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놋갈고리 금갈고리(출 26:1-14 ) 본문
제 26 장 ( Chapter 26, Exodus )
나로 인하여
모두가
한방향으로
하늘을 쳐다볼 수 있는
그러한 도구가 되었으면 합니다.
1. 너는 성막을 만들되 앙장 열 폭을 가늘게 꼰 베실과 청색 자색 홍색실로 그룹을 공교히 수 놓아 만들지니
성막
교회의 모형.
나.
성전인 나의 모형.
그 성막을 만들 때
나의 가진 베실과 청색, 자색 , 홍색실로
'천사'로 대변되는 '성령'을 받아 들여 내면을 '공교히' 수놓으라 하신다.
내면은 '영혼'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교회로 따지면 교회의 영적 상태.
6. 금 갈고리 오십을 만들고 그 갈고리로 앙장을 연합하여 한 성막을 이룰지며
묵상이 참 어렵다.
여러번 되풀이 했지만
'금 갈고리' 에 눈이 간다.
내부를 덮는 커튼은 동일한 크기로 만들어 연결하는 데
그 연결 부위를 금갈고리로 하란다.
교회에서 연합을 위한 나의 역할에 대하여
내 영혼을 integration 즉, 통합하기 위한 어떤 연결고리를
금빛나는 오십개의 갈고리로 하시라 하신다.
7. 그 성막을 덮는 막 곧 앙장을 염소털로 만들되 열 한폭을 만들지며
11. 놋 갈고리 오십을 만들고 그 갈고리로 그 고를 꿰어 연합하여 한막이 되게 하고
14. 붉은 물 들인 수양의 가죽으로 막의 덮개를 만들고 해달의 가죽으로 그 웃덮개를 만들지니라
교회는 내부적으로는 최선을 다하되
외부적으로는 좀더 겸허하게 보여야 한다.
나 개인적으로도
성령의 은사를 포함한 신령한 은혜를 사모하고 열심을 보여야지만
그것이 외부적으로 들어나 외식적으로 보이기 보다는
염소털로 쌓인 듯 소탈하게 보여야 함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그것이 영적인 나를 든든히 하는 것이되
남에게도 은혜가 되는 것일 수도 있겠다.
벼도 익으면 고개를 숙인다.
교회를 옮긴 지 삼주 째.
안양 일번가에 있는 79년된 제일교회는
병원과도 가까워 금요 성령 찬양 예배 때도 자주 들렀었던 곳이다.
목사님께서 뜨거우시다.
설교의 말씀이 단순하면서도 깊으시다.
전 연령층과 지적수준을 불문하고 누구도 공감할 수 있는 균형잡힌 설교로
유머도 적절히 쓰신다.
당신께서 은혜가 떨어지신다 생각하면 과감히 교회를 떠나
몇일 몇주간 금식 기도하신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아직 새신자 교육을 받는 중이다.
오래된 새신자라서 머쓱하고 졸리기도 하지만
교회의 프로그램을 설명하는 데 참 놀랍다.
소그룹으로 각종의 모임이 활성화 되어 있다.
외부적으로도 불신자들을 접점으로 하는 봉사활동도 활발하다.
'선교적 목회'가 목사님의 비전이시란다.
매사가 선교라신다.
어쩌면 QT를 진행하여 오면서 나에게 주어진 개인적 비전이랑 합치한다.
'수도적 영성의 삶'
수도는 지향하되 일상을 산다.
일상을 수도적 관점으로 산다.
참 어렵고 어쩌면 과도한 생각일 수 있지만
성화를 궁극의 목적으로 사는 삶이다.
목사님께서는 '사회'를 이끌어 가는 '교회'가 되기 위하여
이번 주 부터 '차'를 두고 오라셔서 거의 대부분이 그러신다.
그 이유는 대중 교통을 이용하여 사회에 도움이 되는 목적도 있지만
매주 마다 수십명씩 늘어가는 새신자들을 배려하는 이유도 있다.
동참했다.
어쨌든 걸어가는 것 좋아하니.
아침은 늦어서 택시를 타고 왔고 돌아갈 때는 걸어가려 하였다.
