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신으로 불릴 그날 ( 요 10:28-42 ) 본문
제 10 장 ( Chapter 10, John )
퇴근하며 급히 아버지 학교 가려는 토요일 오후.
어찌 이리 내 눈을 사로잡는 것이 많은가?
허리 춤에 매인 싸구려 사진기가 많이도 고생한다.
얼마나 만지고 만지고 충전하는지...
주님
감사합니다.
주님 아니시면
이 희망없는 세상에서
그토록 암울하던 내 영혼의 눈에서
어찌 이리
보기만하면 아름다운 세상이 걸릴 수 있겠나이까?
주님
감사합니다.
주님의 허락하신 영생이
이 잠시의 감동을 수만배 확대한
그 놀라운 영혼의 충만한 부활의 영생을 살 수 있다니요..
잠시 결리는
상처의 아픔이 이제는
덜 아픔다.
당신의 영생의 약속이
조금씩
내 영혼에 뚜렷해져 갑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28.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영생'
영원한 생명
좋은가?
실은 난, 영원토록 산다는 게 아직은 그리 달갑게 느껴지지 않는다.
아니... 예전 처럼은 아니지만
그리 오래산다는 게 주님이 그토록 주시고 싶어하시는
'영생', '부활'의 기쁨이 느껴지지 않음이 그렇다.
가끔 아직도 건드려지는 상처가 있으면
주님 십자가 앞에 내려 놓고 안정을 찾으려 가끔 가끔 에너지를 소비 하는 ^^';;
나를 볼때 이같은 삶이 영원히 되풀이 된다면 그것이야 말로 그리 달갑지는 않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주님은 그리도 주고 싶어하시는
그 부활체로 인한 영생의 비밀이
내가 생각하고 느껴오는 그 보다는 훨씬 깊고 값어치가 있을 것임을 알려주고 싶으신 듯하다.
그것은 내가 생각하고 경험해보지 못하던
훨씬 큰 감동의 나날,
원죄 이전의 온전한 삶이 회복되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천국의 영체로서의 삶은
육신을 가지지 못하기에 부활체의 그것보다는 조금은 제한이 있는
기쁨이라니,
성경에서도 내가 아는 바로는 ^^;;
에녹과 엘리야와 예수님 이외에는
어느 누구도 육신을 가지고 승천하지 못한 것으로 보아
부활체, 즉 영과 육이 온전히 유지되어 살게되는,
그 분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부활체의 영생의 삶이야 말로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가 없을 것임은
막연히 짐작이 간다.
영체로서의 천국의 삶도 '슬픔'이 없는 영원한 기쁨의 나라일 진데
그보다 더 한 영생의 삶을 사는 자야 말로 '신'같은 존재들이 아닌가?
바로 계시록에 나오는 '분봉왕'의 철장권세를 받은 자들.
예수님의 형상을 닮은
신같은 존재들....... 그 모습은 당연히 머리속에는 전혀 그려지지는 않지만
기도하고 묵상하고 기다리면 어느땐가
사모하는 나에게 그랬듯 알게 하여 주시지 않을까?
그때는
지금처럼 조금만 외풍이 불어도 흔들리는
가여운 결점덩어리 '주모'가 아니고
놀라운 믿음의 늘 행복한 주하인이 될 것임을 이해는 하겠다.
35.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NIV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 '들'이 될 수 있는 '신'을
gods라고 표기하고 있다.
우상 들을 표기할 때도 gods라고 소문자로 ,s를 붙힘으로 복수화하고 있다.
그들 우상들은 정말 하나님의 허락을 받지 않고 나름대로 신적인 능력을 흉내내고 있는
-사단도 하나님의 흉내를 내지 않는가?- 자 들이지만
여기의 신 들은 온전한 성화를 이루어 예수님의 형제로서 자격을 부여받고
부활의 몸을 입은 상태를 말할 것이다.
그들은 계시록에 의하면 7년 대환란이 끝나고 이 땅에 '신천지'가 이루어질 때
예수님의 지상재림하실 때 나오기도 한다고 되어있고
신천지에 들어갈 대환란 통과성도 모두가 부활의 몸을 입고 들어가기도 하고
무덤속에 잠자던 자들이- 영체로 천국에 거하던 분들 이라 이해가 된다- 주님의 부활의 나팔 소리와 더불어
부활의 몸을 입고 살아난다고 되어 있다.
어찌 되었던 간에 그러한 나의 짧막한 지식으로 인한 추정은
오늘 나에게 주시려 하는 주님의 말씀과 어떠한 연관이 있을까?
성경은 폐하지 못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
그들이 '예수님'을 닮은 자들이 된다는 데
주시고자 하는 말씀의 단초가 있는 듯 하다.
주님은 말씀이시기도 하다.
말씀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이루어지기도 했다.
성령 하나님이 운행하시는 통로이기도 하다.
그 말씀을 가까이 함은 '감동'을 매일 누릴 수 있는 통로다.
비록 나뿐일까?
말씀을 가까이 '사모' - 사모해야 한다. 사모가 맞다-하는 자들은
주님이 반드시 변함을 주신다.
의무에서 읽는 것이 아니고
그 말씀을 통해서 운행하시는 성령의 흔적을 느끼고- 느끼려 하고..이기도 하다- 그 분의 말씀을
내 일생에 적용하려 애쓰는 노력이 약간의 내 선택으로 작용하는 순간
그 말씀은 더 이상 글자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나의 경험이 증명한다.
아니다.
수도 없는 많은 사람들이 말씀의 위력을 증명한다.
그렇다면, 주님은 그걸 아는 나에게 무엇을 바라시는가?
내가 지금 그렇다면 ' 신'의 경지에 올랐다는 말인가?
