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주여 제게 긍휼의 마음을 주소서[계3:14-22] 본문

신약 QT

주여 제게 긍휼의 마음을 주소서[계3:14-22]

주하인 2019. 11. 27. 10:07

세상에

아버지 사랑 안에서

안전한 행복을 느끼는

아이의 그것보다

황홀한 행복이 있을까


주는 아버지의 그 긍휼함과

받는 자녀의 그 충만함이

우리 믿는 자들에게

확실한 목표가 되어


  뜨겁고 괴롭지만

반드시 가야할

이 남아 있는 인생광야의 연단을

기쁘게


풍성한 열매를 맺도록 



15.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차지도 뜨겁지도 않다.. 는 말씀.

내게 적용해보았다 .

안그런데... 좀 뜨거웠던 편인데... 싶으면서도

깨달아 지는 바가 있다.

지금은  이전 보다 그렇긴 하지만

아직도 아내도, 내 스스로 도 인정할 만큼

순수한, 그래서 느낌이 오면 바로 시행할 만한

마음의 감동은 남아 있는 ..그런 것으로 보아

아직은 그 부분은 해당되지 않는 얘기같다.



17.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그런데 이 구절을 보면서 느껴지는게 있었다 .


 나.. 정말 반대 편의 생각에 계신 분들께는 거북스러울 줄 알지만

(정말.. 세상엔 사람들의 생각이 너무도 다양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낀다..)

JK씨..의 예를 들어 보면

그 분... 정말 똑똑하고 착해보이고.. 나름 순수한 면이 없지 않다.

그런데 그 방향이 '자신'을 향해만 그렇다 .

'세상'을 향해서는 전~혀 다르다 .(아베도 그렇다 .ㅠ.ㅠ;;)

온갖 , 날카로운 필력을 동원해가며

세상을 질타하고 가장 정의로운 체 하더니

자신의 모든 행동은 더 똑같더라.

문제는 그 사실을 자신은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거다.

아마도 그래도 자신은 괜찮은 자,

아마 세상에서 선택받은 소수(하나님의 선택받은 소수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안타깝다..ㅠ.ㅠ;;)로서의

당연한 권리 (금수저의 무서움)라 생각하고 있는 환경의 영향이거나

'유전자'의 결손으로 인한 ^^;; 문제가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너무 당당하고

거짓에 대하여 자유롭다.ㅠ.ㅠ;;(계속 나쁜 이모티콘이다.ㅎ)

그리고 그러한 자들은 세상에 너무도 부지기수다 .

그러기에 아마도 남들도 그런데.. 할지도 모른다.

내가 이정도면 무엇이 그래.. 할지도 모르고.. ㅠ.ㅠ;

그런데 문제는 그런 분들이 대부분 남들의 위에 서있는 자들이란게 문제다 .

그 극명한 실체가 일본이다.

일본.. 그래서 무너진다.

저들, 우익들... 개념없는 '잘난 자들 (실젠가? ㅎㅎ) 의 권리' 앞에

일본 백성들 뿐 아니라

한국이란 나라 자체도 희생하는 것을 당연히 여기다가

지금 저런 꼴로 무너져 가고 있다 .

깨닫지 못하고...


 왜 갑자기 이런 이야기 하냐고?

핵심이 이것이기에 그렇다.

' 나 자신' 과 '타인'에 대한 마음이

과연 내 안에서는

동일히도 끓고 차갑고 하던가... 하는 문제 말이다.


 내 자신에 대하여는 열심히 연단을 통해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의 허락하시는 은혜의 누림을 누림은

비교적 바른 방향으로 잘 나가고 있다고는 생각하나

타인에 대하여

어찌 생각하는 지는

내 스스로 생각해도 '글쎄요'다 .

죄송하다 .ㅜ.ㅜ;

이제... 어느 정도 연단의 시간이 지나면서

내 기도 제목 중 하나가

타인을 '긍휼'하게 보게 해달라는 게 들어가서

이제는 좀 다름을 스스로는 느끼지만

이전에는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좀 삐닥~했다  ^^;;




18.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그것..

이 블로그를 오래 찾으신 분들은

내 고백을 통해서 알고 계시겠지만

역기능 가족의 성장과정과 본성적 문제와 겹쳐져서 그리된 것이다.

그러다 보니

남들의 아픔을 머리속으로는 공감있고

이치적으로는 아나 (이것 , 다행이다.. 모르면 정신병이거나 소쇼패스 , sociopath이지만 말이다..

그 sociopath들... 너무도 주변에 많다.  실제로......)

심적으로 갈등으로 인하여

내 자신의 마음을 누르다 보니

타인에게는 손가락질.. .내 스스로는 혼돈.. 뭐 그랬다.


 그것..

주님의 말씀을 붙들고

주님의 성령으로 인도하심 받는 가운데

내 인생 광야를 통과하는 동안,

내 내면적 스스로의 문제가 회복되어가면서

이제 점차로 당연히도

외적, 타인에 대한 그러함이 옳지 않음을 알고

말씀에 맞추어

그들에 대하여도

뜨겁고 사랑하는 마음이 솟아나와야 함을 깨달아

점차로 기도 제목에 '긍휼'함을 넣게 되었고

그러함은

내 일상에서

늘 삐닥히도 쳐다보던

내 주변인들에 대하여

이해하는 마음과 , 불쌍히 여기는 마음,

나를 짖쳐드는 어리석은 중생 (^^;;, 솔직히 내 마음의 어리석음 탓으로 그리 느낄 수도 있다.ㅎ)에 대하여도

어느정도 묵인하게 되며

내 인생에 그리도 깊이 흔들고 자리잡던

원망의 대상에 대하여 조차도

이제는 '중보'의 기도를

비록 열렬히는 아니지만

자주 하게 되는 과정까지는 와 있다.

