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의로운 주하인[벧후2:1-9] 본문
저 속에 있음이 아름다움을
그들은 알까
혹여
자신의 문제에 몰입되어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온통
하나님의 축복 안에 있으면서도
나는
고통 속에 있음은
그게 옳은 것일까
고통이
옳은 고난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의식하느냐에 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영으로
건져진 것을 믿어지는 순간
그 고난은 감사함으로 바뀌고
이제 세상은 의미가 없어지며
난 내가
아름다움 속에 있었음을
크고 광활한
하나님의 우주에 속해있음을
깨닫게 되리라
7 무법한 자들의 음란한 행실로 말미암아 고통 당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고통 당하는 게
누구나 일수는 있다 .
그러나 , 의인으로서의 고통과
불의한 사람으로서의 고통은 다르다.
불의한 자는 자신의 욕심이나 자신의 상황에 의하거나 단지 외부적 이유로
오직 그 자신의 이유로 받는 고통이지만
의인은 똑같은 외부적 이유가 있더라도
그 자신의 내면에 걸러지는 다른 이유에 의하여
그 고통이 다른 형태로 나온다 .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말씀에 맞추어
주시는 은혜에 반비례한 자신의 부족함을 들여다 봄으로
비추어진 고통이라는 이야기다.
그래서 불신자나 성령체험하지 못한 자들의 그것에 비하여
고통이 더 클수가 있다.
보라.
무법한 자의 음란한 행실...
불신자들이나 세상의 마구 돌아감
하나님을 의식하지 못하는 자들의
단지 그의 육신을 위한 행동에 의하여
고통 당한다지 않는가?
그들이 단지 그들만 그렇게 음란하게 행동하는게
어찌 의로운 자들에게 고통이 될 수 있단 말이던가?
그거...
너무 인간의 근본 속성,
감정, 원죄적 성품.. 이란 근본적인 부분을 무시한것 아니던가?
육신의 '장막',
분명 장막이란 표현을 하고 있는 것 처럼
육신의 끈을 강하게 연결하고 있는
모든 믿는 자에게는
육신적 유혹의 힘이 너무 강하다 .
그러기에 의인이라는 표현은
그러한 불의한 자들의 음행에 대하여
견뎌내고 이겨내는 게 힘이 들 수 밖에 없다는 의미고
의인은 그러기에
하나님을 의식하는 자들...을 정의하는 개념일 수 있다는 것이
오늘의 말씀에서 드러나는 것이다 .
즉,
의인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계속 하나님을 사모함으로
인생을 살아가면서
부닥치게 되는 모든 세상의 불의와 저항할 수 밖에 없는
그러한 당위성을 이야기하는 것이며
의인은
세상을 살아나가면 나갈수록
점차로 내적인 갈등이
심해질 수 밖에 없는 상황임을
알게 되는 것이고
롯이 비록 의롭게 행동하지는 않았어도
하나님을 의식하여 그러한 불법을 '죄'로 인식하는
고통과 내적인 싸움을 하고 있던 상태였던 것이다 .
그래서 ,
우리,
나.. .주하인 처럼
이러한 불의한 세상에
이 동성애가 너무 자유스럽고
모든 어른 스러움이 부정되는
종말의 세상에서
그나마 하나님을 의식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려 노력하는 자들.. .
즉, 그러한 세상의 모든 방탕한 풀어짐에도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함으로
모든 고통을 고통으로 인식하는 자 들은
'의인義人'이라는 이야기시다.
롯처럼....
그러시면서
'고통당하는 ' 의로운 롯이라 하셨다.
고통 당함,
내면의 갈등,
현실의 세상을 좇아가기에는 버거우면서도
세상을 안 살 수 없는 이 고통을
주님은 다 아신다는 뉘앙스시다 .
당연하지만 살아계신 하나님이
어찌 우리...
스스로 이 세상에서 부적합하고
하나님 뵙기에도 그리 의롭게 살지 못하는 것 같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가련한 '롯' 같은 우리를
그냥 포기하고 버리실 거라 생각하는가?
