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자유 안에서 그들을 바라보다[마12:1-13] 본문
1.그 때에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실새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먹으니
'그때에'
안식일... 율법의 제한이 너무도 뚜렷할 그때에
'밀밭사이' "예수님'과의 '동행'
창조주, 절대자..의 뒤를 따르며
'시장'함을 금식으로 누르지 않고
'이삭'을 잘라먹는다.
자유
2.바리새인들이 보고 예수께 말하되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
바리새인들이 '보고'...라 되어 있다.
그들은 그 일행.. 밀밭안을 걸어가시는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테두리' (아... 다른 표현이 생각나지 않는다. ㅜ.ㅜ;) 밖에서
그 안에 있는 예수님과 제자들을
보았다.
아.. 그들의 잘못을 감시하던 눈에
마침내 '시비 거리'가 들어왔다.
그리고는
분노하고 집적거리기 시작한다 .
죄에 묶임
묶여있는 그들
3.예수께서 이르시되 다윗이 자기와 그 함께 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예수께서는
그들을 질타하지 않으시고 가르치신다.
그들의 무례와 무지한 질문에도 불구하고... ^^*
난... 묵상의 구절을 읽어가며
참으로 '디행'이고 행복함을 느낀다. ^^*
난.. 이전에 (37살 전..) 바리새인들의 자리에 서서
많은 분노와 억울함과 질투와 경계와 두려움.........으로
세상을 바라보았었고....ㅠ.ㅠ;;
당연히도 '거룩한 양' 하며 자신들 만의 세상에 있는 듯한 기독교인들을
내 나름의 당연한 세상의 원리로 재단하고 바라보았었다
세상의 다른 사람들 뿐아니라...
그것.
순간의 통쾌함으로 그리했지만
내 안의 어지러움, 불행함... 은 자꾸만 커진 것을 들어
난.. .밖에서 바라보는 저들의 시선이
얼마나 묶여있는 자 들인지 알기에
현실의 다수 파에 속하지 않은
비록 '외로운 , 좁은 길'이긴 하지만
내 삶의 '자유'가 얼마나 감사하고 고마운지.....^^*
그를 허락하신 '예수님' 의 날 구원하심이 얼마나 놀라운지
이제는 점차로 점차로 더 자주 기뻐진다.
이곳 PT시 .
원룸 생활 오래하다가 둘째 .. 이제 드디어 서서히 독립을 준비하기 위해
얘 이름으로 작은 , 오래된 아파트 하나 빌렸다. ^^; (능력부족.ㅎ )
그리고는 아내와 아들 데리고 주일예배 드린 후 내려와
같이 거하다가 아내는 올라가고... 또.. 이렇게 해온지 몇달.
홀로 있어도 자유롭고 행복하더니
가족이 조금이라도 같이 있으니 더 행복해진다.
구정 때 당직이라서 같이 내려와 일주일을 거하다가 오늘 올라간다.
어제는 갑자기 옆에 몸을 뉘인 아내를 보는데
그렇게 사랑스럽다. ^^* ..ㅎ.
세상에 생물학적으로 오래 산.. 나이든.. 아내가 뭐 이쁘랴 만...
내 눈에 그리 보임은
하나님의 축복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그랬다.
' 당신이 있어서.. 행복이 커지네.....'
아내도 내 물기어린 음성이 진실임을 깨달았던지
목소리가 감동이 담긴듯.. '픽'하니 웃는다 .
본집에 비하면 침대도 없고 세간도 거의 없다.
오래된 적은 소형아파트라서 일주일 지내는 데
불편할 것 투성이 일것임에도
근처에 같이 걸어가 예배도 들이고
아들이랑, 아내랑 소꿉놀이 하듯 작은 소반에 밥차려 먹구........
정말 '행복'이 소유에 있지 않음은
'본집'과 이곳의 '굿홈(아내가 지었다. good home이라고..)'의
현격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 행복은 하등 차이 없음이 말이다.
참... 혼란 스러울 때
난...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주님께 외치듯 하소연하듯 기도한 바가 있다.
