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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러 빈들에 처해봄[요11:45-57]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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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러 빈들에 처해봄[요11:45-57]

주하인 2013. 3. 6. 07:57

 

나는

어둠이 두렵습니다

차가움 역시 싫습니다

홀로 있음도 어렵습니다

 

빈들

가슴을 후비는 듯하고

영혼을 뒤흔드는 듯하며

마음을 불편케해 그렇습니다

 

이제

눈 크게 뜨고 직시하렵니다

그 광막함을 마주하렵니다

말씀이 있으시니 그러렵니다

 

주님

제가 깨닫게 하소서

홀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고

날 사랑하시는 내 주님께서

나와 함께 바라봐 주심을요

 

사랑합니다

내 주 예수

날 사랑하시는

내 하나님이시여

 

 

 

45. 마리아에게 와서 예수께서 하신 일을 본 많은 유대인이 그를 믿었으나

 '나사로'를 살리셨지만

'마리아에게 와서 하신 일' 이라 표현이 된다.

마리아를 얼마나 많이 사랑하셨는가 알 수 있다.

예수님도 편애 하신다.

그녀처럼 믿음이 깊은 자,

머리속의 믿음과 친분으로 인한 감정적 끌림에 인한 믿음으로 착각되는 자보다

깊이 예수님을 사랑하여 모든 것을 감동으로 받을 수 있는 믿음을 가진 자를

특별히 '편애'하신다.

 그런 믿음을 가진 자로 인하여

'죽은 자'가 살아나게 되고

그로 인하여 다른 사람이 믿는 이유가 되게 한다.

믿음은 '고난'을 전제로 빛이 발해진다.

  나사로의 죽음과

그보다 죽음이 나흘이 지남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사랑함과 그 분의 오심을 기뻐함을 놓치지 않는

마리아의 진정한 믿음이

그녀 스스로를 세상에 드러나게 하였고

나사로를 살리게 하였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나게 하였고

그로 인하여 많은 자들이 구원받는 계기가 되었으니

진정한 믿음,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믿는 믿음이 깊은 자의

정말 소중함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는 듯하다.

 

 

 

54.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유대인 가운데 드러나게 다니지 아니하시고 여기를 떠나 빈 들 가까운 곳인

     에브라임이라는 동네에 가서 제자들과 함께 거기 머무르시니라

 오늘은 '빈들'이라는 단어가 유난히 눈에 들어온다.

빈들.

사막.

사막의 주는 그 황량함은

신명기 8장15절의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건조한 땅을  .. 이라시는

표현 처럼 광막하기가 말도 못하고 위험하기가 이루말할 수 없는 곳임은

말할 것도 없는 것이다.

그 인생의 사막, 인생의 '빈들'의 불가피성,

누구나 살면서 겪을 수 밖에 없는 인생의 어려움을

광대하다고 표현하셨다.

광대함은 너무 너무 넓고 보이는 것 모래와 햇빛 뿐이라서 느껴지는 무서운 외로움이다.

위험한 광야다.

인생은 위험투성이다.

비단 교통사고 등의 눈에 보이는 위험 뿐이던가?

불뱀의 아픔은 인간관계의 아픔도 있다.

어쩔수 없이 사랑하는 자와 헤어져야할 찢어지는 고통도 있다.

전갈은 또 어떤가?

아픔 뒤에 찾아오는 마비되는 듯 허무함.

그 허무함의 한없음.

끝없는 고난의 벗어날 수 없어 고통에 마비되는 전갈의 고통이 인생에 상존한다.

'물이없는 건조함'

건조함은 불신자들의 병적인 곤고함과 우울함 뿐이던가?

예수님을 믿어가면서 성장하려는 자들에게 다가오는 영적 메마름도 있다.

그 메마름의 고통,

은혜가 떨어지고 몸부림쳐도 보이지 않으시는 듯한 예수님의 흔적은

가장 견디기 힘든 메마름이다.

