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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하는 자를 위한 깨달음 [마10:34-42]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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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하는 자를 위한 깨달음 [마10:34-42]

주하인 2014. 2. 13. 12:38

아침 안개 눈앞 가리듯

 

안개 마져 하나님의 뜻 !

그 안개를 뚫고

언제나 늘 밝은 하나님의 빛을 보고 살까?

세상의 혼돈을 뚫고

하나님 나라를

보고 살 수 있을까?

 

하나님은 비밀의 열쇠를

말씀에 두셨다.

가끔 '모순된 ' 말씀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는 자들에게

그 비밀의 열쇠를

아주 조금씩 여신다.

 

알면 행운이고 천복이다.

그 앎은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는 자들에게

다른 행복을 조금 더 제공하신다.

세상의 삶이

십자가의 고행이지만

고난이 넘치는 곳이

은혜가 넘치는 또다른 이유다.

 

 

34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35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36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성경에서 보면

같은 페이지에서 다른 말씀을 하는 경우도 있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 그 크신 사랑 ~ "에 전혀 맞지 않는 구절들 만 아니라

오히려 그를 넘어서는 무서운 말씀이 있기도 하다.

오늘 구절이 이 구절이 아닐까?

 

 기도하다가 형제와 화해 먼저 오라시고

오신 것이 '화평' 때문이라 분명히 해 놓으시고

여기서는 불화...다.

사람의 원수가 '식구', 그것도 자기 집안 식구.. 라고 나온다.

어떻게 이해할까?

 

 난.. 이런 부분들이 하나님이 특별히 메시지를 넣으신 강한 부분이라 생각한다.

 

일단, 이런것이다.

믿는 자들, 그중에서도 소수의 선택 받은 자를 추리기 위한..

아..  '성장'한 자를 걸르기 위한 코스 자격증 같은 개념.

'ㅎㅎ

세상의 지혜로 믿어서 예수님에게 올 자가 아무도 없다.

하나님을 믿는 인생의, 믿음의 연단 과정( 이 단어가 이해되는 분들은 이해가 가리라 ) 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와의 '인터액션' 즉, 상호작용을 전제로 하신다.

우주를 움직이시는 원리...

하나님과 우리와의 계약...은

그 첫째가 하나님의 절대원칙 , 모세와 돌판에 새긴것 처럼.. 변하지 않는 것이 있으시지만

우리와의 작용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수정하시고

그를 통하여 우주의 흐름이 바뀌게도 하신다.

그 흐름이 바뀌기 위하여 '모세'의 믿음 같은 믿음의 성장을 원하신다.

예수님으로 인하여 누구나 구원을 받을 자격은 있지만

누구나 진정한 구원, 상급 구원을 허락 받은 것은 아니란 이야기다.

세상의 지혜로는 불가능한,

사모하는 자들에게 허락된 성령의 인격적 만남과

그들의 사모로 인한 허락됨.

 

 그렇다면 '내'게 이해가 되는 오늘 구절의 이유를 생각해 본다.

 

우선, 불화에 대하여 고민하지 말라...는 뜻은 아니실까?

정말 어쩔 수없이 이어져 온 인격의 문제 , 아픔의 문제,

그로 인하여 형성된 현재......는

하나님의 오늘과 같으신 뜻 가운데서 벌어진 '불화', 즉 외적인 현상일 수 있으니

그리 큰 자책은 하지 말라는 '위로'이실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감사하다.

 

 또 , 화평과 불화를 동시에 말씀하시는 것은 어떻게 이해할까?

계속 '성장'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있다.

성장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초등학교와 전문의 따고의 규제는 다르다고..

 화평은 기본이다.

 

 하나님이 세상에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고

'이웃에 대한 사랑'이며

'자신과의 평화'다.

그 세 부분이 모두 완전해지길 원하신다.

 

 모두 쉬운 분야는 아니다.

모두 완전한 사람은 '온전한 성화'된 자고 궁극적인 목표이다.

하지만 사람에 따라, 환경에 따라, 성장에 따라 다르다.