끝나고 집으로 걸어가는데 날씨가 너무 덥다.
그래서 그늘 그늘 피해가다가 안양역전 앞 지하도를 통해
롯데 백화점에서 잠시 더위를 피하고 나오니
광장에서 '청년부'가 멋진 공연을 한다.
보니 아는 목사님들도 여럿 나와 계시다.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공연에 합류한다.
교회는 그리 거부스럽지 않게 사회에 스며 들어 오고 있다.
교회의 본 목적을 잃지 않고
영적 현상 - 방언 , 성령 임재..-과 양육 -소그룹 .. -을 추구하며
교인들 하나하나 큰 부담없이 영적 성장을 추구하되
외부적으로 세상 불신 자들에게 익숙한 '염소, 양, 해달'가죽으로 거부감 없이 보여
전도 -선교-의 폭을 넓혀가는 교회다.
일단, 3주간 지켜본 교회의 모습은
오늘 지어가는 '성막'의 모습과 비교적 일치하는 모습이다.
돌아오는 길이 흐뭇했다.
영적 지도자의 모습이 이렇게 중심을 잡아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며칠 전 ' 용돈 십일조'를 묵상하던 그날...
아내가 교회를 선택 못하여 달달히 기도하며
개척교회에 보내던 것을 지난달은 특별한 응답이 없어
보내지 않고 두었던 것을
내 용돈 십일 조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마침 수술이 hold되어 일찍 퇴근한 금요일이라서
천안에 계신 O목사님 교회에 드리자 하여
나도 얼른 맞장구 치고 내려 갔다 왔다.
10여년 다니던 교회의 교단에 소속되었다가
수도로 치우치는 교단의 풍토에 당황하고 타교단으로 가신 분이시다.
예전 부터 영적으로, 그 분의 삶에 은혜를 받아 왔던 차
금요 예배를 드리고 올 목적도 채우려 내려 갔다.
아직도 성도는 얼마 안되신다.
그런데 얼굴이 아주 밝으시다.
세상의 가치와 기준을 많이 놓으시고
자유를 깨달으신 분이시다.
그런 어려운 교회에 '거지'들이 많이 찾아 드신단다.
그럴 때 밥도 차려 놓기도 하고
지갑을 있는 채로 보여 주며 가져가라 하면
오천원 밖에 없는 궁한 지갑을 보고
2천원은 남겨 놓고 3천원을 가져 가기도- 웃어야 하나 울어야 하나.ㅎ.ㅎ - 하는
사람도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많이 웃었다.
말씀하시던 중 얼굴이 환해지시면서
그 중 한분이 그 생활 청산하고 폐휴지 줏어 독립하셨다는 말씀을 하시며
아주 기뻐하신다.
목사님께서는 오시는 분들에게
가르치려 하시지 않으셨다 하신다.
그냥 몇 마디 하시고 있는 그대로 대하여 주셨다 하신다.
그외에도 많은 감동적인 말씀을 하셨다.
두 교회를 보면서
오늘 성막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교회의 부분과
나 개인의 성막 부분에 대하여 생각할 바가 있지 않은가
적용하려 노력 해 본다.
나는 어떻게 서 야 하는가?
교회에서 보여야할 내 위치는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나 개인 성막과 교회 안에서의 성막은 따로 이어야 하는가?
금 갈고리와 놋갈고리가
교회에서의 유지해야하면서
내적인 내 충만함에 대하여 말씀해주시는 것이 아닌가 싶다.
묵상 속 갈고리의 역할은 무엇인가?
정밀하게 제조되어 가고 있는 curtain (양장)의 연합을 이루어가는 역할 아닌가?
갈고리가 있어야 양장들이 서로 연결되어 성막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금갈고리.
금 갈고리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들여
나의 행동거지 하나하나의 '실'로 짜여진
내적 성화를 이어가는 것이다.
그것은 교회 안에서 , 일상의 삶 속에서
주님의 말씀의 틀에 의거하여
성령이 인도하시는 대로 '순종'해서 이루어가는 성화의 과정이다.
