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믿음에 대하여(부제:더 그레이 감독판을 보며 )[요 2:1-12] 본문

신약 QT

믿음에 대하여(부제:더 그레이 감독판을 보며 )[요 2:1-12]

주하인 2013. 1. 4. 10:36

더 그레이 

(펌)

 

 

5.  그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너무도 유명한 구절.

천사를 맞닦드리고 처녀의 몸으로

성령으로 잉태되고

기르는 동안 '어린이 예수님'의 하나님이신 그 위용을 본 그녀로서는

너무도 당연하게도

'하나님의 역사'로는 물을 포도주로 바꿀 능력이 있으심을

확신하고 있을 것이고 거기에 어머니를 모시는

인간 예수님의 효성을 알고 계실 터,

그러한 그녀의 강력한 확신은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한다.

그것은 아직 포도주를 보지도 못했지만

벌써 포도주가 만들어질 것임을 미리 믿는 믿음을 가지고 ..

아니다.. 당연히도 그리 될 것을 믿어지게 되었을 것이다.

그 믿음을 가지고 그리 명령한 것이다.

 

" 주여.

  제게도 저런 믿음을 주소서."

 

 

 

 

 이제 당직이 더 늘었다.

산부인과 전문의가 줄면서 의사를 구하기 힘든데다가

여성병원 의사 한명이 관두면서 그리되었다.

매주 목요일 마다 당직이고 주일 당직도 늘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당직을 서게 되었다.

아들(.. 아니 실은 내 문제가 터 컸을 지 모르지만.. ) 문제로 마음이 싱숭생숭하여

기도하고 책을 보다가도 마음을 잡지 못하고 잠시 TV를 켰다.

TV는 유선방송으로 나와 채널이 많았지만

많으면 더 볼것이 많을 것 같은데도

선택을 할 만한 것은 그 만큼 부족해진 듯하다.

그랬다.

물질 문명은 발달할 수록 편하고 좋고 행복할 것 같지만

갈급함은 상대적으로 더 커지는 듯하였다.

 각설하고,

이리저리 돌리다가 '그레이.. 감독판'이라는 영화제목을 보니

영화 좋아하던 내가 못보았던 영화다.

 

 

 출연자를 보니 '리암닐슨'으로 비교적 중량감있는 연기자로서

가만히 생각하니 개봉관에 들어어고나서 얼마 있다가 슬그머니 사라지는 바람에

영화를 보지 못했던 게 생각난다.

중간에서 보기 시작하여 처음은 잘 모르지만

대충 줄거리는 비행기 사고로 알래스카로 생각되는

깊은 산중 설원에 수명 만 살아남아

그들이 생존을 위해 투쟁하는 줄거리였다.

 그런데 그 설원에서 '극심한 추위' 와 더불어 ' 늑대'들의 추격으로 인하여

결국은 모두 죽게 되는 데

마지막으로 죽어가는 리암- 아마도 불신자였던 것 같음 -이

물에 빠졌다 기어나와 그 추운 설원에 등을 기대고

하늘을 보면서 '하나님,...'을 외치기며 도와달라기도 하고

'왜 안나타느냐'고 울부짖기도

'이제쯤 모습을 드러내도 되지 않느냐' 면서 한참을 절규하다가

'그래. . 내 혼자 힘으로 하지.. ' 하면서

다시 터덕 거리며 걷다가는

결국 ' 늑대굴' 속으로 오히려 들어가게 되며 최후를 맞는 장면이었다.

 

나.

그 영화를 만드신 분이 '불신자'이며 '하나님 안계신 것'을 증명하려 했는지..

아니면 '믿는 분'이 응답없으신 하나님을

어디까지 믿어야 하는지 생각하게 하려고 그런 영화를 만들었는지 잘모르지만

그 외치는 마지막 부분에서

혼자 당직방 이불을 뒤집어 쓰고는

치받치는 속상함을 견디지 못하고 '엉엉' 울었다.   ㅜ.ㅜ;;

(지금도 가슴이 멍해지려한다.. ^^;;)

 

왜 울었을까?

나도 모르게 ..

금방 알 수 있었다.

 참.. 오래 가지고 있는 내 문제.

그리고 그 간접의 결과일지도 모를 자식들의 무기력함.

