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억울 함에도 주님의 이유가 있다 ( 시73:1-16 ) 본문
제 73 장 ( Chapter 73, Psalm )
모든 일에는
질서가 있다.
주님은 그리 만드셨다.
무질서 한 듯
악인이 앞서 나가는 듯 해도
그것은 잠시다.
더 큰 징벌이
그들에게 있을 것이다.
참고 인내하는 주님의 자녀는
결국 높임을 받게 될 것이다.
그게
주님의 질서다.
1. (아삽의 시)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주님의 뜻은 이루어 진다.
반드시..
주님으로 인하여 마음이 정결한 자는 '주님의 선'을 받을 것이다.
2. 나는 거의 실족할 뻔하였고 내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그러나, 그 '선'이라는 것이
우리의 바램과 반드시 일치하는 것인가?
권선징악?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우리의 단단함을 위하여 '연단'을 허락하신다.
그 연단을 통하여 윌의 죄악과는 상관없는 고난과 고통은 따른다.
그러나, 어느 때는 이런 사실을 알고는 있지만
너무 심한 곤란과 고난은 '선한 주님의 자녀'에게도 좌절을 가져올 수 있다.
실족.
미끄러질 뻔함.
3.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시하였음이로다
7. 살찜으로 저희 눈이 솟아나며 저희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지나며
9. 저희 입은 하늘에 두고 저희 혀는 땅에 두루 다니도다
12.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이라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 하도다
참 오랫동안 따라 다니던 속상함의 실체들.
' 아니.. 나는 이런데.. 저들은 ..'
' 하나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자를 연단하신다시지만 그래도...'
특별히 마음이 곤고할 때
눈을 자신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뜻에 돌려지기 보다는
외부와의 비교를 통하여
특별히 믿지 않는 자들의 성공을 볼 때
이러한 생각들이 들지 않는 다고 누가 장담을 하게 될 것인가?
13. 내가 내 마음을 정히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그럴 때 이런 생각까지도 들기도 한다.
' 예수님께 구원 받고 그 분의 그 십자가의 사랑이 놀라워
주님예수님을 닮으려 노력하며 절제하고 자제해 왔고
나에게 주어진 모든 어려운 환경들을 주님의 연단으로 이해하여 노력해왔지만,
그래서 정결한 마음을 가지고 주님 곁으로 가려는 일념으로
지금껏 참아오고 인내 해왔지만
이제껏 해온 이 모든 것들이 혹시 허상은 아니던가?
혹시 내가 헛된 노력을 해온 것은 아닌가?
내가 방향을 잘못 잡은 것은 아닌가?
그래서 이렇게 혼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렇지 않다면 나는 왜?...........'
14. 나는 종일 재앙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책을 보았도다
' 지금 이 나이까지 이런 고통을 당해야만 하는가?
과연 하나님이 살아계시면...
내가 얼마나 잘못했으면....
이런 징책을 지금까지 되풀이 해야 하는가?
언제까지 이런 고난을 겪어야만 하는가?
저 들 믿지 않는 자들은 저리 고민 없이 편안히 살기만 하는데..
날 좋은 날이면 산에 올라가고
내려오다가 시원한 막걸리도 하고
서로서로들 즐기면서도
돈은 어쩌면 저렇게들 잘쓰는가?
왜 나는 이렇듯................'
16. 내가 어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내게 심히 곤란하더니
When I tried to understand all this, it was oppressive to me
지금...
비교적 고난 중에도 평안을 유지할 즈음의 '지금'...
이제는 평안한 마음 가운데
불공평한 것에 대한 비교 조차 포기하고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허덕 거림도 제법 멀어진 지금
오직 주님 만을 가까이 하는 것,
주님과 동행하는 것
주님의 말씀의 살아계심을 느끼는 것 만이 '복'인 줄 알게 된
이 즈음에야 '위의 사실'들을 영혼으로 '이해'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주님을 더 가까이 하고자 몸부림 치는 몇 몇 분들에게는
어느 정도 익숙한 위와 같은 패턴의 고난이 되풀이 되고 있을 지 모른다.
고통의 원리.
고난이 오는 것 처럼 위안이 함께 온다...