아님을 알면서도
우리는 자꾸만 세상에서 살다보면 의혹이 드는 것을
이렇게 하나님은
'고통당하고 있지.. 주하인아....?
너는 그래도 내 말을 붙들려 노력하니
그래서 성령의 은혜 가운데 있는 자니
너는 의인이구나.. ' 하시는 것 같다 .
그러시면서
그러한 의로운 나,
의로운 '여러분'...
하나님을 사모하는 모든 세상의 의로울 자들을
'건지셨다' 신다.
건지신다는 것이다 .
건지시고 건져내셨는데
믿지 못하고
자꾸만 드는 의혹으로 인하여
내 감정만 흔들리기에 믿지 못하고 인식하지 못할 뿐..
하나님은 날.. .그리 하셨다.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다.
우리가 생각지도 못하고
단지 고통에 매몰되려 하지만
하나님은 건지셨고 건지실 것이다.
나.
그것..
수없이 많은 하나님의 임재하심의 은혜..
그리고 그 결과의 옳게 쌓인 증거를 체험하고 있기에
그 건지셨음을 믿게 된다 .
잊으려 했던
이 가녀린 영혼의 속성을 불쌍히 여기시사
오늘도 말씀으로 그리 깨우치심이다 .
감사하다.
주님.
저는 주님이 아니시면
말씀을 매일 받지 않으면
살아 있을 수 없는
고통 덩어리의 존재 였습니다.
주님을 모를 때에도
수많은 잘못된 불의의 소리들이
저를 갉아 먹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많이 부정적이었고
급한 외적인 결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원인이야 수년전부터
이곳에서 말씀묵상을 통하여
주님의 빛에 비추어 가며 말려가던것이 있어
더 들어갈 이유는 없지만
그러함에도 말씀대로
감사하신 주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고통은
또다른 어려움이었습니다.
주여.
그러한 고통,
의인으로 당연함을 말씀하십니다.
그러함을 아시고 계신다고
다시 확인하고 계십니다.
그게 힘이 됩니다.
주여.
이제는 건지신 하나님.
그 고통을 아시는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자꾸만 제 영혼에서 융화시키고 받아 들이고 믿어
오히려 고통과 고난이 더 유익인
말씀이 내 영혼에서 살아나와
매일 기억나게 되어
매일의 불법한 음행의 유혹들이
내 자신의 불의한 자아의 발로인 '분노'로 나오기보다
감사한 성장의 기회
약할 때 강함인 원리로 바뀌는
자연스러운 더 큰 의로 바뀌게 하소서.
내 주님이시여
큰 원칙을 이리도 깨닫게 하시고
의인으로 저 주하인을 다시금 스스로 인정하게 하시고
그러함으로 고난에서 건져진..
더 업그레이드 된
인생의 흐름을 누리게 하시는
내 주 예수님..
주님이 계심으로
그런 모든 논리적 점핑도 가능하니
제게는 주님이 계심이 얼마나 복인지요..
이 복음을
세상의 모든 선한 의인들이 같이 누리어
빠른 성화들이 이루어지길 소원하나이다.
주여.
비오니..
제 기도제목,
제 가정과 제 자식들에 대한 기도를
다 이루어지게 하시되
그들의 궁극도 '의'임을
저도
그들도 받아 들이게 하소서.
내주여.
그러기 위해서
세상의 것들에서
조금은 더 자유로운 자,,
주시고 안주심
없고 있음이
더 이상 '비교의 거리'가 되지 않게
우리를 건지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받들어
감사하며 기도합니다.
아멘
'신약 QT'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진정한 지혜에 대하여[고전1:18-31] (0) | 2015.11.03 |
---|---|
천사들도 그러신다[벧후2:10-22] (0) | 2015.08.27 |
늘 말씀으로 생각나게 하소서[벧후1:12-21] (0) | 2015.08.25 |
주하인의 망각[벧후1:1-11] (0) | 2015.08.24 |
그리스도인으로서[벧전4:12-19] (0) | 2015.07.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