믿음 생활하면서 '믿음'이 깊어지면서도

믿음에 따르는 응답이라고 생각되어지는 부분들이

눈에 확 띄게 나타나지 않으며

그 의미는 머리 속으로는 잘 알고 있으나

시간이 길어지고 점점 무기력한 믿음이 되어가는

나 자신을 바라보면서

'의혹'.. 혹시 주님이......하는

전혀 하고 싶지 않은 불신앙의 생각들을

영화의 주인공이 가감없이 그대로

너무도 절박하게 외쳐버리며

내 속을 들켜 버린 것 같아서 이었다.

 

몇분을 울고나니 속이 시원해졌다.

그리고는 마음이 조금씩 정리되었다.

그랬다.

내 바램과 응답의 조건이 ' 지금' .. '이땅'에 제한되고

내 바램과 꼭 같은 응답을 바램으로 삼고 있으니

그런 소리가 나온다.

어쩌면 하나님의 뜻은 '이 세상 이후'까지 펼쳐져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이전 부터 느낌으로 오고

이제 그게 논리의 장난이 아니고 그럴 수도 있다고 믿어지려 하고 있던 찰나다.

그리고 저분처럼 저렇게 절박한 상황이 아니어서

감정적 유희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있지만

나의 상황, 내 암담했던 수십년의 삶의 무게는

그리 가볍지 않음을 보아서

내 믿음에 대한 '경계'를 그렇게 확장해봄이 무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조금 들었다.

또한,

전인치유의 뒷좌석에서 깨달은 게 있다.

'응답'이 겨우 '회복'되어 원상복귀되고 이땅의 건강한 육신에 지나지 않는다면

건강한 사람들은 하나님이 필요없다는 논리에 귀착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더 큰 축복,

아픔이나 고난의 더 큰 유용함의 본질은

어쩌면 '기도 자체'에 있지 않을까.. .하는 느낌이다.

그것 역시 배부른자의 논리적 유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있어 조심스러웠으나

점차로 '기도 하시게 하고 그리함으로 얻어지는 영적 은혜를 허락하심

그렇게 함으로 이 삶속에서 더욱 믿음이 성장되어지는

'성화'가 진정한 축복일 수 있다는 이야기다.

 물론, 세상의 것을 완전히 도외시하고

영적인 성장 만을 주님이 중요시 한다는

수도자적 생각은 '그들' 만의 것이다.

세상의 것은 '하나님께서 ' 우리의 영적인 상황에 따라

필요한 만큼, 어쩌면 필요한 것 보다 더욱 부어주신다.

 나.

돌아보면 기적같은 일들이 내 삶속에서

마치 기적이 아닌 것처럼 벌어지고 있어왔다.

'복강경 홀로 셋팅'

' 사진.'

' 블로그의 십여년 가까운 유지'

' 부족하지만 그리 부족하지 않은 정도의 ㅜ.ㅜ;;;  ' 산부인과 의사로서의 경제적 유지..........'

' 오십살 넘은 자로서,

  2차 병원의 봉직의로 근무하는

  정말 공부 싫어하는 내가 받은 연구상.. 논문.. '

' .....................................                          '

하나도 이전 , 믿기 전에는 상상하지도 못했던 일이

자연스레이 , 마치 그렇게 예비되었듯  내 삶속에 이루어져 왔다 .

그거 모두 남들은 몰라도

나는 하나님이 하신 '기적'임을 안다.

 

이제 이후......

난.. 자식들이 세상적으로 크게 성공하고

손자 손녀들 데리고 내 주위에서 복작복작 웃음꽃 피우고

걱정하나 없이. .. 외롭지 않도록 화목하게. .. 가 어쩌면 될지 안될지 잘모르겠다.

그것을 기대하고 오랫동안 믿음의 원리에 따라 기도하지만

둘째마져......라는 나름의 '절망'이 점차로 커져 가서

날 그리 힘들게 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 '믿음' 문제다.

그게 십년 뒤의 진짜 모습일까?

아직 인생 갈길 많이 남지 않았던가?

어쩌면 그 연단이 자식들에게 더욱 바라시는 영적 훈련이 되기 위한

하나님의 '무응답'같으신 응답은 아닐런가?

 

나.

리암닐슨 처럼 하늘 향해.. 주여.. 힘이 드니 이제는 슈퍼맨처럼 나타나소서... 하고 싶다.

그러나, 마음을 바꾸었다.

그래도 '홀로 내가 할 것이다' 라고 외치지는 않을것이다.

너무 절박하여 혼자 힘으로 하지 않으면 안될때도

입으로 주님 주님... 외칠 것이다.

'내가 누구인가.. ' 소리소리 외치며

나의 모습을 주님 안에서 발견하려 애쓸 것이다.