연단 후 정금과 같이 나오기 위한 과정이다...라는 것을 알기는 하지만
매 순간 이런 원리를 가슴 깊이 인식하고
주님이 그처럼 주시고자 원하는 '복'을 유지하기는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내가 어찌면 이를 알까 생각한 즉 내게 심히 곤란하더니'라 나오지 않는가?
심히 곤란 한 것이 맞다.
' 이제 그만...'
' 이제 그만..'
' 이제 그만...'
얼마 전 아들의 입에서 나왔다는 소리.
한편으로 그 아이의 고난이 불쌍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갈바없이 방황하는 지금의 신세대 중에서도
'하나님'안에서 고민하고 있다는 사실이 감사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그 안에 들어 있는 영혼의 '몸부림'이 안타깝다.
어려서 부터 '聖化'와 '연단'의 원리에 대하여 잘 알고 있는 아이이지만
세상 속에서 살면서 어찌할 수 없는 '비교'와 '현재'의 자신의 상태 속에서
갈등을 하며 이해하려고 몸부림 하는 그 영혼의 몸짓이 가련하기만 하다.
바라기는 속히 '자유로와 지기를 원한다.'
지금은 억울하고 속상한 것같지만
그 억울함의 가장 깊숙한 곳에는 '주님의 뜻'이 숨어 있음을 깨닫기 바란다.
그리고 그 억울함의 가장 기저에는
깨져야할 '자아'의 어두운 부분이 있다는 사실 도 말이다.
주님이 원하시는 '선'하신 '질서'를 거부하고 싶은 '원죄적 '욕구가
사람에 따라서 강하고 약한 차이나마 남아 있기에
환경의 변화를 통하여 정결하게 깨뜨릴 기회를 허락하시기 위하여
고난이 오는 것이다.
사랑하는 자식은 '매'하나 더 댄다.
문제는 그 사실을 인식하지 않고 몸부림 만 치는 것은
끝없이 되풀이 되는 다람쥐 바퀴 같은 인생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
입이 하늘에 다 있고 뜻대로 다 가진 것 같은 그들.
하나님을 모르면서 세상의 '복'은 다 가진 것 같은 그들이
진실로 행복할까?
늘 행복하기만 할까?
그들이 정말 세상에서 으뜸으로 잘 사는 것일까?
아니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어려움과 힘듦이 있다.
아니다.
가진 것이 크면 잃는 것은 더 커진다.
대통령도 자살한다.
대기업 자손들도 뛰어 내린다.
.........
비단 몇명이지만 이것은 그들에게는 더 큰 아픔이 있을 수 있다는 방증일 뿐이다.
우리.. 하나님으로 인하여 고민하고 갈등하는 '연단'중의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원리를 이해하고 주님의 뜻 안에 머물 선택을 하는 순간
고통은 더 이상 고통이 아니고 오히려 주님의 위안과 은혜로 변하는
유한한 것이며 영생을 살 자로서의 체력이 튼튼해지는 것이지만
그들... 잘나가는 것 같은 불신자 들이나 주님을 염두에 두지 않는 믿는 자들은
고난이 끝이 없어질 것이다.
고난은 고난으로 끝날 뿐이다.
그게 다르다.
눈을 들어 나를 본다.
얼마나 감사한 게 많은가?
재산은 내 나이 또래의 의사들 중 거의 바닥권이다.
그래도 이 정도니 감사하다.
건강.
고혈압... 허리가 많이 아픔....
그래도 아직은 움직일 수 있는 건강이 감사하다.
기타를 들을 수 있고 음악으로 연주해 낼수 있는 힘을 주셔서 감사하다.
인간관계.
참 좁다.
그러나 반대로 훨씬 주님과의 관계의 시간을 허락받음이 감사하다.
앞으로는 그 분으로 인하여 괜찮아질 것이라는 자연스러운 확신이 생겨져 또 감사하다.
자식들.
좋은 대학 못들어 갔다.
하지만 선하다.
주님을 두려워 할 줄 아는 아이들이다.
아빠와 성경을 통독하는 아이들이다.
감사하다..
........................
그외에도 감사할 것 만 같은 - 솔직히 아직은 온전히 감사하지 못하고 있다. 그냥 감사해지는 단계다 - 환경이 참으로 많아 지고 있다.
이것이 어떤 분들에게는 너무도 쉬운 일일 수 있지만
바로 얼마 전까지는 나에게 불가능한 감정들이다.
