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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누구냐 [요1:19-34]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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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누구냐 [요1:19-34]

주하인 2013. 1. 2. 10:42

 

 


19.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 물을 때에

     요한의 증언이 이러하니라

 유대인들이 몰려와서

어쩌면 생명을 위협할 지 모를 강한 기세를 드러내며

이리 묻는다 .

' 네가 누구냐?'

 

그때 '나는 누구인가?' ..하고 순간 요한의 머리속을 스치는 질문이있었을 것이고

그의 머리 속을 한바퀴 돌고 나오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그는 준비된 결론을 도출하게 되었을 것이다.

 

 

20.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대

 그리고 그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라고

'이냐'에 '아니다'라는 답을 했다 .

거기에는 많은 시사점이 있다.

그는 그 자신이 누구인지

너무나도 확실히 알았고

그들이 몰려와서 묻는 요지에 대한 정확한 이름을 답했던 것이다.

그는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와서

기적을 체험하기도 하며

한참 그 시대의 '아이콘'으로 떠 올랐으며

그것은 어쩌면 그에게 ' 자신이 누구인지' 헷갈리는 상황에 쳐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땅에 떠도는 '이단'의 이름 중

처음에는 아주 높은 신앙적 수준에 올랐던 분들이

단 한번에 실족하여 그리된 경우가 얼마나 많던가?

요한은 '자신이 살아계신 하나님'이라 외쳐도 될 만큼

많은 기적을 행했고 , 대중적 인기 몰이를 하고 있던 차이다.

그러한 그를 '자극'해보는

세상의 상징들인 '바리새'파들의 질문에

한마디로 '그리스도'가 '아니다'라고 답함으로

그는 그들의 공격을 차단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속을 교묘히도 파고들

교만을 정리해버렸던 것이다.

 

레미제라블에서 '나는 누구인가?'를 그리도 외치던

휴잭맨 (쟝발장)의 외침이 다시한번 오버랩된다.

 

2013년 시작 .

어제는 '태초에 말씀이 계시...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다'라는 

내 눈앞에 늘 메모로 써놓고 명심하려는

말씀이 하나님이 되시기 위한 2013년을 명심케 하시더니

오늘은 '너는 누구냐?'하시며

'나는 누구인가'를 잊지 않기를 이리 다시한번 자극하신다.

 

나.

나는 정말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를 확실히 알면 세상을 살면서 헷갈림이 없게 된다.

삶이 단순해지고 명료해지며

괜한 에너지의 소모가 없어지고 행복해진다.

 

 나.

지금 내 서 있는 곳에서 의사다.  

의사는 '히포크라테스' 선서에 준해서 '의로운 의술'을 행할 자다.

그러기에 환우들을 더욱 긍휼히 여기고 좋은 시술을 해야할 의무가 있는 자다.

나.

정말 온유한 의사인가?

이전보다는 낫지만 아직도 불끈한다.

그것.. 아직도 내가 의사로서의 정체감이 약한 탓이다.

회개하고 다시 돌려야 한다.

새로운 한해 ..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

 

 

나.

집에가서는 아버지다.

남편이다.

아버지로서의 나는 어떠한가?

아주 오랫동안 굉폭한 독재.. 였다.

내가 아버지인지 제대로 배울 기회가 없었음이 사실이다.

많은 시간 온유하고 지혜로운 아버지로 노력을 하지만

이전의 내 모습을 보는 가족들이 있을 수 있다.

나도 내 자신이 자꾸 옛것과 헷갈리려 한다.

그래도 말씀 가운데 자꾸만 나를 세우려 한다.

 

나.

 나는 집사다.

교회에서 내 의사로서의 모습을 투영시켜

대우받고자 하는 교만함은 없던가?

그것.. 부족한 내 정체감이다.

집사로 낮추고 하나님의 말씀을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들려 해야 한다 .

그러함에도 내 그러한 외적 정체감보다는

내 속사람이 튀어나오려 한다.

 

............

 

나.

다양한 모습의 내가 있다.

그러나 2013년에는 더욱 내가 누구인가를 명심하고

건강한 '나'로서 타인을 대할 수 있어야 겠다.

그러면서 내가 해서는 안되는 '내가 아닌 나'는

십자가 앞에 , 하나님앞에

자꾸 말씀으로 투영시켜 깍아 내가야 한다.

 

이런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의 적나라한 나.

과거의 잔재에서 아직도 상처받는 나..

그런 '나된 나'는 십자가 앞에만 가져가야 한다.

온전히 주님 앞에 내려 놓아야 한다.

 

 

그런데......

관계 문제에서 가까운 자들의

그런 혼란을 어떻게 보고 있어야 하는가?

적극적으로 잔소리 할까?

기도만 할까?

기도만 하고 기다림이 좋을 듯 하기는 한 것 같은데

어디까지 멘토링이 가능할까?

거기에 또 엮여 들어가는데...........

 

참으로 어려운게 삶이다.

때로는 이러한 묶임은

잘 나가던 내 방향에 힘을 빼게 한다.

팔다리에 갑자기 힘이 빠진다.

그러면 답답해진다.

이렇게 하나님 동행하면서도

왜 이러는가??????

이러한 고민은 이전의 답답함 보다 깊이가 더 할때가 있다.

 

그래도 억지로 기어서 강기슭에 난 풀뿌리 잡고

안도의 한숨을 쉬듯,

말씀을 붙잡고 이렇게 다시 일어난다.

말씀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신 말씀을 붙잡고

말씀을 통해 운행하시는 '성령 하나님' 의 그 말없으신 탄식으로

날 위안하시고 하나님께 직고하시는 것을

다시한번 눈치채고는 힘을 내 하루를 견뎌본다.

 

 

나.

주님.

하나님의 자식입니다.

주님이 피뿌려 죽으신 그 대상입니다.

그러한 내가 이제 세상에 나가

참으로 다양한 나의 모습으로 굳건히 서려하나

가끔은 덜 단단한 내 정체감을 뚫고

사단이 공격을 해옵니다.

그러면 넘어지려 합니다.

팔다리 힘풀고

울어버리고만 싶습니다.

주님.

저 뿐입니다.

세상의 모든 자들이 온전하지 못한

세상의 가치로 인하여

많이들 흔들리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주님 앞에 다가올 시간과 기회가 자꾸만 줄어갑니다.

주여.

전... 하나님 앞에선 단독자임을 잊지 않게 하소서.

하나님의 명령하신 모든 말씀을

세상에서 준행하다가

주님 부르실 때 기쁨으로 두손들고 갈 자.. 임을

잊지 않게 하소서.

오늘 내가 할 일.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향기'를 드러내어

그들에게 어찌되었든

예수 믿는 자로서의 올바른 모습을 보이고

예수님의 살아계심을 체험케 할

적은 접촉점이라도 제시할

그런 의무를 가진 자임을 잊지 않게 하시사

말씀대로 살 조금의 의지조차도 기뻐하셔서

놀라운 은혜로 또 힘을 허락하시는

제 아버지..

살아계신 내 하나님을 깊이 체험하고

힘있게 살아가는

제가 되도록 지키소서.

예수 그리스도시여.

오늘은 둘째에게 힘을 주소서.

아이.

삶을 좀더 힘있게 살게 하소서.

확실한 방향을 가지고 힘껏 살도록 하소서.

주님의 영광위해 그리하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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