하나님은 일정기간 아이가 젖을 떼고 학교에서 고등학년 되기까지는

무조건 사랑으로 감싸주신다.

화평은 인간들 사이에서 '사랑'으로 누구나 있어야 하나님께 영광드릴 수 있지만

인간들 사이에 사랑 만을 가지고 하나님을 잃는 것은 원치 않으신다.

그래서 이제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난 후에는

하나님은 '회초리'를 드신다.

그게 '불화'라는 표현으로 나오신 것이시다.

절대로 하나님은 '사랑'없는 불화를 원치 않으신다.

하나님이 불화라는 단어를 선택하심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약해질 만큼 '똘똘 뭉치는 ' 자기들끼리의 사랑은 원치 않으심이다.

오히려 첫째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순종이지만

우리의 연약함을 불쌍히 여기셔서 가만히 감싸 주셨다는 것이다.

힘이 생기면 '불화'는 감당할 부분이다.

 

의사로서의 나.

아픈 부분이 낫게 하기 위하여 싸매주고 약을 쓴다 .

일정 부분 쉬게 하고

좋은 수액을 보충한다.

하지만 만 약 (萬藥)이 무효가 되면 칼을 든다.

배농을 시킨다.

고름을 뺀다는 것이다.

어떤 때는 형태의 구부러짐이 오면 성형적 목적으로도 수술을 한다.

그 부분이다.

하나님은 불화라는 표현을 통해서

모든 '허락받지 않은 자'들이 머리만 좋아서

위의 원리를 이해하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오길 원치 않으셔서

뉘앙스로 '불화'라는 언어를 선택하셨음이다.

실은 '아픔을 감수한 원칙 세움'이시다.

'기다리신 후 영혼의 감당할 만한 체력이 보충되었을 시 드시는 수술'이시다.

 

 

 

37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보라.

사람끼리의 '사랑'도 중요하지만 하나님보다 더 중요시 하는 ' 사랑'은 원치 않으신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불화는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하는 바가 아니란 것이다.

 

 불화는 아프지만

회복을 전제로 하는 '사인'이시고 '신호'시다.

그렇기에 내가 할일은 그것이다.

무엇이나 , 어떠한 일이나

그것이 내게 벌어진 것은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으심을

믿고 감사하는 일이다 .

어쩌면 내게 허락된 현재의 아픔은

그것을 감당할 만한 '영적 체력'이 내게 생겼음이다.

'고난'을 오히려 기뻐할 이유다.

하나님의 말씀이 늘 모두 사통팔달 서로 이어지는 것은

' 성장'이란 개념이 있어야 가능하다

그것을 이해하고

머리 속의 것이 가슴으로 내려와

일상에서 내가 이해하지 못할 일들의 지속에도

하나님의 뜻을 생각함으로 오히려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의 생김이 '성장'의 증거임으로 생각하고 오히려 기뻐할 수 있어야 한다.

 

남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이 내밀한 비밀을

주님은 내게 만은 알려 주셔서

인생에 이해하지 못할 일이 없어지며

어느새 '지혜로운 혜안'을 가지게 되는 것,

그것 하나 만으로도 감사할 일이 아닌가?

그렇게도 믿지 않는 자들도 몸부림쳐 알고자하는 '도道' 부분에 해당하는

현기(玄氣)로운 깨달음이 아니던가?

 

그렇다.

하지만 '성장'이란 거기에 조건이 있다.

'순서'다.

'나보다 더'라 시지 않는가?

 위에 하나님이 세상에서 "성화될 우리, 선택받은 소수'에게 바라시는 세가지 조건을 이야기 했다 .

하나님을 믿음, 이웃을 사랑, 스스로와의 화평.

세가지 모두 통합되는 것이 온전한 성장, 성화이지만

순서는 '하나님 믿음'이다.

 

믿음이 없는 서로의 사랑은 '톨레랑스' 주장하는 다원주의이고

사랑없는 믿음은 '율법'이다.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둘의 추구는

'정신적 혼란'을 의미하고..

 

정말 시간이 지나갈수록 하나님을 믿는 이 인생길은

'힘들고 험한 십자가'의 길이다.

