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이해가지 않아도 눈은 떠진다( 요 9:1-14 ) 본문
제 9 장 ( Chapter 9, John )
아이가 아픈 것
가슴은 아프지만
주님의 뜻이 아닌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저
천진한 아이는
저리 천진한 모습으로
구겨진 내 영혼에
귀여움이란 선물을 던져
조금은 더 펴지게 만드는 도구로서 ^^*
사용되고 있지 않은가..?
우선은.....?ㅎㅎ
이구.............
귀~~~~여~~~~~~~~버 ~~~~~~~~~~!
1. 예수께서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을 보신지라
주님을 만날 예고도 없었고
그냥
주님이 길 가시다가
우연히 만난 듯 하지만
그것은
주님의 뜻이었다.
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보라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기 위하여
그는 소경이 되었다지 않은가?
어느 것 하나
주님의 뜻 아니신게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길가다가 만나신 것도
우연처럼 보이는 이 일도
모두 주님의 뜻 아래에 있다는 것이다.
내 고통도
주님의 뜻 아래에 있다........
6.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참
야릇도 하시다.
왜 그러셨을까?
침을 뱉으면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침'이시니 '세균'은 없었을까?ㅎㅎ
설령 없다 해도 진흙을 개시는 것은 또 ...ㅎㅎ
아..
설령 더럽지 않다해도
정서적으로 거부감이 .. 아주.....................약간 들지 않는다 해도
왜.. 하필이면 저러셨을까?
이해가 가지 않지만
그 이해가 가지 않는 일로 인하여 '눈'은 떠진다.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주님이 안계신가?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주님의 역사가 없을 것이라고 포기할 것인가?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우울해 버릴까?
모두가 주님의 주권이시다.
하나 부터 열까지
다
주님의 장중이시다.
주님이 운용하시는 원리다.
그 안에 '이치'와 '합리'를 집어 넣는 것이야 말로
세상에서 가장 미련한 짓 - ' 짓 ' 맞다... - 아닐까?
특별히 배우고 머리가 좋다고 하는 사람일 수록
자신이 보고 배우고 듣고 알고 판단하여 그렇지 않을 듯한 일은
절대로 믿지 않으려 한다.
그런데 '피조물'이 '조물주'를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믿지 않는 것이야 말로
세상에 가장 이상한 짓이 아닐런가?
도자기가 도기공을 보지 못하고
또한 자신을 토기로 만들었다고, 보기 싫다고 '없다'고 할 수가 있을까?
8. 이웃 사람들과 및 전에 저가 걸인인 것을 보았던 사람들이 가로되 이는 앉아서 구걸하던 자가아니냐
9. 혹은 그 사람이라 하며 혹은 아니라 그와 비슷하다 하거늘 제 말은 내가 그로라 하니
그와 비슷하다...
그와 비슷하다는 것은
'어딘지 분위기가 달라졌다'라는 말과 상통하지 않을까?
그 사람의 외형은 맞지만 어딘지 모르게 다르다....
왜 일까?
눈이 떠져서 일까?
물론 그런 것도 있겠지만
그는 예수님의 침과 손으로 닿아져서 회복된
조물주를 직접 만나서 만들어진 기적을 본 자이다.
그러니 , 그 안에는 놀라운 전율이 흐르고 있을 것이다.
그는 이전과 다른 가치 안에서 살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를 못알아 본 것이다.
아침에 비가 오니 어두컴컴한 탓에
아직은 아닌 줄 알고 이불 속에서 뒤척이고 있다가
시간을 보고서야 부리나케 일어나서 서둘러 출근했다.
겨우 시간을 맞추어 들어가
아침 찬양 준비를 위해 컴퓨터를 키고,
불을 켜고 조정실로 뛰어가서 스크린을 내리고
기타튜닝하고 거머쥐고 나니 연습도 못한 상태에서
사람들이 쫓아 들어온다.
아..매주 목요일 마다
불신자들이 대부분인 '큐티' 시간 겸 '아침 친절교육'의 장에서
막혀 풀어지지 않는 성대로 찬양을 하는 것은 고역이다.
그들의 그리 친절해 보이지 않는
무반응의 얼굴을 보며 찬양을 하는 것은
그냥 세상 노래하라면 정말 못할 일이다.
하지만, 그래도 .. 몇몇은 주님을........하는 기댈 가지고
억지로 힘을 내어 하긴 하지만 부칠 때가 있다.
어제 깜빡하고 있다가 늦게야 만든 ppt 안에
' 내 안에 사는 이'라는 찬양이 있다.
찬양을 하다보니 음이 높지 않고 편안하다.