그러한 인생의모든 어려움들이

오늘 '빈들'이라는 단어에 보여지고 있는 듯하다.

 

그 인생의 어려운 빈들은

예수님,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 분에게도 예외는 아니시다.

아니 오히려 그 분은 세상의 삶 자체가 늘 빈들이었는지도 모른다.

 하나님이신 분이 사람의 뱃속, 어머니 마리아의 뱃속에

10개월 간 갇혀 있어야 하시는 감옥같은 빈들,

산고의 고통을 마리아 만 느끼셨는가?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태아 였지만 그냥 태아였을 것인가?

그렇다면, 초산부의 산도의 끼인 고통을 12시간 (초산부 평균 진통시간) 이상

그대로 온 몸으로 받아 들였을 것이다.

그 지옥의 고통의 빈들.

 고대 중동의 열악한 삶을 영위해야 하는 빈들의 고통.

사역을 시작함으로 시작하는 비난과 목숨을 위협받는 고통의 빈들.
거기에 오늘 현실적인 사막의 '빈들' 까지...

예수님은 우리 인생이 겪어야 하는 인생의 광막함을 모두, 아니 그 보다 훨씬 더

모두 알고 계시면서 겪어 내셔야 했다.

아니 , 오히려 더욱 '선택적'으로 '빈들'에 처하심은

무엇 때문이시던가?

 모두 우리 인간의 '죄'와 그 광막함을 직접 체험하시고

십자가에 담아 가져가시기 위함은 아니셨던가?

아.....

그것을 생각하면

예수님은 내 모든 것을 아시고

내 모든 것을 같이 감당하신 분이시기에

그 십자가의 고난을 선택하신 그 사랑이 너무나도 놀랍고 감탄스럽기만 하다.

 

 오늘 인생의 빈들을 '일부러' 선택하신 묵상의 레마는 무엇인가?

무엇을 나에게 말씀하시려는가?

 

우선 나의 '빈들'은 어떤 것인가?

나를 그토록 광막한 사막의 메마른 공허함과 두려움에 부딪치게 하는

'빈들'의 상황은 무엇이던가?

인생 50 몇년.

그 인생을 지배하는 두려움은 무엇인가?

마치 바리새인들의 모략처럼, 아직은 현실화 되어 있지 않지만

나를 두렵게 하는 것 처럼 '착각'되게 하는 것은 무엇이던가?

 

 나.

안다.

무엇인지 알겠다.

그 '소리' 들의 정체를 이제는 눈치 채고 있다 .

그러나 저항도 해보고 이기려 애쓰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많이 가라앉았지만

아직 나에게 '빈들'의 건조한 광막함, 두려운 넓음, 뜨거운 고통으로 오는 것을

오늘 한번 더 마주 하련다.

 그래서 예수께서 적극적으로 '빈들'에 들어가셨듯이

적극적으로 마주 하여 보련다.

이게 중요하다.

주님은 빈들에 제자들과 함께 가셔서 무엇을 하며 보내셨을까?

그 광막한 곳을 바라보며 뜨거운 가운데 모래바람을 맞으며 무엇을 하셨을까?

'가만히 묵상' 하시지 않았을 까?

 

 빈들에 가만히 있음.

고난과 고통과 두려움을 적극적으로 가만히 쳐다봄.

이전의 나는 그랬다.

내가 무엇을 해내어 이기려했고 헤쳐 나가려 했다 .

그러나 대부분 좌절로 끝났다 .

물론, 돌아보면 그 몸부림 마져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서 깨닫는 기회가 되기는 했고

그로 인하여 지금의 내 깨달음의 틀을 가지게 되었지만

어찌할 수 없어 기도하며 내려 놓을 수 밖에 없던 일들의 이루어짐,

( '내려놓음', 그리고 '이루어짐')

그 이루어짐의 내 생각보다 더욱 놀라운 것들을 체험으로 쌓아가고 있는 중이다.

그것은 말씀에서 다시 한번 정리해주심을

놀라움 가운데 보고 있다.