이제.. 주변에서

'인격자'라는 소리를 아주 자주는 아니지만

조금씩 듣게 되는 것..

난 그것이

내게 대하여 '하나님'이 역사하셔서

나 스스로 뿐 아니라

타인들을 긍휼하게 여기는 노력이

조금은 그들을 눈치채게 한 탓 아닌가 싶어

정말 감사한 마음 금할 길 없어지기도 한다. ^^*


 그것.

쉽게 줄~줄 써내려 오지만

내겐 엄청난 연단, 불로 지지고 성령의 약으로 발라 싸매는

수도 없이 많은 고난의 작업이 필요했다.

당연히도 그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성령께서

은혜가 더 크게 하셔서 그렇지만 말이다.

 


19.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그렇다 .

그러함은

유야 무야, 술에 물탄 듯 물에 술탄 듯,

오늘 말씀의 표현처럼 '차갑지도 뜨겁지도 ' 않음의 상태가

스스로는 열정적 사랑과 높은 경지의 신앙인인 것 같아도

외적으로 그리도 차갑고 인색한

대부분의 현대의 왜곡된 신앙인,

아.. 아직도 내 스스로도 많이 남은

타인에 대한 사랑 부분,

외적인 성숙 부분의 부족 탓이 맞는 듯하다.


그 부분..

특별히 '긍휼'에 대한 부분을

"열심을 내라"

안되면 "회개하라" 심이신 듯하고

그러함이

이렇게 말씀으로 , 깨달음으로

뚜렷이 인지됨은

그 분 하나님께서

내가 방향을 옳게 잡고

머무르지 않고

성장해 나감을

기뻐하시는 듯하시며

아직도

부족한 '긍휼'의 부분에 대하여

'회개하라'심이심으로

오늘 느껴진다.


 

21.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이기는' 그.. 라 신다 .

매일 , 매사에

말씀을 인하여

성령으로 도움받아

이기는 자 되길 기대한다.


그래서 결국, '이긴 자' 되어

온전한 성화의 영혼으로

주님 부르실 때,

아니 부르시기 전이라도 벌써

주님 원하시는 바,

온전히 내적 외적으로 '뜨거운' 자로 되어

내 스스로

타인에 대하여도

그리 옳바른 자 의 인격이 된

성화된 영혼의 내가 되길

기대한다.

감사하다.



 주여

오늘 말씀은

내 외적인 관심과

내 내면적 관심 , 양면에서

한쪽으로 치우쳐지니

더하기 빼기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

미지근 할 수 있는 부분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것으로 들렸습니다.


주여.

스스로는 많이 돌아보아

많이 정제 된 듯하다

외부적 시선은 아직도 '긍휼'한 면에서는

너무 부족하여

자신도 모르게 어느새 '딱딱하게 ' 굳어 타인을 정죄하고

타인의 아픔엔 무감각 해지는

그런 면을 발견하게 됩니다.

주여.

이전에는 그런 내 자신을 합리화하고 타당화 시킬

여러 이유가 충분했다고 생각되어

그대로 살아도 되었으나

주님의 사랑을 풍성히 경험한

사랑의 은혜를 깊이 체험하고 살아가는 저,

저희 믿는 자들로서

과연 그게 옳은 것인가는

늘 마음에 한 구석, 부담이 없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내 주여.


옳으신 주님.

근자에 들어서

자꾸만 '긍휼함'을 기도하게 하셨고

그러하신 결과로

내 삶을 바라보는 스스로의 시선이

주변을 더 따뜻하게 바라봄을

스스로 느낍니다.

그들에게도 부드러움이지만

제게도 그러함은 행복임니다.

주여.

믿고 올바로 나가는 자로서의

당연한 하나님을 위한 영광드리는 행위.

그렇게 이해되기에 말입니다.


주여.

부족한 것은

아직은 이전의 습관이 많이 남아

어느새 나도 모르게 유지하고 있는

차갑고 냉랭한 모습을 발견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주여.

그런 부분.

회개하고 회개하여

주님의 사랑 안에 더 머무를 수 있도록 하소서.

제가 옳은 모습의 성장을 통하여

주님 부르실 그날..

마침내 온전히 이긴 자의 그런 모습으로

주님 나라 들어갈 수 있도록 하소서.

내 주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 거룩하신 이름들어 감사하며 기도하나이다.

아멘




 
 

'신약 QT' 카테고리의 다른 글

크게 울 수 있기를[계5:1-14]  (0) 2019.11.29
마땅히 당연한 일들[계4:1-11]  (0) 2019.11.28
이기는 몇 명[계3:1-13]  (0) 2019.11.26
지금까진[계2:18-29]  (0) 2019.11.25
매일 감동으로 사는 삶[계1:9-20]  (0) 2019.11.22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