O목사님이 그러셨듯
나의 심령에 맞지 않는 자들까지
가르치려 하지 않고 받아 들이는 과정.
그것은 자아의 거부 반응을 내려 놓아야 하는
꿰는 아픔을 동반해야 한다는 것이다.
누구도 이해하고 박수 쳐주지 않는
주님과 나 만이 알수 있는 '금빛'번쩍이는 갈고리이다.
놋 갈고리.
놋 갈고리는 외부적으로 나타나는 내 결심의 선택이다.
봉사하라면 봉사하는 것이다.
누구나 다 교회를 위하여 하기에 나도 한다..라는 마음으로
그들과 함께 열심히 교회를 위하여 하는 것이다.
들어나지 않아도 이웃을 위하여
그들의 거부감이 드러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다소곳하고 드러나지 않는 갈고리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오늘 말씀은 정말 어렵다.
여러번 묵상을 하고 되 읽어 보았지만 특별한 주시는 말씀이 없다.
그래서 그냥 말씀을 쓰기를 진행하다 보면
무엇인가 주시겠지 하는 마음으로 묵상을 진행하지만
그럴 듯한 느낌만 있지 정리되지는 않는다.
어쨋든 '성막'은 주님의 성전을 의미하고
나 각 개인은 '주님의 성전'을 의미하며
오늘 성전의 안팎을 따로 지어가는 장면과
'금갈고리'와 '놋갈고리'에 눈이 띄는 것을 중심으로
묵상을 진행했다.
힘이 든 세대다.
교회는 사회적으로 핍박을 받아가고
교회도 타락되어가고 있는 이때에
나름대로 주님의 말씀을 집중하려는 노력을 귀히 여기시는 지
주님은 좋은 교회, 좋은 목사님,
균형잡힌 목회와 생동감 있는 교회 내부
내적인 중심 잡힌 목회에 대하여
눈을 뜨이게 해 주심이 감사하다.
이러할 때,
예전에 계속 그래왔듯,
나는 방관자의 입장은 옳지는 않을 듯 싶다.
갈고리의 역할을 하고 싶다.
주님이 보실 때 금갈고리
사람이 볼 때 '놋갈고리'의 역할을 하고 싶다.
아직도 내 속에는 부정적 판단의 욕구가 꿈틀대고 있다.
무엇이든 판단하고 정죄하길 좋아하던 옛 습관이 움직임을 느낀다.
하지만, 온전한 곳이 어디 있겠는가?
땟국물은 예수님을 삼년간 쫓아다닌 제자들의 발에서도 나왔다.
그러한 땟국물이 흘러 갈라 놓을
내 영혼의 틈을
주님의 갈고리로 다시한번 금빛나게 , 놋쇠의 푸근함으로 다지고 싶다.
교회에서 그리되고 싶다.
그러한 역할을 하고 싶다.
세상을 보는 내 눈이 그리되길 원한다.
주님께 판단 받는 내 역할이
'갈고리'의 역할이길 원한다.
적용
1. 난 갈고리다.
놋갈고리의 역할을 하되
주님은 금갈고리로 보실 것을 믿는다.
2. 성령의 은혜를 갈구한다.
성령이 오시기 위해서는
하루하루 내 삶의 흔적의 실들로 그 분 성령의 임재를 수 놓아야 한다.
최선을 다해 주님을 간구하자.
3. 성경 일곱장 읽겠다.
4 . 연합을 위해 날 낮추자.
5. 안된다는 생각은 주님께 내려 놓자.
6. 교회를 위한 봉사는 내 내적인 성화를 위한 길이다.
기도
주님 어렵습니다.
묵상의 진행도 어렵고
갈고리로서의 역할
그 안에서 부딪칠 갈등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내는 것도 어렵습니다.
그러나,
내 내면을
내 영혼을
주님이 허락하신 '실'로 아름답게 수놓아
주님 성령께서 오실 수 있는 곳으로 오늘 하루 만들어 보렵니다.
주님
간절히 소원할 것은
잊지 않게 하소서.
난 갈고리 입니다.
놋쇠로 보여도 괜찮을 금 갈고리입니다. ...
이리 명심하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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