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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을 타다[요3:1-21]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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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을 타다[요3:1-21]

주하인 2013. 1. 6. 09:16

 

 


 

2.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수많은 사람, 그중에서도 학식이 뛰어난 랍비가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을 것이건만

왜 그, 니고데모만 '밤'에라도 찾아오게 되었을까?

무엇이 그로 하여금 모든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밤'에 찾에오게 했을까?

밤에 찾아왔다는 것은 무엇을 암시하는가?

 

뚜렷하지 않지만 그를 흥분시키고 격동시킬 그 무엇이 그의 마음 속에서 움직였다는 것이다.

그 무엇이 무엇인가?

당연히도 '성령'이시다.

성령은 그의 마음을 움직였다.

 

 바람이 마구 휘날릴 때 먼지까지 눈을 가리지만

그 밀리는 힘은 기우뚱하게 하기도 한다.

그 밀리는 힘,

그것의 끝에 어떤 것이 있을까하는 그의 호기심과 더불어

확실치는 않지만 그 끝에 무엇인가 있을 것이라는 강한 느낌에 더불어

그는 '집'으로 들어가 피해버리거나

그냥 가만히 땅에 발을 붙히고 버틸 수 있었건만

발을 떼어

그 바람에 자신을 맡길 '의지'를 '선택'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 밤이라도

예수께 찾아 왔다.

 

 

8.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보라.

 

바람이 불때 누구나 알수 있다.

움직이는 흐름.

들리는 '윙~'의 소리.

하지만, 바람 소리 안에 있는 그 누구도

바람의 오는 곳과 가는 곳의 종착점을 알 수 없다.

기상예보가 그리도 발달한 지금도

'~해상 ~ 지점'은 예측하지만 정확한 그 지점을 알 수 없다.

당연히도 바람 속에 있는 자로서

어찌 그 정확한 지점을 알 수 있으랴.

비록 성령으로 난 사람 조차 이 거대한 자연의 흐름의 시작과 끝을 어찌 알랴?

그.. 하나님의 역사로 일어난 거대한 현상을 말이다.

 

 그렇다면 성령으로 난 사람과 성령으로 나지 않은 자의 차이는 무엇인가?

성령으로 난 사람은 '바람'을 탈 줄 안다는 것이고

세상의 사람들, 예수님 영접을 했지만 세상에만 관심있는 자들은

그냥 땅에 발붙히고 그자리에 있으려 안간힘을 쓰거나

문을 닫고 얼른 들어가 집에 틀어 박힘만을 할 뿐이다.

 

무슨이야기이던가?

성령은 '흐름'이다.

흐름을 타고 뜰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끝까지 가지도 바람의 시작점에서 같이 날아오르지 못하겠지만

불어오는 바람의 흐름에 자신을 맡기고

슬쩍 떠올라 바람이 인도하는 대로 가 볼 수는 있는 사람이란 이야기다.

 

 

12.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그게 무슨 이야기이던가?

날아오르고 따라 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던가?

 

하늘의 일까지 그의 관심의 대상이란 이야기다.

 

 그렇다.

땅.

땅으로 표현되는 세상의 것에만 관심을 가지는 자들은

당연히도 '유한'할 수밖에 없다.

오직 지금 이곳, 이곳에서의 벎과 벌지 못함 만이 관심이 될 뿐이다.

하지만 그들의 그 것은 결국 썩어갈 것들이다.

그러기에 그들은 그것에 그렇게도 탐을 내고 목숨을 걸듯하지만

그들의 뇌리에는 늘 원죄적 불안이 자리 잡고 있다.

무엇을 해도 불안하다.

그 불안의 근본은 '소멸'이다.

'죽음'이란 이야기다.

아니라고 부정하고 잊으려 하지만 그들의 원초적 불안은

다시 그들로 하여금 이 땅의 것에 더 몰두하게 만든다.

 

어제.. 내 딸 소영이를 봤다.

막장 드라마의 모든 조건을 다 갖추었지만 인기는 최상위급인 드라마다.

아내를 따라 보다 보니 꽤 재미는 있다.ㅎ

어제는 '시어머니'가 아들 성재의 출생의 비밀을 맞닥드리고는

그것을 잊고 부정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장면이

비록 그 시나리오는 비 현실성 ( 사람이 어찌 180도로 그리 쉽게 바뀌는지..ㅎ) 에도 불구하고

연기자들의 탁월함에 의하여 고개를 끄덕이게 했다.