'주여... 제게는 평강, 샬롬 만 주시면 다 필요없사오니..
제발...........'
그 소리 들으셨나 부다.
내게는 28살과 40 살 이후의 나이가 별의미가 없였었다.
계속.........젊을 적.....
아마... 어릴 적부터의 세상과 주변에 대한 일찌감치 드는 실망 탓이었으리라.
28살은 우리 집(아버지가 장손..^^;)에 거하시던 막내 삼촌이 그 나이까지
무협지나 보고 무기력한 생활하면서 근심이 되던차
내 어린 눈에 그리 보였을게다.. 라고 짐작이 된다.
40살은 아마도 내 젊은 시절이 가고
그 무기력하고 허무한 시절을 감당할 '육체의 유혹 '이 시들어갈 나이라고
막연히 생각되던 차였으리라.ㅠ.ㅠ;;
난.. 세상을 사는 이유가 .. 이땅에 휴가 나와 즐기다 가는 것을 조물주가 허락했을 것.. 이며
그러기에 나이가 들면 그 재미가 어떤 이유로든
육신이 꼬구라 지면서 재미가 시들해질 것일 것이기에
그 이후의 나이는 '저주'라 생각되어서다. ㅠ.ㅠ;;
하옇든
하나님은 28살에 아내를 만나 결혼하게 하시어 (간증거리다. ㅎ) 그 나이를 극복하게 하시고
38살 다되어 전적으로 첫사랑의 강력한 체험을 통해 나를 구원하신 예수로 말미암아
40살 이후에 본격적으로 연단이 시작되는 바람에.ㅎ...........생각할 틈을 놓쳐
난...
자살을 감행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 어린나이에
그러한 인생의 허무를 강하게 느꼈음은
내 인생의 우울함........을 대변하는 것이다. ㅠ.ㅠ;;
그 우울함.
그 살기 싫을 만큼의 깊은 내면에는 ' 원망, 속상함, 배반함.. 질투..........' 뭐 이런게 소용돌이 치고 있음이다.
나........
괜히 이 이야기 하는 게아니다.
난.......
'바리새파'의 그 강력한 자아의 에너지, 그 사망의 에너지.. 죽음의 에너지에 의해
오래 내 시선을 사로잡혔던 자다.
세상의 것이 모두 인양.. 포기하고 살려고도
원망의 소리로 주변을 탓하면서
의미없을 듯 보이는 인생의 시간을 '소비하며' .. 그렇다... 소비하면서 살아왔다.
내 발전을 위한 어떤 것도 의미가 없을 듯했다.
그냥 어리석은 주변인들에 대하여 손가락질 하는게
내 사는 이유의 큰 부분이기도 했다.
즉물적이고 시원하고 강력한 .........에너지.
그러다 .. 예수 님 안에 들어오게 되었다.
'구원'.
그리고 그 분의 말씀 가운데 서게 되며
말석일지 몰라도 '제자'의 자세를 취하게 되어가는 내 삶은
남들이 그리 바라볼지 몰라도
난.. 참으로 옳은 길을 선택한
정말.. 좁은 길, 좁은 테두리이지만
옳은 길 안에 서 있음을 확신하게 되었고 .. 지금도 그렇다.
그러한 내 매일의 마음은
위에도 고백했지만
행복.. 이 많은 시간.. 차지한다.
그거...
오늘 묵상의 '예수님을 좇아가는 안식일 밀밭사이의 제자'들의 그 허허로운 평안.. 이 아닐런가 싶다.
감사하다.
난..
늘.. .
행운을 붙잡았다.
예수님이란 진정한 행운.
주님.
두 비교를 통해
내 과거를 회상해보았습니다 .
전적인 하나님의 구원을 통해
예수님 안으로 들어오기 전
얼마나 혼란 스러웠던지요.
즉물적이고 손아귀에 쥐려고 하기만 했던 그 시절의 그 무지함과
놓고 따르며 주시는 대로 누리는
그래서 모든게 하나님이 인도하심을 깨닫는 자의 가벼움, 자유.. 행복.. 기쁨... 말입니다.
