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좁은 길 가는 자들 (출 24:1-18 ) 본문
제 24 장 ( Chapter 24, Exodus )
지난 겨울
나목 뒤에 걸린 구름이 묘하다.
마치 불이 타오르는 듯하다.
주님의 맹렬한 불로 보든지
주님의 보여주신 예술적 작품으로 보든지
모두가 내 마음 탓인 듯하다.
1.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 장로 칠십인과 함께 여호와에게로 올라와 멀리서 경배하고
2.
너 모세만 여호와에게 가까이 나아오고 그들은 가까이 나아오지 말며 백성은 너와 함께 올라오지 말지니라
아론과 장로로 대표되는
이스라엘의 중진들이 모세와 더불어 산에 올랐다.
그들은 산에 올랐지만 멀리서 경배할 정도다.
나답과 아비후는 나중에 죽을 사람들이다.
장로는 지금의 교회 장로와 반드시 일치하는가?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하는가?
영적 성장 상태에 의하여 주님의 대우가 달라지실 것이고
그 영적 성장은 '현재'에 의거하지
절대로 미래에 나타날 결과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주님과 나와는 따라서 늘 현재일 뿐이고
주님이 아시는 나의 미래는 나의 현재의 결심에 따라 따라 다를 수 있다는 것이며
장로라는 직분은 영적 성장과는 그리 일치 하지 않을 수 있다는 의미로 들린다.
교회를 옮겼다.
늘 개척교회에서 복작 거리다가 1만명이 넘는 큰 교회에 등록하니
정말 다른 세상에 온 듯 어리둥절하다.
그러면서 늘 나에게 부담이 되는 것이 있다.
열심과 '자아'
성장과 외부적 인정문제.
집사와 장로.
장로님들의 영적 상태와 들려오는 타락상.
나를 거기에 대입하여 보아서 다가오는 묘한 거부감............
생각이 많다.
오늘 묵상은 '장로'님을 필두로
영적인 성장에 대한 주님의 대우에 대한 말씀이시다.
나답과 아비후를 등장시키시면서
주님은 눈에 보이는 것이 반드시 모두는 아님을 넌지시 말씀하시고 계시는 듯하다.
늘 깨어 있으라.
진실을 보라.
주님 만을 보라.
7.
언약서를 가져 백성에게 낭독하여 들리매 그들이 가로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산 밑에 있는 평범한 성도들.
솔직히 지금 내 스스로 나의 위치는 여기에 있다.
산밑에서 산 위를 올려다 보면서
걸어 올라가는 그들 장로님 일행과 목회자로 대변되는 모세의 뒷모습을 보며
두 가지 마음이 요동치는 듯한..
부러움과 체념.
하지만
어쩌면 저것이 외적인 모습이 아닐 수 있다는
오늘 초두 묵상의 진행 상
그러한 갈등을 내려 놓기로 했다.
어차피 선하지 않은 갈등은 '성령의 열매'랑 상관이 없음을 안다.
그래서 더욱 현재의 영적 장로의 입장에 - 모세까지는 ..^^;;- 날 대입시켜 볼 가능성을 점쳐두고는 있다.
어쨋든 밑에 있어도 주님의 믿음에 대한 결심을 굳게 해야 할 것이다.
9.
모세와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 장로 칠십인이 올라가서
10.
이스라엘 하나님을 보니 그 발 아래에는 청옥을 편듯하고 하늘 같이 청명하더라
11.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존귀한 자들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셨고 그들은 하나님을 보고 먹고 마셨더라
어쨋든 성장한 영적 성도들은
이러한 대접을 받는다.
하나님을 뵙는다.
성경을 통틀어 하나님을 뵙고도 죽지 않은 자 얼마나 되는가?
엘리야 역시 하나님이 바윗 돌을 날리시면서 지나시는
그 동굴 앞에서 하나님께서 직접 손으로 막아서 보지 못하게 하시지 않았던가?
출애굽기 초기
이 강력한 주님의 역사의 시기에
주님은 '성화된 성도'들에게 놀라운 대접을 허락하신다.