거기 보면 그랬다.

처절하게 부정하기 위해 더 매달리는 것.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쪽으로 몸부림치는 것..

 

그렇다.

인간은 다 그런 '임계'상황에 도달하면 다 그렇게 된다.

그런 특성은 이 땅에 발붙히는 모든 사람이 가는 결국이다.

 

하지만 우리는 하늘을 향해 눈을 들면 상황이 달라진다.

진실을 마주하게 된다.

그래서 발을 떼어야 한다.

발을 뗌은 우리의 의지다.

그 궁극, 바람이 머무는 곳은 '천국'이다.

영생이다.

그 영생에 어찌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비밀을 알 수 있겠느냐 만,

시작은 발을 뗌과 동시에 이루어진다.

그 후는 성령이 우리 몸을 가볍게 하신다.

날아 오르게 하고 미신다.

가벼워지고 흐르게 된다.

 

 

15.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성령이 임하시면 바람을 탈 수 있게 된다.

바람을 타고 날아오르거나 떠밀리듯 가거나

그 끝은 어디일까?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그것, 우리의 열렬함, 우리 영적 몸의 비만함, 우리의 결심, 그 결심의 지속...

무엇 보다 '성화'의 정도에 따라 다르겠고

그 끝이 우리의 인생의 마지막에 일치하겠지만

바람이 닫는 끝은

'영생'의 비밀을 알게 하시는 곳에 있을 것이다.

 

그렇다.

바람은 인생 속에 불어오는 모든 고난이든, 기쁨이든..

우리의 인생 속에 강하게 흐르는 흐름이다.

우리 인생 뒤돌아 보면 여기까지 오게 하셨을,

그리고 또 그리 갈 어떤 인생의 '추세'이실 것이다.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은 날 여기까지 미셨고

이제 한걸음 발을 더 떼어

성령의 인도하심에 맞추어 나가길 바라시는

하나님의 인생에 대한 역사이실 것이다.

그리고 그 끝은 당연히도 '천국'이고 영생이시다.

 

 그러기에 오늘 내가 할 일은

내 인생에 그리도 끊임없이 불어오는 새

그래서 내가 여기까지 오게 될 수 밖에 없던 그 힘,

그 힘이 좋았던 , 좋지 않았던

고난이든 고통이든

실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영생'을 위한 바람이었음을 인정하고

그 바람에 나를 맡길 선택을 하는 것이다.

흐름에 저항하기보다는 '감사'하며 나를 맡기는 것이다.

'성령' 께서 이제 내 인생을 인도하실 것을 믿고

이제 이 허탄한 인생의 썩은 유혹 속에서

더 발을 강하게 붙히지 말고

발바닥을 하나씩 떼보려는 연습을 해야 한다.

때로는 그것이 내 몸을 움직여 공중에 뜨게 하려는 듯

디딜 곳없는 불안감이 순간 엄습할 수 있을 지라도

두려워 하지 말아야 한다.

돌아보면 난.. 그 발을 띄는 순간의 두려움을

그래서 하나님의 바람으로 날 인도하시던 경험을 몇차례 하지 않았던가?

 그냥 그냥 유지되던 병원을 정리하던 순간,

새로운 오픈을 준비하고 산부인과를 포기하려다가

다시 새로운 공부를 시작하게 인도하시던 순간.................

이제 여기까지 바람에 밀려 오는 동안,

말씀 가운데서 난 점차 깨달아가며

이 흐름은 하나님의 바람이심을 감사하고 인정하며 여기까지 왔다.

이제 새삼 오늘 이런 말씀을 주시는 이유는 무엇인가?

 

한단계 더 날아오르기 위해

아직은 몸이 무겁고

다시 땅을 그리워하고 있음을 깨닫게 하심인지도 모른다.

오늘 주일이다.

더 깊이 하나님께 내 영혼을 맡기고

안식 가운데 바람을 타길 원한다.

 

 

주님

아침에 말씀을 주셨습니다.

바람을 타길 원합니다.

성령으로 제 마음에 가벼움을 허락하시고

바람을 타는 흐름의 기회를 주십니다.

그 바람이 어디서 오는지

어디로 가는 지 아직도 불안하고 무지의 제가 확실히 맞지만

흐름 가운데 다시 발을 떼길 원합니다 .

오늘.

주님 안에서 안식을 취하며

주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결심하길 원합니다.

주여.

인도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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