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진노의 음행의 포도주(계18:1-8) 본문
(요한계시록18:1-18:8)
2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 포도주는 아름다와 보이고...)
나름대로는 예수님 믿고 마음의 정리가 많이 되었다.
............................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침에 블로그에 큐티 글을 올리려 접속하는 순간 비키니 입은 여자 하반신 사진이 맞이한다.
순간 스치고 지나가는 이상한 욕정의 기미... .
이런....
'누구도 세상의 더러운 영의 방해를 이겨낼 재간이 없구나'하고 느껴진다.
가랑비에 맞다보면 어느새 온몸이 젖듯이..
비단 이 뿐인가?
온갖 더러운 영들의 발호가 미친 듯이 불어 닥친다.
귀신들이 사람들을 마귀 휘저어 온갖 우울증, 정신 문제 들이 들 끓는 세상이다.
더러운 것을 '엽기'라는 문화 코드로 아주 익숙하고 유행적인 것으로 바뀌었다.
'커밍아웃'이라는 이름으로 온갖 어두운 일들이 검증을 거칠 필요없이 세상에 용인되며 편하게 들어나오고 있다.
가증한 것들이 '문화'라는 이름으로 포장 되고 있다.
바로 여기가 '바벨론'이 아닌가?
조금만 더 숙성하면 '큰 ' 바벨론 '성'이 될 것이다.
시간 문제다.
3 그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를 인하여 만국이 무너졌으며
( 아무 것 아닌 것 처럼보여도 ,..)
현란한 이러한 문화는 '포도주' 빛깔 처럼 보인다.
아름답고 어딘지 모르게 격조가 있어 보인다.
나도 한잔 걸치고 싶다.
그걸 마시면 품격이 높아질 듯 싶다.
다리를 꼬고
깊은 안락의자에 앉아
약간의 콧소리와 더불어
손가락으로 멋진 와인잔을 튕겨가며
아는 지식 몇마디를 건네며
눈을 지그시 뜨고 입꼬리를 올리고 있다가
체머리를 살살 떨며
때맞추어 소파 뒤로 깊숙이 몸을 묻으면서
'으~~음~' 하고 감탄을 발하면 멋진 듯 싶다.
귀족이 된 듯할 것이다.
그러다가
생각은 저 멀리하고
오직 감정
오직 분위기에 집중하다가
그 맛에 취해
한잔 한잔이 더 들어가면
취한다.
취하면 속에 들어있는 억압되어 있던 '짐승' 들이 튀어 나온다.
이게 '음행'의 포도주다.
시간이 지나서
짐승이 인격을 갉아먹으며
서서히 악한 영들에게 영혼이 잠식되며
악한 영이 그 사람의 특질로 인식이 되어가기 시작하면
바로 그게
진노를 불러오는 지름길이 된다.
세상에 깊게 빠지게 되는 것.
바로 이것이 '진노의 음행의 포도주'이다.
이 진노의 음행의 포도주를 용인케 하는 기본 사상이 '음녀'이다.
그 음녀의 결과로 나오는 게 '뿔'들이고
그 뿔이 이 땅에 현상으로 나오기 시작하면 '짐승'이 되는 것이다.
그 짐승의 결과물이 '진노의 음행의 포도주'이다.
7 나는 여황으로 앉은 자요 과부가 아니라 결단코 애통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 취하면 이 착한 성룡도 실수하지요.. )
이들에게는
아..
주님을 늘 묵상하고 회개하고 기도하고 행하지 않는 모든 자들은 위와 같은 기회가 언제나 있다.
"나'가 강해진다.
우리는 성전이다.
성전은 뜰인 육신이 있다.
육신 안에는 마음인 '성소'가 있다.
마음의 중심에는 영혼인 '지 성소'가 있다.
우리의 영혼은 지성소인 보좌에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 삼위일체 그 분께서 자리 잡아야 하신다.
그리고 거기에서 늘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생명수의 에너지로
우리의 마음이 적셔져야 한다.
