 이해하고

주님이 주신 그 긍휼의 마음을 회복하고

그 긍휼함이 주는 평강의 은혜를 영혼 깊숙이 누리는 것이

바로 '복'의 실체다 .

 

    
17.  그 이름이 영구함이여 그 이름이 해와 같이 장구하리로다 사람들이 그로 인하여 을 받으리니 열방이

       다 그를 되다 하리로다 
 ' 복'

한국 사람 들이 그토록 사모하고 받기를 원하는 '복'.

그 복의 실체가 무엇인가?

 돈이던가?

사람들에게 물어보라 .

돈을 주면 복을 받는 것인가?

아니라고도 아니하고 그렇다고도 아니할 것이다.

 자식이 잘되는 것?

많은 사람은 그렇다고 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도 돌아서서는 꺄우둥 할 것이다.

정말 맞는 것일까?

 오래 건강하게 사는 거?

일시적으로는 그게 그럴 것도 같을 것이다.

거기에 남자들 같으면 성적으로 변강쇠의 능력을 발휘하고

주위에 몇몇 미녀를 숨겨두고 애인 놀이 할 수 있으면 '복'이라 할까?

그렇다고 끄덕이는 자 몇은 있을 것이다. ㅎㅎ

하지만 그게 복이 맞는가?

정말?
 명예는?

모두 마찬가지 일 것이다.

현실의 자신에게 부족한 것이 채워지는 것을 '복'이라 착각할 수 있겠지만

그 어느 것도 '복'이라 뚜렷이 정의 내릴 만한 것은 없을 것이다.

더구나 그런 모든 것들은 '유한 한 '것들이니까...

정확히 복을 정의 내리라면 누구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없는 개념이지만

이 '복'은 한국 사람들이 그렇게도 좋아하는 개념이다.

 기도원에 올라가면

이 '복'소리가 수도 없이 많이 나온다.

'복'을 빌어주지 않는 부흥사는 자격이 없어 보인다.

 무당들은 어떠한가?

점쟁이들은?

다 '복' 때문에 먹고 사는 자들이다.

그럼에도 무엇이 복이던가?

 

 위의 글을 통하여 나는 '복'의 개념을 명쾌히 설명했다.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은 어쩔 수가 없다.

하지만, 이웃을 위한 긍휼한 마음을 가지고

자신이 누리는 영적인 평안함을 가지게 된다면

일단은 그것은 '복' 받은 것이 맞다.

단, 하나님이 주시는 회복된 영혼을 가지고

자연스레이 나오는 '사랑의 감정'인 '긍휼'이 아니고는

모두 이지러진 또다른 자기 야욕에 다름없는 것이다.

 불신자들도 열심히 봉사한다.

구제한다.

하지만 그들 속에는 '평강'이 있을 수 없다.

그들은 '자기 만족'적 후련함은 있을 수는 있다.

'겸손'도 '봉사'도 지나치면 무서운 교만이 된다는 이야기가 있다.

절대로 맞다.

그게 가장 꼴 불견인 모습이다.

이중적인 가장된 겸손.

이런 자들은 구제할 길이 없는 죄악으로 빠져들어간다.

누구도 고칠 수 없는 교만함.

 순서가 바뀌어야 한다.

주님으로 인한 '은혜'의 체험을 통하여

영혼이 회복이 되고

터져나오는 '긍휼'의 사랑의 결과.

그래서 주위 사람들이 그로 인하여 선한 영향을 받고

그가 있는 곳이 모두가 '사랑'의 터전이 되어가는 것.

그것이 '복'의 실체이다.

'복'이란 그런 것이다.

 

 난 '긍휼'을 회복하길 원한다.

주님이 내 영혼에 본질적으로 넣어 주셨던 그 선한 감정을 회복해야 한다.

자라면서 입은 타격으로 통하여 짓눌렸던 영혼의 주름들이

성령의 다리미로 다려지고

성령의 바느질로 꿰메져서

깨끗한 영혼으로 거듭나야 한다.

그래서 내 속에서 터져나오는 사랑의 긍휼의 감정이 쏟아져 나와야 한다.

그래서

12.  저는 궁핍한 자의 부르짖을 때에 건지며 도움이 없는 가난한 자도 건지며  
13.  저는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긍휼히 여기며 궁핍한 자의 생명을 구원하며 
하는 경지까지 가게 되었으면 한다.

 나 뿐 아니라

내 자식들도

이러한 '남을 위한 사랑'이 영혼에서 터져나오는 하루가 되길 소원한다.

 그 복된 사람이 되어

영생을 사는 자가 되길 원한다.

 

 

적용

1.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기겠다.

 

2. 캄보디아와 그 사람들에 대하여 긍휼한 마음을 가지길 소원한다.

 기왕에 맡겨진 사명.

 마음에서 긍휼한 마음이 차오르길 기도한다.

 

3. 엉터리 같은 판단이 먼저 올라와도 가난하고 궁핍한 자는 피하지 않겠다.

 

4. 성경 일곱장 읽겠다.

 

5. 한분 도울 마음으로 오늘 하루 보내겠다.

 

 

기도

 주님

계속 고백했지만

저는 긍휼한 마음이 부족합니다.

남을 위해 중보기도를 잘 못합니다.

열심히 주님이 말씀으로 권면하시고 환경을 조성하셔서 어쩔 수 없이 연습은 하고 있지만

솔직히 아직도 마음은 메말라 있습니다.

어쩌면 이러한 심령을 가지고 남을 긍휼히 여긴다는 게 위선이 아닌가 하는

양심을 가장한 사단이 제 심령을 구기고 있는 지도 모릅니다.

주여.

간절히 소원할 것은

그런 제 심령에 긍휼한 마음으로 차게 하시고

긍휼함을 베풀다가 상처입을 두려움에 미리 겁먹지 않게 하여 주세요.

허리가 뻐근하려합니다.

이래서 되겠는가 생각이 듭니다.

주여.

주님이 인도하시면 모두 될 줄 압니다.

저로 인하여 오늘의 말씀이 이루어 지게 하소서.

궁핍한 자를 건지는 하루가 되게 하시고

가난한 자, 그중에 도울 사람 없는 자에게 손 내미는 하루가 되게하소서.

제 뜻이 아니고 주님 뜻대로

저의 심령에 함께 하소서.

구겨진 심령을 펴주시사 그 긍휼함의 놀라운 평안을 제가 누리게 하소서.

실은 제 자식도 그리하게 하소서.

제 가정 모두가 그리되게 하소서.

놀라운 주님의 인도하심으로 그리하게 하소서.

자신 만의 세계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그래서 복받는 우리가 되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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