산의 중턱에 까지 올라
하늘을 발 아래 밟고 계신 - 이것도 기적이다. 산에서 하늘을 밟으신 하나님을 뵙다니.. - 하나님을 뵙고
먹고
마셨다.
주님은 고난 만을 허락하지 않으신다.
그 분은 성장에 따른 대접을 하신다.
성화 , 즉 영적 성장은 연단을 대표한다.
17.
산 위의 여호와의 영광이 이스라엘 자손의 눈에 맹렬한 불 같이 보였고
산 아래서 보는 성장이 덜 된 성도들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대표되는 구름 속에 있는 장로 일행과는 달리
그 구름을 보고 주님의 영광으로 기뻐하지 못하고
맹렬한 불로 보게 된다.
그렇다 .
성장에 따라 똑같은 하나님의 역사도 달리 보인다.
사도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과 대화하는 것을
어떤 자들은 천둥소리의 '우르릉'대는 소리로 밖에 못듣지 않았던가?
어차피 그렇다.
신앙은 모두 똑같을 수 없다.
주님을 믿는 길은 '좁은 길'이 될 수 밖에 없다.
60만의 인구 속에서
산위에 올라간 사람들은 장로와 아론 , 모세일생을 포함하여
극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어차피 그들은 그들의 이야기를 아무리 해도
하나님을 뵙고 먹고 마셨다는 사실을
아래의 평성도들이 이해할 일이 없다.
하나님이 산에 계셔서 하늘을 밟고 계시었다는 이야기를 아무리 해도
그들의 귀에는 옛날 이야기 수준을 지나지 않을 수 없다.
모세가 구름 속으로 들어가서 하나님과 독대한 이야기는
장로 일행에게 아무리 이야기 해도
그들의 귀에는 두려운 이야기 이상의 것이 아닐 수 있다.
하나님의 영광이 놀랍고 격렬한 감동이지만
아래에서 보고 있는 '넓은 평지'의 사람들에게는
그저 '맹렬히 타오르는 무서운 불'일 뿐이다.
누구에게나 설명하고 해명하고 이해 받으려는 노력을 피하자.
입을 굳게 닫자.
하루 하루 열심이 살자.
주님의 말씀이면 순종하자.
어려운 것은 주님이 아실 것이다.
남들이 이해하지 못할 어려움을 극복하는 것은 상급일 것이다.
영적인 장로가 되자.
오늘의 영광이 꼭 내일을 보장하는 것은 아님을 알자.
나답과 아비후를 기억하자.
기도
주님
여러가지 생각할 점이 오늘 묵상을 보면서 떠오릅니다.
장로.
영.. 저하고는 어울리지 않을 직분인듯
한편으로 마음 한구석에 부담이 생기는 단어이긴 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주님의 역사하심에서
영적으로 장로의 역할을 하는 그들의 열심에
적절한 대우를 하심을 보고 있습니다.
주여.
그 길이 꼭 쉽지 만은 않은 좁은 길임도 보이십니다.
하지만, 그 길을 걷는
당신의 귀한 자녀에게
놀라운 축복도 허락하심을 보고 있습니다.
주여.
주님의 뜻 가운데서 좁은 길을 달게 걸을 수 있도록 하소서.
그길을 알아보는 지혜를 주시고
그길을 걸어갈 의지와 담대함을 주시고
주님의 뜻이면 순종해갈 순종의 마음을 주소서.
가다가다 힘들지 않게 위로의 시간도 허락하소서.
주님 아시지요?
제가 어려워 하는 문제도 잘 아시지요?
그 제한점이 주님의 배제의 의도가 아니신지도 알지만
한번씩 가슴을 조아리는 그 어려움이 한탄스럽기도 합니다.
주여.
가끔씩은 위로하소서.
하나님을 뵈올 성장은 없고
지력 부족하지만
그래도 맹렬한 불을
두려움 보다는 의지의 원천으로 느끼는
영적 순수함과 깨우침을 허락하소서.
주여.
성령으로 인도하소서.
말씀 중에 성령의 검으로 절 찌르소서.
깨어 있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기적의 하나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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