 신명기 8:15 절이 이어진다.

' 너를 위하여 단단한 반석에서 물을 내셨으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그렇다.

내 지금까지 삶을 돌아보면 '반석'에서 나온 물과 같은 일들이 너무 많았고

그 엄청난 걱정 덩어리에도 불구하고

걱정이 이루어지기는 커녕 매일매일 놀라운 '만나'의 축복으로 살고 있음을

확신하게 되고 있지 않던가?

그러하다면 남아 있는 나의 큰 '빈들'.

그토록 오랫동안 내 인생을 좌우하는 '헛된 신념'.

그 저항하기 힘들었던 '빈들'의 두려움에 이제는 적극적으로 마주해도 될

힘과 용기를 가지고 있게 되었다.

예수님께서 지난 세월동안 그리 하셨다.

 

오늘 내가 빈들을 어떻게 마주 할까?

거창한 거 아니다.

말씀이 오늘 그것을 말씀하시니 그냥 그러려 하면 된다.

내 두려움을 마주 하리라.

그리고 그냥 가만히 말씀 앞에 내려놓고 있으리라.

하루 종일 환우랑 시달리고 관계의 흔듦 속에 있겠지만

내 생각의 일정 부분을 자꾸만 '빈들'에 기울이리라.

날 번잡하게 만드는 눈의 정욕, 안목의 욕심을 꺼버리리라.

TV, 괜한 책을 내려 놓고 가만히 직시하리라.

말씀을 묵상하며 그리하리라.

외적인 어떠한 행동도 피하리라.

 

 

 

감사하신 내 아버지.

오늘 하루,

내 두려워 하는 부분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가겠습니다.

적극적으로 그리해 보겠습니다.

여러 상황들을 가지고 말씀 앞에 맞추어 보겟습니다.

그리 만들게 하는 내 속의 변함없는 생각,

잘못된 신념,

그 때 나타나는 현상,

그로 인한 두려움을 그리하겠습니다.

주님.

깨닫는 기회를 주실 줄 믿습니다.

사순절.

우리 주님 예수께서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인간, 바리새인들의 궤계를 피하여

그것도 '빈들' 가까운 곳으로 적극적으로 도피하시는 모습을 봅니다.

그 곳에서 '제자'들과 할 일이 별로 없음을 알겠습니다.

그 어러움을 적극적으로 마주하면서

무엇 하셨던가 묵상하며

제 일상에서 마주하는 '빈들'을 적극적으로 묵상하겠습니다.

주님.

성령으로 도우소서.

늘 그러하셨듯,

기도하면 다가오셔서 저를 은혜와 평강으로 채우소서.

말씀 가운데 말씀에 맞도록 살려고 노력하려는

저의 의지를 북돋아 주시고

저에게 인사이트로 깨달음을 주시어

그 언제가 오래전 처럼 예기치 않은 집중으로

제 영 속의 더러운 것이 소리내고 도망치던 그 경험을 다시한번 허락하소서.

이제 깊은 내면의 빈들을 마주하렵니다.

졸지 않게 하시고

평온으로 가장된 나태함에 빠지지 않게 하시어

주여.

당신의 그 고난을 직접마주하심을 기억하게 하소서.

우리 주 예수님,

꼭 충만한 은혜와 제가 생각지도 못하던 '충만함'으로 절 채우시사

힘을 주어 이기게 하소서.

커피... .그토록 많이 마시던 것...

자유 가운데 거의 마시지 않게 하신

하나님의 소소한 역사를

또 다시 체험하길 원합니다.

제 인생의 전영역을 그러한 체험으로 채우소서.

이제 제 빈들을 적극적으로 맞닦드리도록 도우소서.

그리하여 세상에 주님의 이름을 드러내는

마리아처럼 되게 하소서.

예수님을 저처럼 사모하더니

저사람은 저렇게 살아났구나... 하게 하소서.

저로 인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세상이 보게 하소서.

주님 만이 제 인생의 진정한 목표가 되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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