그리도 대단한가?
아니다.
주님은 주님의 뜻으로 단번에 주님의 뜻을 이루시기도 하지만
지금까지는 나의 선택을 기뻐하시고
흔들려 스쳐지나가는 바람처럼 만
당신의 흔적을 보이시며
돌이켜 보면 어느 새 내 이마에 흐르는 땀을 식히셨고
마음까지 여유롭고 휘파람이 나오는 '휴식'을 누리게 하셨었다.
그렇다.
조금은 시간이 필요하다.
민감한 그 분의 임재에 대한 느낌을 놓치지 않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때로는 주님이 말씀하시면 결단의 의지가 필요하기도 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기다림을 필요로 하신다.
그렇다
주님은 오늘 나에게 '희망'을 선사하신다.
그리고는 인내의 기다림을 말씀하신다.
그 후에 있을 '신'같은 믿음과 은사와 놀라운 성화의 기적을
주실 것을 암시하시고 계시는 것이다.
'주하인
힘들지?
믿겨 지지 않기도 하는가?
하지만 , 나는 너에게 영생을 줄것이다.
네가 지금 겪는 삶의 곤란들, 지독히도 오랫동안 따라다니는 그 힘듦,
앞으로도 헤쳐나갈 것을 생각하면서 한번씩 한숨으로 대치하여 나가는
그 시간들은 저 멀리 기억 속에도 남지 않을 것이다.
대신, 은혜의 이름하에 그토록 기뻐하는 네 정열의 느낌 만 무한정 커질 것이고
행복이란 이름으로 네 입에서 되뇌어지는
그 긍정적인 감정이 수천 수만배 커져
감히 현 원죄적 육신의 소유자로서의 네가 형용할 수 없는 놀라운 나날이 이어질 것이고
온 우주보다 광활한 하나님의 지혜를 영원토록 깨달아가는
놀라움 속에 살게 될 것이다.
이게 주하인, 네가 가야 할 운명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말씀을 놓치면 안된다.
말씀이 받아들여져야 한다.
말씀이 영혼 속에 단 한톨도 의구심이 없이 스며들어 가야한다.
그 속에 흐르는 성령의 흐름이 네 영혼에 기뻐하라 하면 놀랍게 기뻐해지게 되어야 하고
그 분이 주시는 선한 부담이 가슴에 얹힐 때는 즉각 순종해야 할 것이다.
................
네가 죽을 때까지 성령은 널 도울 것이다.
그리고는 그 안에서 잘 익어가면 주님 예수님의 시간에 부활되어
영생의 삶, 신들의 삶을 살게 될 것이다. '
감사하다.
적용
1. 영생에 대하여 묵상한다.
2. 걸리는 게 남지 않는 삶........ 그 삶이 신들의 삶이다.
내가 걱정하고 두려워 하는 것은 의미없다.
돌아보라.
소경이 눈을 뜨는 것 만 보아도 소경은 하나님을 즉각 알지 않던가?
내 인생에 간증을 남겨 주신 그 분을 난 믿어야 한다.
3. 성경 여섯 장 읽겠다.
성령이여 .
읽는 것으로 끝나지 않게 하소서.
주여 내 영혼에 스며드셔서 , 제가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말씀에 써 계신대로 그냥 자연스레이 그 모습이 되게 하소서.
사랑이 넘치게 하소서.
순종자가 되게 하소서.
긍휼이 넘치게 하소서.
4. 아버지 학교 간다.
피곤해서 안가려 했다.
중보의 시간을 놓치지 말자.
신의 모습으로 한걸음 다가서자. 더..
5. 걱정이여 가라.
근심이여 가라.
주님은 말씀으로 임하신다.
6. 세상을 위하여 기도한다.
세상의 모든 혼란은 주님과 멀어짐에 의하여 생겼다.
주님을 세상과 분리하는 이분법에 의하여 생긴 골이다.
오직 이 난관을 벗어나는 길은
모두가 성경으로 돌아가고 말씀위에 고착되는 것 뿐이다.
7. 말씀의 흐르는 성령을 느끼자.
그 분은 문자가 아니시다.
문자를 통하여 나타내시는 '흐름'이시다.
감동이다.
기도
주님
말씀이 쉽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흐르시는 원리이신 주님 성령님은
그전에도 그렇지만
지난 큐티 시작 후 수년간
더욱 더
제 생각과 느낌을 넘어서는 원리로서
제 생각을 이끌어 가시고
손가락을 움직이게 하시고
결국, 영혼을 바꾸어 가시는 바람같은 분이셨습니다.
오늘도 그렇습니다.
역시 그렇구나 하면서
난 흐르는 원리이신
주님 성령으로 인하여 또 한편의 큐티 과목을 채워가고 있습니다.
전, 압니다.
그게 블로그를 채워가는 한편의 글이지만
그 글은
나의 수년 전의 주님 앞에 드린 작은 약속이고
주님은 날 이끌어 주시는 도닥거림이심을 요.
주님.
내 블로그는 흐르는 당신의 살아계심으로 하나하나 채워져 가고 있습니다.
오늘처럼
아무 생각없이 임할 때
감동으로 마지막에 끝날 즈음을 느끼는 체험이 될 때마다
난 그리그리 강렬히 느끼고 있습니다.
제 영혼의 움직임이 부드럽습니다.
제 눈의 깊숙한 곳에서 눈물 찌끼가 올라오려 합니다.
감동입니다.
감사입니다.
주님은 그렇습니다.
이것이 수천배 수만배 확대되어 영생의 삶을 사는 날 생각해 봅니다.
지력 짧아 아주 잠깐이지만요.
주님...
신으로 불릴 그날을 추억해봅니다.
부활체의 신.
감사합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죽도록 인도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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