주여.
코람데오하게 된
제가 진정 행운아입니다.
주님을 동행하는 진정.. 행운 말입니다.
내 언젠가의 기도를
그리도 깊이 들으시고 인도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그러하심에
전.. 너무도 든든하고 기쁠 따르입니다.
내주여.
세상의 어떤 것으로 이러한 감사를 누릴 수 있을 지
생각조차 나지 않습니다.
감사하신 주여.
끝까지 ..
제 후대모두...
주님.. 새로 나올 손녀 예빈까지도.........
그 아이의 자식에 자식 까지도
제게 허락하신 이 주님의 그러하심을 놓치 마소서.
감사하오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
아멘
-------------------------------- (2008년 묵상)
밀밭 사이로
슈베르트의 아베마리아 조수미
작년
강변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밀밭 사진이 없고
올린 사진이 용량이 축소되어서
안 이뻐요.
그러나,
오늘 내용과는 상관없는
아베마리아지만
조수미님의 감미로운 목소리와
아름다운 음율이
밀밭 사이로 지나시는
예수님 일행의
그 허허로운 여유를 느끼기에는
그리 부족함이 없게 만드네요.
아니시라고요?
상상력 부족 탓입니다.
아니 감성 부족요.ㅎㅎ
주님과 같이 한번 걸어가 보시지요!
아,
저들의 배고픔도 한번 느껴 보시고요
그들의 자유로운 영혼의 허허로움도
같이 한번 느껴보세요.
1.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새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비어 먹으니
왜 요 장면에 오면
사뭇
머리 속에 그림이 그려질까요?
마침
조수미님의 아베마리아가
제 블로그 '음악' 카테고리에 있네요.
그래서
오늘 묵상이랑
잘 맞는 듯 싶어서 집어 왔어요.
안식일에 거기를 걸어서
어디로 가실까요?
아..
밀밭 사이로
새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중동의 날씨가
그 당시에는 좀 선선하지 않았을까요?
그리 그려집니다.
제 피부에 부닥쳐 오는
바람의 느낌이
조금은 선선합니다.
사람들의 눈을 봅니다.
눈이 조금은 내리 뜨여져 있습니다.
그 눈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차분함이 서려 있네요.
주님은 앞서 가십니다.
무언가 형용할 수 없는
예기가 느껴집니다.
그냥 저 분을 따라가면
될 듯도 싶습니다.
사람들은 자유롭습니다.
어떤 이는 뒤를 쳐다보고 가만히 있네요.
무엇을 보고 있을까요?
밀밭 사이에서 날아오르는
새 날갯 짓에
퍼득 놀라
하늘을 날아오르는
그 새의 형적을 따라 쳐다 보는 군요.
어떤 이는
잠시 쭈구려 앉아 있군요.
풀 숲 안으로 들어가서..
무얼 하나요?
혹시...끙~~~!! ㅎㅎ
설마 그럴리가요..ㅎㅎ
아마도
숨어 있는 이쁜 꽃을 감상했겠지요.ㅎㅎ
어떤 이는
밀대를 꺽어
입에 물고 있군요.
누구는 팔짱끼고 걷네요.
콧노래 하는 이도
휘파람 부는 이도 있군요.
아..
어떤 이가
이삭을 잘라 양손에 대고 부비는 군요.
어릴 적 생각이 납니다.
노란 벌판에
밀이 고개를 잘 숙이고 있을 때
그 밀을 잘라
불에 그슬려
양 손바닥에 대고
문지르면
고소한 밀이 먹기 좋게 되었던 기억요.
많이 먹을 게 없던 시절에
더 없는 간식이기도 했지요.
하지만
이들의 이 행동은
조금은 낭만과는 다른 듯한 면이 없지 않습니다.
'안식일'
어.
안식일인데 이러다니요.
그 엄한 시대에
엄격히 자란 이들이 이럽니다.
