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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약해지고[요3:22-36] 본문

신약 QT

나는 약해지고[요3:22-36]

주하인 2013. 1. 7. 10:31

 

 


22.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유대 땅으로 가서 거기 함께 유하시며 세례를 베푸시더라

23.요한도 살렘 가까운 애논에서 세례를 베푸니 거기 물이 많음이라 그러므로 사람들이 와서 세례를 받더라

 우리의 삶과 괴리된 하늘에서만

하나님께서 움직이시는 것이 아니다.

 우리 곁,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은 역사하신다.

그분은 '열렬히 세상을 살면서' 그 분을 의식하고 살아갈 때

우리에게 모습을 비추신다.

그게 반드시 우리가 원하는 대로 '응답'이나 축복의 모습이 아닐 지라도

그분이 나타나심은 우리로 하여금

눈물나게 하겠고 상황에 상관없는 감사함으로 나타나시리라.

 

 

 

30.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그때 , 그런 그분을 알려면

우리는 우리의 마음이 늘 하나님께로 향하여 있어야 한다.

하늘을 향하여 열려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하늘로 향해 있음의

가장 귀한 고백이 오늘 사도 요한께서 발하시는 일갈이시다.

 

'그 분은 흥하여야 겠고

 나는 약해져야 한다. '

 

그렇다.

산다는 것. 우리가 바라는 것처럼

그리 일차원적일까?

기도하면 늘 축복주시고

기도 안하고 하나님 떠나면 늘 세상적으로 고생일까?

내가 잘하면 주님이 세상의 좋은 것으로 채우시고

잘못하면 물질적 현실적 고난을 주실까?

아니다.

그분은 그런 일차원 적인 분이 아니시다.

때로는 그게 맞기도 하고

특별히 신앙이 어리거나 특별히 하나님의 시기에는

그런 기복적 태도가 일치할 때도 있지만

성장을 위해서 고난을 허락하심이 맞다.

그래서 '이 땅에 예수께서 오신 목적이 고난도 함께 하라심'이라고도 말씀하시었다

 

 그 허락되어지는 '선한 고난'의 본질은 이렇다.

'자아가 약해져 가고

 하나님의 뜻 만이

 우리의 영혼에 살아남아'

결국 자아는 죽고 하나님 만 내 안에 사시는 것.

그것이 주님이 이땅에 우리를 살도록 하는 이유이신 것 아니던가?

 

오늘 사도 요한,

자신이 온 인생을 바쳐서 이루어 놓은 영적 사역을

'인간 예수'께서 마치 가로채듯 바로 곁에서 사역을 시작하셨다 .

 나.

나뿐이던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의 결국은

그들의 인생의 목적이라고 생각되어지는 어떤 사역, 가업, 이룸 등을

단기간 내에 무너지는 일이 생겨버리면 견딜수가 없게 된다.

 

 주일날.

'최진실의 남편'인 '조성민'씨가 또.......비애 속에 갔다.

너무도 잘나가던 사람들.

너무도 잘생겼던 사람들.

그들이 갑자기 저렇게 허무하게 인생을 마감하게 될 수 밖에 없음은

그들의 인생을 지탱해오던 가치가 무너져 버렸다고 느끼는 것이 아니던가?

그게, 인기 이던.. 영원할 것 같았던 소유들... 이던.. .

어떤 가치이던, 그 들이 목표를 상실해서

그 상실을 견디지 못하고 공허해 하던 이유이다.

 

그러기에 ' 요한'님의 저러한 고백은  너무나도 놀랍다.

내 입장을 저 분에게 대치해보았다.

당장 '왕따'되게 될 것이다.

그처럼 북적이던 주위 사람들이 하나도 없어지고

어느날 부터 갑자기 제자라는 사람들도 안절 부절 눈치만 살피게 된다.

아마도 기도의 사람이라서 자신의 결국은 눈치는 채고 있었을 지 모르지만

이제 남은 나이 - 갓 30 넘었을 듯 - 의 나머지를 무엇을 하고 살아야 할지

암담했을 것이다 .

아마도 '질투'의 감정이 '예수'님께로 향하지 않았을까?

불같은 분노는?

 

그러나 그는 아니었다 .

모든 것을 아낌없이 포기했다.

인기, 북적 대는 사람들로 인한 에너지의 재미, 제자들, ..

모든 것이 사라지고

심지어는 '생명'까지 포기하였다 .

 

왜 이던가?

무엇이 그로 하여금 그렇게 가게 했을까?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자였다 .

레미제라블이 공전의 히트다.

4~5번씩 보았다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형식의 영화는 처음이며 힛트하는 영화의 형식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한다.

기독교 영화로서 거부없이 성공하였다.

그 영화가 감동을 줌은 진리를 가감없이 적용했기 때문이다.