하지만, 내 생각, 이 땅의 것만 매달리면 '과도한 면벽', 고행.. 이 나올 수 밖에 없다.

하나님을 우선으로

그 하나님의 십자가 사랑을 바탕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택하신 자들에게 보내신 보혜사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나님 나라의 그 '우주를 아우르는  감동의 에너지' ,

그 에너지의 궁극이신 '하나님' 을 향하여

발걸음을 내딛는 것이

우리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이란 이야기다.

하나님의 뜻대로 예수 십자가를 나눠 지는 과정이 인생의 올바른 순서, 방향이고

그 비밀을 깨닫는 우리는

진정한 행운아다.

 

 

그렇다면 , 오늘.. 이다.

하루만 말씀보고, 현재를 살아가려는 내게

주님은 저 '타협과 불화'의 비밀을 통하여 무엇을 말씀하시려는가?

 

우선 기뻐하라.. 시다.

하나님은 허락된 '고난'을 기뻐하라신다.

감사하다.

누구에게 어떻게 더 세세히 말할까?

그들이 어떻게 나에게 내 문제에 내 답답함을 풀 온전한 답을 줄까?

심심하다.

재미가 없다.

일시적인 위로가 되고 , 그들의 입을 통해 '인사이트'를 주시기도 하지만

허락하신 때 뿐이시다.

그래서 '나를 가두지는 않되' 하나님께 더 매달린다.

말씀으로 이리 매일 위로 하시고 길을 여신다.

 세상의 성공책에서 '현재'를 살라는 ...것이 중요한 키 포인트로 나온다.

난.. 언제부터인가 말씀을 하루의 시작을 짊어지는 포인트로 잡고 산다.

말씀으로 현재만 본다.

그러니 불안이 없어졌다.

가슴이 뜀이 사라졌다.

오늘도 그러하신다.

불화란 단어를 통하여 '미래의 진정한 화평'을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내게 온전한 질서를 말씀하신다.

그러기 위하여 나를 돌아보았다.

말씀 가운데 나를 보았다.

'내 문제'다 .

타인을 향하는 질타는 결국 '내 속'에서 내가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미워하는 기본 마음 구조.

내가 옳다는 교만한 생각이 근본이다.

과거의 상처를 빌미로 한 내 두려워하는 틀이었다.

아니다.

다 내려놓고 말씀 안에서 받아들이기로 생각하고

불화마져 그냥 하나님이 원하심이실 것이라고 생각하고 받아 들이며

나를 돌아보며 회개를 할 마음을 가지니 보이는 것들이 있다.

그것의 결국은 '화평'이다.

불화를 통한 올바른 가치관의 정립은 '평화'다.

 

감사하다.

 

 

주님.

놀라우신 분.

이 세상의 불확실 한 것들에 대한

안개 같은 어려움에 대한 답을 주심을 감사합니다.

어찌하여 예수님을 믿고 그리도 열심히 살아왔는데

화평을 원하신다는 하나님의 뜻과는 반하게

불화의 늪에 빠지기도 하고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햇는데도

결과는 예상과는 달리 나오는 지에 대한

비록 제 지력 부족하여 맑지는 않아도

논리적 근거를 깨닫게 해주심을 감사드려요.

주님.

그래서 마음이 한구석 더 가벼워 집니다.

이제 매일 매일 조금씩 조금씩 하나님의 허락하신 깨달음이

제 가슴 속에 들어오며 지혜로서 자리 잡아감을 느낍니다.

도저히 제 상식이라 생각되는 부분에서 이해가 가지 않던 것들도

제 '하나님 앞에 올바로 서지 못한 것을 ' 바로 잡으시는 하나님의 뜻이시며

그것이 단지 징계가 아닌

올바른 순서를 통한

성화의 완성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었음을

다시한번 깨닫습니다 .

그래서 감사합니다.

주여.

오늘도 온전히 정신을 차려

불화하게 하신 하나님의 뜻을 통해

제가 다시 자신을 바꾸고 자세를 바꾸고

새로운 기대로 세상을 향해 나갈 수 있도록 도우소서.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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