한편으로
얼마나 배고팠을지
상상이 갑니다.
참 불쌍해요.
그 시대의 어려운 삶이 그렇고
그 어려운 예수님 제자로서의 삶도 그렇고요.
그 배고픔은
경험자로서,
특히
오늘 아침
빈속으로 나오다가 들여다 본
버스 속의 묵상에서
절실히 - ㅎㅎ - 공감이 갑니다.
아마
배고픔을 못 참고
배고프면 영혼까지 시린 듯한
증상을 가진
저와 비슷한 사도신 듯해서
그 배고픔이
참 가련히도 느껴집니다. ㅎㅎ
그러나,
이스라엘의
그 엄한 분위기에
그 안식일에
그런 율법을 어기는 일을
사사로이 하다니
그것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예수님의
조금은 반사회적 허탈 분위기 - 세상의 눈으로 볼 때 말입니다. ^^;;;-를
동일 시해서 닮았다 감안해도
그것은 조금 지나치긴 하네요.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요?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이 사제 지간에
이 방탕스러워 보이는
타락(?) 이 말입니다.
난
밀밭사이로
걸어가는 이들의 분위기를 상상할 때마다
이
아베마리아 곡의 분위기가 떠오릅니다.
아.
아베마리아를 가져다가 들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우연히
너무도 맞아서 일 뿐이지요.
이 글 쓰기 전에
아침 묵상 전에
이 행렬의 분위기가
'허허로움'이란 네 단어로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그리 글을 쓸까 했었지만
밀밭 사이로가
더욱 서정적일 듯 싶어
그냥 붙혔을 뿐입니다.
제가 그 행렬에 있다고 가정해도
앞서 나가시는
예수님의 등을 보고
그 분의
그 휘적 휘적 걸으시며
무엇인가 생각하시는 듯한
분위기를 보면서는 요.
저도 모르게
밀을 한웅큼 들어서
생각없이
손에 올려놓고
두 손바닥으로 비빈 다음요...
아마
훅~~하고 불어서
알갱이를 남긴다음
입에 넣어
우적우적 씹었을 거예요.
펄쩍 뛰면서
한 발로
길 가의 풀 포기 하나를
발끝으로 축구하듯이 차기도 했을 것 같구요.
왜 냐구요?
날아갈 것 같아서요.
그냥 그래도 될 듯하여서 말입니다.
아마도
내 뱃속의 우릉우릉 소리가
내 육신의 기아상태를 방지하기 위한
방제장치의 가동 탓 ^^;; 도 있겠지만요...
실은
그 분이 주시는
그 자유로움 탓이
날
자유롭게 해서일 겁니다.
날 묶고 있던
온갖 규제와 내적 억압이
나도 모르게 잊혀 진 상태요.
그것은
아마도
그 사도도
마찬가지였을 거예요.
주님은
자유지요.
어제 그제 수요일...
오랫만에 일찍 퇴근해서
마음 먹고 기도원에 올라갔습니다.
그냥 그러고 싶어서요.
날은 정말 추웠습니다.
마스크를 쓰고
점퍼를 입고
목도리를 둘러썼음에도
찬 바람이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그럼에도
날은 청명했습니다.
걸어서
안양역 앞에 와서
2번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하늘을 쳐다보았습니다.
어찌나 맑고 이쁜지요.
노래가 나올 듯했습니다.
실은 월요일 글에도 고백을 했지만
약간은 멍한 상태였거든요.
올라가니 세시 예배가 있네요.
예배를 들어가서 앉는 다는 생각만으로도
허리가 아파오는 듯하고
졸릴 것 같은 생각이
나에게 의지를 강요하는 듯합니다.
항상 그래요.
예배가 진행되면서
난 감동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
목사님의 설교는 너무나 훌륭했습니다.
하지만
그 감동은 인간이 줄 수있는
감동 스토리와는 좀 질이 다릅니다.
인간은
격정적이고
좀 일회적이고
코 풀고 나면 잊어버리는 감동이지만
주님이 주시는 감동은 좀 유다릅니다.