'자신이 누구인가?'를 끊임없이 외치며

잠시도 머물지 않는다.

계속 발전한다.

마지막에는 자식의 안녕을 위해서

노후를 보낼 가족과 평안까지 내려 놓지 않던가?

그는 '자신이 쇠하여져야 하나님의 사랑, 용서가 완성이 됨'을 아는 자였다.

 

그렇다.

세상을 올바로 사는 방법은

세상을 살 이유를 알아야 하는 것이다.

이유를 모르고 사는 삶은 '불나방' 같은 삶이다.

그들은 불만 바라보고 온몸을 태워 죽어가는 것들이다.

 그리고 자신이 '누구인가?'를 알아야 한다.

하나님 안에서의 '내 모습'.

 

사도 요한님은 그러기 위해서 그렇게 외치는 것이다.

'하나님은 승하고 자신은 쇠해야 한다. '

내가 죽어야 하나님이 살아나신다.

내 .. 이 땅에 고정된 눈이 놓여나야

하늘.... 영이 살아나는 것이고

그제야 우리가 누구인지 왜 살아가야 하는지 알 수 있는 거다.

 

누구나 다 사도일까?

누구나 다 사도 요한일까?

신약 성경에는 '열 두 제자'와  그를 앞서는 '사도요한'의 모습과

뛰어난 믿음의 용사들을 그리고 있지만

성경에 드러내 보이지 않은 수많은 믿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에 대하여는 모두 적어 놓을 수 없어

그들처럼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주 하인' 같은 자들은

가끔은 '사도'들의 가치에 다달치 못해  많은 혼란도 없지 않고

때로는 죄책감의 무게가 우리를 사로 잡으려 하지만

하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더불어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이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의 뒤를 '성령'께서 감당케 하시는

완전한 도움의 장치를 마련하셨다.

 

 이제 '사도가 아닌 나'

평범한 일상 속의 주하인이

하나님의 원리 안에서 오늘 하루를 살아갈 레마로

' 하나님은 승하고 나는 쇠하는' 이런 가치를 부여하셨다.

그래야 한다.

 내가 약해진다는 것은 무엇인가?

속상하고 억울하지만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을 믿고 그냥 기뻐 받아 들이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좋을 것만 같은 '자아의 합리적 '생각과

하나님의 말씀은 이렇게 하라 시는 말씀의 원리가 상충될때

과감히 말씀 때문에 손해보는 것을 기뻐하는 것을 택하는 것이다.

'싸움이라면 자신'이 있는 내가

싸움을 걸어오는 상대자가 있을 때

하나님 말씀 때문에 그냥 입을 닫아 버리려는 결심을 하는 것..

정말 '쪽 - 자아..ㅎ -이 팔리는  약해짐'을 기뻐하는 것이야 말로

나는 죽고

하나님이 살아가는

자아 부인의 , 예수 십자가를 같이지는 원리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

말씀은 무지하게 쉽다.

오랫동안 말씀 묵상을 해왔으니

한마디 말씀하시면 대개는 정리되어 머리속에 들어오고

때로는 '감동~'을 동반하며 말씀이 살아서 내 안에 오신다.

그리고는....

그대로 끝나버리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고백한다.

얼마나 난.. 이리도 어리석은 죄인인지..

그래도 '확신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날 사랑하시는 것'이란 말씀을

더욱 믿어 그냥 겨우 .. 어쩔 수 없이 일어나면

주님이 또 성령으로 위로하시는 은혜를 주신다.

 그처럼 부족한 나.

그런 나에게 이런 말씀을 주심은

또 다시 '행동'으로 옮기고 '결단'으로 승리하는 비율이 높아지길 바라시는 것이시다.

 

감사하다.

그래서 감사하다.

이제는 조금은 의지 발휘하고 그것을 더욱 기뻐하실 성령의 은혜를 체험할 기회를

우리 주님깨서 허락하심이 감사하다.

내 삶은 그리함으로

조금 더 힘이 생길 것이고

언젠가 되면 '사도 요한'님의 그 온전한 자기 부인,

사도 바울 님 같은 '생명력 넘치는 성령'의 폭포수 같은 임재로 인하여

주님의 말씀대로 되는 원함이 전혀 부인이 되지 않고

그대로 내 영혼에 생명으로 내려오는 그런 자 되지 않을까?

 

 

 

귀하시고 감사하신 주님.

저.. 약한 것 감사하길 원합니다.

주님 만이 승하시는 것을 기뻐하길 원합니다.

주여.

일상에서 하나님이 일어나시고

제가 가라앉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하소서.

오히려 약함을 기뻐하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더욱 약함을 감사하게 하소서.

주님의 십자가에 동참하는 것을 감사하게 하시고

그런 일상의 죽어감을 감사함이 예수님을 위하는 삶이 됨을 잊지 않게 하시고

오히려 감사하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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