 

 오늘.

마리아님의 또다른 '믿음'의 모습을 보이심으로

주님은 내 생각을 다시한번 정리시키신다.

그렇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이고

믿음은 ' 미리 기뻐하는 것'이다.

믿음은 '이루어 주시는 결과를 모두 주님께 맡기는 것이고'

믿음은 '그래서 자연스러운 것'이고

믿음은 '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게 되니 가벼워 지고 감사해지는 것'이다.

 

 

 

 

적용

 

1. 아이를 정말 주님께 맡기겠다.

 내가 할 일은 정말로 다했다 .

 어제 멘토이신 목사님이 '강제로 되기 전'에 그냥 내려 놓으라.. 시는 말씀이 기억난다.

 어쩌면 내 안절 부절 탓에 그리되었을지 모른다.

 슬픈 것.. 아들이 힘없이 사는 것이 슬펐던 것은

 내 전이감정일 수 있다.

 내 모습을 아이에게 투영하지 말자.

 아들을 어른으로 대하자.

 

2. 믿음에 대하여 다시한번 생각하자.

 믿음은 모두 맡기는  것이다.

 믿음은 그래서 결과를 나에게 맞추지 않는 것이다.

 믿음은 가장 좋은 것임을 기대하는 것이다.

 믿음은 감사하게 되는 것이다.

 

3. 성경 세장 읽으리라.

 

4. 하나님은 너무도 감사하신 분이시다.

 말씀으로 또 이리 인도하신다.

 그분은 살아계신다.

 찬양으로 영광 올리리라.

 

 

기도

 

 주님.

아팠지만 생각이 조금 더 달라졌습니다.

예전에는 극한 상황에도 내 믿음이 유지될까라는 생각이 들면

자신이 없어 얼른 회피하면서

믿음이란 나에게 과연 있는 것일 것인가 라는 의문에는 자신이 없었고

오래되는 , 변치 않는 듯한 무기력한 상황에 대하여

힘없어 하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제 조금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그래도,  믿을 이유는

그 상황을 통해서 기도하게 하시고

그 기도를 통하여 그보다 더욱 큰 은혜를 경험하게 하시고

그 경험이 쌓이면서 내 단단한 믿음이 이루어지게 하시사

나의 성장을 위한 것임을 이해하게는 되었습니다.

그리고 조금 더 믿어짐은

아직은 변화없을 것 같고 나로 인하여 같이 고생이 맞물린 듯한 대상들에 대한 믿음이

그들에게도 그들 나름대로 연단의 성취를 이루고

가장 선한 것으로 이끄실 하나님을

조금은 믿게 되었습니다.

어제 .. 세상의 안목을 통하여서

정욕보다는 깨달음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느꼈습니다.

리암닐슨의 울부짖음을 통하여 본질을 볼 기회를 얻었습니다.

그의 울부짖음을 통하여 대신 카타르시스 시켜주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막연하지만 답 비슷한 것을 얻음으로

당직이 .. 제 월급의 올라감 뿐 아니라

영적 성장까지 주시는 기회니

이 얼마나 기쁜일이던가 하는 가슴 깊은 감사함이 차오르는 기회이기도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주여.

세상의 어떤 것도

주님 안에서는 '선'이 될 뿐,

이것은 주님이 하시고 저것은 못하는 제한은 없음을 다시한번 깨달아 알게도 되었습니다.

그래서 ... 감사합니다.

자유로움이 조금 더 폭이 넓어진 듯해서 감사합니다.

주님.

제 아는 이 깊은 기쁨을 제자식들이 배워 알게 하소서.

더욱 깊은 영적 수준의 향상을 누리게 하소서.

내 주여.

살아계신 내 하나님이시여.

나의 모든 소망이시며

내 인생의 모든 것을 걸 이유시여.

하나님을 깊이 사랑합니다.

주님의 선하심을 깊이 믿습니다.

주님이 내 주님이시고

따라서 내 결국은 승리가 될 것을

오늘 말씀을 통해 다시한번 고백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받들어 감사하며 기도합니다.

아멘

 

 

 

 

 

 

 

 

'신약 QT'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바람을 타다[요3:1-21]   (0) 2013.01.06
내 속의 쫓아낼 양[요2:13-25]   (0) 2013.01.05
지금이 열시구나[요1:35-51]   (0) 2013.01.03
네가 누구냐 [요1:19-34]   (0) 2013.01.02
그날을 기다립니다(계22:1-21)   (0) 2012.12.26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