전 익히 잘 알고 있습니다.
이제 수년의 경험을 통해
이게 은혜인 줄 압니다.
우선
가슴 한 구석이 따뜻해집니다.
콧 잔등 어디에선가
촉촉한 습기가 맣겨 (smelled) 집니다.
눈 뒷쪽
안구 뒤쪽이
촉촉해집니다.
웬지 모르게
마음이 넓어집니다.
이걸 ' 마음의 지평이 넓어진다' 고
꼭
표현하고 싶어집니다.
괜히 옆의 사람이 사랑스러워집니다.
아니,
그것은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그런 감각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람의 관계에 의한 감동에 의할 때는 그렇지요.
그냥
넉넉히 사랑스럽고
모든 걸 포용할 듯 싶고
그들이 안스럽고 불쌍해집니다.
그런 사랑입니다.
미운 사람이 없어집니다.
걱정요 ?
온갖 세상의 걱정을 다 들고 가도
이상하게도
아주 작아져 보입니다.
마음이 아주 허허로와 집니다.
그래요.
오늘 묵상하며
허허롭다는 느낌이 '확~'하고 온 것은
바로 수요일인 어제 그제의
영적인 쉬임을 허락 받고 왔기에
표현이 가능한 단어들일 것입니다.
예배는 감동입니다.
특별한 감동이지요.
요새는 자주 그걸 느끼네요.
밀밭 사이로 걸어가는
제자들도 그럴 걸요?
이들
제자들의 자유로움은
영적인 허허로움의 표현인 것 만 같습니다.
그 자유는
현실을 넘어서는 안전감에서 발로된 것입니다.
방임과는
너무나도 다르지요.
같은 현상으로
건방지고 세상을 멋대로 사는 자들에게도
안식일 밀밭의 범죄를 벌일 수는 있겠지요.
하지만
그들은 그것으로 끝입니다.
믿음이 시간이 지나면서
어릴 때와
성장이 충분하게 일어나서
연단된 믿음을 가지게 될 때가
거의 비슷한 경우로 나타남을 보게 됩니다.
어릴 때는 너무 어려서
성장한 믿음은 규격이 필요가 없어서
자유가 주어지는 게 말입니다.
주님 곁에 바짝 서면
그 자유를 느끼게 됩니다.
영혼이 말이지요.
그래요.
그들 영혼은 그리 자유롭습니다.
주님 뒤를 따르는
밀밭 사이로 갈 때요.
적용
1. 주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오늘 하루 산다.
2. 주님의 그 허허로움과 여유로움을 묵상한다.
3. 한명 이상 이 기쁨을 전파한다.
주님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려 오셨다 선언했다.
4. 성경 여섯 장 읽겠다.
5. 밀밭 사이로 걸어 어디로 갔을까?
안식일을 지키려 성소로 갔을까?
어디로 갈까?
난?
늘 같이 걸으시는 주님을 묵상한다.
기도
주님
감사합니다.
우리 주님께 모든 영광올립니다.
우리 주님의 그 자유로움
우리 그 주님의 안전을 감사드립니다.
주님
그 평강의 샬롬을 감사드립니다.
주님
어디에 있어도
주님이 계시면
나 날아가는 종달새의 지저귐과
흐르는 바람의 볼스침을 느낄 수 있어 감사합니다.
어디에 있어도
주님을 만나면
세상은 멀리 물러나고
진실이신 주님을 알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밀밭 사이의 여유를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전
주님을 알게되어
너무 너무 감사합니다.
제 영혼은 자유롭습니다.
날아갈 듯 싶습니다.
밀대 하나 꺾어들고
휘파람 불다가
입에 넣어 질겅거리는
그 자유를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예수님
주님의 이 평강을 전하고 싶습니다.
환경
결단
흐르는 인생의 시간을
주여 인도하소서.
자격되지 않는 자의 강박과
지나친 태만을 허락지 마소서.
주여
당신이 원하시면
인도하소서.
듣겠나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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