그래서 우리의 육신이 그 흘러나오는 주님의 에너지로 표시되어야 한다.
온유하여야 하고
겸손하여야 하고
이웃에 사랑을 베풀어야 하고
참아야 하고
....
그럼에도 지성소에 하나님이 전혀 계시지 않은 폐허의 영혼은 공허할 수 밖에 없다.
이런 자들은 그 자리에 자신의 육신을 통해 들어오는 감각을 이용하여 무엇이든 꾸겨 넣으려 한다.
그게 '자아'다.
아니...
자아를 빙자한 귀신과 악령의 세력들이다.
끊임없이 사람들을 만나고 술을 마시고 떠들면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려 한다.
그래야 허전한 공간이 채워지는 것 같을 테니까..
그러나
완전한 인간이 어디있는가?
모두 원죄로 상처 입은 자들 뿐인것을...
그 불완전한 인간들이 서로서로에게 불확실한 정보와 느낌으로 피드백한다.
백지는 언제나 쓸수 있는 것을 물감 잔뜩칠한 더러운 용지는 용도가 쓸모가 없다.
결국 이런 혼란을 견디지 못한 인간의 공허감은 스스로를 단정지어 문을 콱하고 닫아 버린다.
그리고 소리질러 고백한다.
"나는 여황이다. "
공허감이 커질 수록 더 아집적으로 소리질러 스스로를 확인하려한다.
'나는 과부가 아니다.'
그래도 커지는 두려움은 스스로를 자꾸만 부정하려 한다.
'나는 안 두렵다.'
정말 그럴까?
이제 거기에는 주님이 들어가실 장소가 없다.
그들에게는 심판 만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기독교인은 십자가 보혈로 씻음 받았다고 항상 완전할까?
회개가 필요없이?
진노의 포도주로 오염시키고
지성소를 그냥 방치해도 괜찮을까?
청소하지 않은 집에 들어가서 살아도 좋을까?
주님은 바벨론 성을 사모하려는 시점에 있는 기독교인들에게 고하신다.
계시록을 통하여 ...
두려움과 희망이 계시록에 흐르는 정서이다.
그를 통하여 반성을 하고 다시금 연약한 무릎에 힘을 세워서 일어날 것은 우리들 기독교인들의 몫이다.
힘들고 어려운 세상이다.
눈을 뜨고 잠자리에서 일어나면 어제보다 훨씬 더 냉랭해져 있는 주위를 볼 수 있다.
직장에서도
예기치 않은 영적 전투가 커지고 있다.
선교의 기치를 걸고 열정적으로 나가던 자들이 하루 아침에 주저 앉아서 스스로 냉소를 하고 있다.
기도의 모임에는 거의 사람이 모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소수들이 힘을 들여 분투하고 있음이 보인다.
이 절묘한 기회에 '어린양' 이 반드시 '이길 터'라고 너무도 당연한 위로를 다시금 주신다.
힘을 내야 한다.
우리의 영혼에 주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포도주와 바벨론이 우리를 엄습하고 흔들지 못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적용
그냥 가만히 내 할일 하겠다.
기도하겠다
성경읽겠다.
전도하겠다.
누가 시키면 가능하면 '예' 하겠다.
기도
세상이 마구 변하고 있습니다.
기도하는 게 바보처럼 보이려고 하고 있습니다.
정신을 못차리게 하는 이 준 바벨론 현상에서
주님 눈들어 그래도 어린양 우리 예수님 보게 하소서.
너무 현란한 일은 원치 않습니다.
큰 비젼도 싫습니다.
그냥
주님이 저에게 원하시면
제 있는 자리에서 조금씩 성화되어
천국의 삶에 합당한 인격으로 바뀌길 원합니다.
남들은 썩어져 갈 세상에 정신없이 돌아가고
같이 돌아가야 하지 않을 까 잡아도 다니지만
그냥 주님께 물어서 움직이길 원합니다.
지혜를 주시고
용기를 주시고
담대함을 주시고
은혜를 주시오서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정의는 진리의 실행이다.
- 존 주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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