' 내 안에 사는 이...... 예수 그리스도니..... 나의 죽음도 유익함이라
.. 나의 왕 .. 내 노래 .. 내 생명 또 내 기쁨... 나의 힘...♪'
가만 가만 하다 보니
이들에게 무언가 얘기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잠시 노래를 멈추고
' 여러분 , 믿지 않는 분이 많으신 줄 알지만,
가사의 내용을 알아야 노래가 은혜가 되듯이
내 안에 사는 이라는 개념이 뭔지 아세요?
한 사람 안에 두 사람 산다는 게?..' 하니
종긋.. 한다.
이어갔다.
'난 시체 해부실습의 본과 일학년 시절 철저한 불신자 였다.
그러나, 이쁜 여자 시체를 보며,
죽기전 수없는 사연을 가졌을 사람이 이제는
시체로 누워 아무런 섹시함을 주지 못하는 것을 보고야
육신 안에 거하는 무엇, 영혼이 있음을 확실히 알았다.
내 안, 내 육체 안에 사는 '나'라는 영혼이 떠나면
난 더이상 아무런 의미없는 고기 덩어리 일 뿐이다.
사도 바울이 쓴, '이제는 내 안에 사는 것은 내가 아니요, 나를 사랑하사...'라는 성경 구절을
찬양으로 만든 이 곡..
사도 바울은 그 육체 안에 '율법'이란 헛된 사상으로 받아들일 때는
죽은 자였으나,
예수님을 받아 들이고 나서는
이러한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여러분은 오늘 무엇을 당신의 육체에 받아 들여 살것인가?
예수님이 정답이 아니겠는가?'
.. 쳐다보니 사람들이 눈이 초롱초롱하며
개중에 일부는 눈을 크게 뜨고 쳐다본다.
시간에 쫓겨 얼른 마무리 찬양을 하고
큐티 진행하시는 '박 원장님께 돌리고
구석에 쭈구려 앉아서 주님이 저들 중 일부를 사로 잡으시길 기도했다.
잠시..
눈길이 ' 그와 비슷하다.'에 머문다.
왜 그와 비슷할까?
소경이던 때의 소경은
오직 눈 뜨는 일생의 목표 만이 그의 육신 안에 사는 유일한 가치였으나
주님 예수님을 직접 만나고
그 분의 침을 얼굴에 붙히고
그 분의 목소리와 그 분의 손길,
그리고 우주의 일 부분인 흙을 그 얼굴에 닿인 후,
그의 육체에는 새로운 가치가 들어왔다.
그는 '예수님'을 받아 들이게 된것이다.
그가 그이지만 그가 아니게 보이는 것은
그의 영혼에 사는 가치가
과거의 죽을 가치에서
죽지 않을 영생의 진리로 바뀌게 된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
또 새로운 하루가 나에게 주어졌다.
이전처럼,
주님을 믿긴 믿는 것 같지만
내 판단에 상황의 변화가 없는 것으로 보아
도저히 주님 조차 어찌할 수 없을 것으로 포기하고 사는
패배자의 믿음에서 벗어나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하기 조차 어렵고
아니, 어쩌면 이러한 상황이 주님이 역사하실 상황일 것인가.. 하는
그러한 믿기 어려운 것 조차
주님 안에서는 불가능이 없음을 믿고
그냥 주님 안에서 믿는 믿음으로 내려 놓는
오직 주님,
오직 예수님
오직 성령님을
내 안의 유일한 가치로 받아 들여
이전과는 다른 힘있는 하루가 되길 소원한다.
적용
1. 아무 것도 의심치 않겠다.
2. 아무 것도 판단치 않겠다.
3. 내 원하는 것을 주님 안에 내려 놓겠다.
그리고 여쭙는다.
4. 내 결점은 창피한 것이나 원망할 것이 아니다.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허락되었을 뿐이다.
편하다.
5. 성경 여섯 장 읽겠다.
기도
주님 감사합니다
소경에게 허락되어진
이해하기 어려운 몇가지 상황을 통하여
주님 예수님이 기적을 보이시고 있으심을 보고 있습니다.
주여.
감사합니다.
힘이 납니다.
어떤 상황도 주님이 임하시면 가능치 못할 일이 없고
어떤 일도 주님이 허락지 않으신 일이 없음을 알고
필요없는 죄책감이나
쓸데없는 절망은 내려 놓길 선택합니다.
주여..
오직 주님..
오직 성령님
오직 예수님. ..만을 내 영혼의 구주로 선택합니다.
주여..
도우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신약 QT'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난 양일 뿐이다.( 요10:1-15 ) (0) | 2008.11.29 |
---|---|
'소경'은 진실을 '본다'( 요9:18-34 ) (0) | 2008.11.28 |
진리는 맛있다( 요 8:45-59 ) (0) | 2008.11.26 |
쳇바퀴의 지옥을 벗어나는 길(요8:21-35 ) (0) | 2008.11.25 |
주님을 빨아들이다 (요 8:1-15 ) (0) | 2008.11.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