늘 불만에 차있고 억울해 하고 속상해 하고 비교와 질시와 답답함................................
그래서 위의 묵상구절들이 쉽게 이해만 간다.
그래서 깊은 말씀으로 다가오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16절의 이해하기 심히 곤란하다는 표현을 보고
이해하는 경험을 주신 주님이 감사하다.
억울함도 이유가 있다.
그것을 통하여 깨달음이다.
억울함을 붙들고 무엇을 선택하는가가 다르다.
억울함을 억울하게 받으면 억울함은 '원망'으로 바뀌어 간다.
원망은 '사단'의 작업이다.
아니다.
사단 그 자체라고 누군가 말했다.
원망은 사회에 대하여 큰 해악을 끼친다.
자신을 파멸시킨다.
하지만 억울한 감정을 잠시 하나님 앞에 내려 놓으면 달라진다.
물론 그러기는 너무 어렵긴하다.
그 억울함을 붙들고 있는 사단이 그냥 있을 것인가?
약간의 용기가 필요하다.
그 용기로 주님의 뜻을 돌아보자.
주님은 '질서'시다.
이 땅은 그냥 연단의 장소일 뿐이다.
연단을 거쳐 정결한 자격으로 '상급'을 결정하신 후 천국의 자리를 매김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억울함은 그 만큼 연단 받아 정결할 기회가 많다는 이야기다.
좋은 것이다.
고난이 넘치는 곳에 예수님의 위안도 넘친다.
분명하다.
난 증거다.
위의 감사의 조건은 이전엔 늘 '억울함'의 도구일 뿐이다.
단지 주님의 말씀을 고착하려는 선택으로
그분은 내 영혼에 이해와 깨달음을 넘치게 주시고
그것은 '감사'로 변하게 하고
'평강'을 허락하시고 계시다.
주님은 그 질서의 윗 부분에 서게 하실 목적으로
의인들에게 더 한 고통을 주시는 것이다.
세상의 넘치는 '거짓 복'들은 그들이 비록 구원을 받았어도
질서의 가장 아래에 위치할 자격이 있는 자들이다.
웃어야 할일이 아니다.
부러워야 할 일이 아니다.
그들은 울어야 하고 우리는 웃어야 한다.
그들은 슬퍼해야 하고 우리는 기뻐하여야 하고 감사해야 한다.
그게 우리의 '억울할 이유'다
그게 주님의 질서다.
적용
1. 부러워 하지 말자.
나에겐 나에 맞는 연단과 상급이 주어졌을 뿐이다.
2. 아들 들을 위해 기도하겠다.
주어진 연단을 기뻐 받을 수 있는 지혜와 은혜를 주시라고..
3. 성경 일곱장 읽겠다.
4. 나의 억울한 흔적들...주님 십자가 앞에 내려 놓겠다.
아침에 찬양 하고 속상하려 한다.
이 나이에..한다.
주님 만 보실 것을 믿자.
5. 주님의 평강을 사모한다.
기도
주님
아직도 걸리는 부분이 없지 않습니다.
아니.. 저들은.. 하는 생각들이 스치고 지납니다.
그러면 여지없이 속이 부글 거리려 합니다.
그렇지만 다행인 것은 짧습니다.
짧아져 갑니다.
약해져 갑니다.
오히려 깨닫고 주님 앞에 내려놓고 주님이 평안한 마음을 주심을 느낄 때는
감사해 집니다.
귀하신 하나님
이해하지 못할 일들이 많습니다.
세상이 복잡해져 갈수록 그 부분을 내려놓고 해결 받기도 전에
또다른 생각들이 몰아칩니다.
주여 그럴 때마다 깨닫게 해주소서.
말씀으로 그리하게 하시고
성령으로 영혼에 새기게 하소서.
어서 빨리 흔들리지 않는 평강으로 절 무장할 수 있길 원합니다.
주여.
간절히 비올 것은 내 자식들 그리하게 하소서.
그들의 젊음의 어려움
그들의 믿는 자로서의 당혹감
그들의 제 자식으로서의 힘듦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이 주님의 뜻 안에서 모두 받아들이고 연단으로 승화 시키게 하소서.
주님의 자녀들로서 확신을 가지고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게 하소서.
영육간에 강한 복을 받길 원합니다.
간절히 소원하오며 예수 그리스도의 귀한 이름 받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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