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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 열시구나[요1:35-51] 본문

신약 QT

지금이 열시구나[요1:35-51]

주하인 2013. 1. 3. 09:44

 

 


39.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보라 그러므로 그들이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 날 함께 거하니 때가 열 시쯤

    되었더라

 지금 묵상을 시작하려다

시계를 들여다 보니까 '열시'쯤이다.

 

이 열시 쯤의 시간에

나도 '예수님과 함께 거하고 ' 싶다.

 

마음이 그렇다.

다 ..잘 나간다.

그런데 가슴이 멍하고 힘들다.

세상에 제일 힘든 고난이 '자식'과 연관된 고난인 듯 하다.

냉정한 아버지 밑에서 커서 나 역시 안그럴 줄 알았는데

그래도 자식과 연관된 고민은 늘 가슴을 미어지게 한다.

냉철하게 분석하고

하나님 앞에서 손해될 마음의 고민을 내려 놓는 등

자르려 하지만 자르기 힘든 마음의 부담.

슬프기도 분이 올라오기도 속상하기도 걱정되기도.....복잡한 마음이 날 누르려 한다.

 

출근하는데 너무도 춥다.

깊은 잠도 못잤고

힘도 없어

가능하면 외래 환자 분들 옆방으로 돌리길 간호사에게 부탁하고

가만히 앉았다가 그래도 말씀 만이

내 마음을 지키는 유일한 방법임을 깨달아 알고

이리 앉으니 이 시간이 '열시'다.

 

지금이 열시구나.

하나님이신 예수님  앞에 거할 시간,

어쩌면 이리도 '열시 일까?

 

 

45.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빌립은 '예수님'을 만났다.

그래서 들떠 '나다나엘'을 만나 떠벌인다.

떠벌인다고 어디에도 나오지 않았지만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라 하지 않는가?

그 분위기에서 그리 느껴진다.

더구나 곧 나다나엘의 의심에 어린 질문에서 나오듯 '나사렛' 촌동네에서

그런 분이 나올 조건이 아님에도 흥분하여 확신의 소리를 발하는

빌립의 모습에서 메시야 예수님은

우리의 조건이나 생각을 넘어서는 분임을 쉽게 알수 있지 않은가?

 

 열시.

무엇인가 벌어질 개연성이 아무 것도 없는 열시.

그 시간에 그들은 '예수'님을 만났다.

나도 '열 시'에 무거운 마음으로

솔직히 '하나님께서 살아계신다면 , 이렇게 열심히 믿고 기다리려 노력하는 데

내 자식의 ..... 안들으시는가?... ' 하는 의구심이 슬쩍 들어오는 것을

얼른 머리를 털던 차다.

그 열시에 하나님은 말씀으로 또 다가오신다.

이 가슴 한구석에서 따스한 기운이 올라오며

희망이 날 사로잡음을 느낀다.

아이에 대한 희망이 아니다.

영적 감수성이 부족한 나에게

하나님의 뚜렷한 음성이나 정황에대한 확신의 역사가 아니시지만

막연한 따사로운 평강의 감정.. 이

그렇지 않을 조건 속에서

그렇게 다가오신다.

그래서, 난 말씀의 살아계심을 다시 한번 믿게 되려 한다.

이 '혼란'한 머리와

무거운 가슴을 뚫고 ..........

말씀이 하나님으로 역사하시려 한다.

 

 

 

48.나다나엘이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나.

'주님... 나 같은 자......어찌 아시나이까?' 하고 싶다.

나같은 자라는 나의 물음은 나다나엘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와는 뉘앙스가 다름을 안다.

그는 예수님의 놀라운 능력과 그 분의 하나님이심이 막연하게 영에 감지되면서

그 분에 대한 놀라움의 경탄의 소리이지만

난.......나같은 자....라는 말로 표현이 되듯

내 '아버지'로서 부족한 자격에도 불구하고

내 '하나님이 그렇게 놀라운 사랑을 주셨음에도

어려움이 닥치면 금방 '의혹'의 불신을 보이는 ' 이 어리석음에도 불구하고........라는 의미다.

나.

그만큼 마음이 가라앉으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열시의 시간에

주님의 입을 들어 '나를 아신다'고 위로하심이 느껴진다.

그 정확한 시간의 살아계신 하나님의 위로가 놀랍다.

그래서 다시 말씀 앞에 서련다.

 

물론,

살아서 계속 엮이는 다양한 문제들은

그리 단순하게 나를 놓아주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주님은 내 마음의 방향을 세우신다.

 

그 분은 날 아신다.

나의 이김을 도장찍으시는 것이시다.

 

그런 믿음이 다시 생기게 하시는 것이다.

또 일상에 들어가

관계로 엮이고 그 안에 붙들리면

또 넘어질 지 모른다.

조금 지나면 내 가슴의 아픔을 다시 자극해 오는

사단의 소리들이 몰려올지 모른다.

하지만, 조금은 중심 잡히고 명확한 판단을 할 수 있다.

그것은 '이 부족한 자 주님이 아심'을 알았기 때문이다.

 

 

 

주님.

저....아시지요?

제 자식들.............아시지요?

그들의 속도

제 속도

제 아내의 어려움도......

주님은 아시지요?

 

어쩌면 크지 않을 수 있음에도

그것을 크게 만들어 고민하는 것은 아닌지

지혜도 주십시요.

그리고 더 열심히 살지 못하게 하는

내 아들의 그 마음의 어려움도

주님 붙들어 바꾸소서.

시간이 참.......많이도 지났지만

상황이  별 변화가 없음처럼 느껴져

좌절이 크려 합니다.

이제 '무화과 나무 '아래 앉아 있는

우리 각각을

미리 보고 계셨음을

무화과 나무 아래 아직도 앉아 있는

우리 하나하나를 다 깨우치게 하소서.

하나님 이제 열시 즈음이니

그 들 마음에

저처럼 역사하셔서

주님의 살아계셔서 그렇게 허락하셔서 그렇게 살 수 밖에 없었지만

이제는 더 자연스럽게 변화하게 하소서.

저희에게는 이해하고 기다릴 수 있는 인내와 여유로움을

아들들에게는 완전히 바뀐 세상관을 가지게하시사

힘있게 살게 하소서.

간절히 부탁합니다.

이제 열시입니다.

주님 .

아주 이른 시간도 아니지만

아직도 늦은 시간은 아님을

저도 아들들도 아내도 . 모두 믿게 하시고

기다리고 기도하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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