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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먼저 생각하던가(왕상20:1-12)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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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먼저 생각하던가(왕상20:1-12)

주하인 2010. 10. 22. 08:26

제 20 장 ( Chapter 20, 1 Kings )

 

 

무엇을 먼저 생각하던가

 

하나님이던가

명예던가

사람이던가

하나님의 이름을 건 사람이던가

하나님의 이름을 건 명예던가

 

무엇이 먼저이든

내가

나를

주님 앞의 꽃 같은 존재이고

주님의 가장 사랑하시는 아름다움임을

잊지 않음이

진정으로 중요하다 

 


3.  네 은금은 내 것이요 네 처들과 네 자녀들의 아름다운 자도 내 것이니라 하매  
4.  이스라엘 왕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내 주 왕이여 왕의 말씀 같이 나와 나의 것은 다 왕의 것이

     니이다 하였더니  
11.  이스라엘 왕이 대답하여 가로되 갑옷 입는 자가 갑옷 벗는 자 같이 자랑치 못할 것이라 하라 하니라
 

 아람.

다윗과 솔로몬의 시절까지 조공을 바치던 나라가  

이제는 힘이 생겨 23명의 왕을 규합하여 '연합군'을 형성하고

북이스라엘을 치러 와서 아주 강력한 주문을 한다.

' 아내와 은금과 자녀들... 모두 내놔라.    모두 내 것이다 !'

어이가 없다.

그러나 그 기세가 얼마나 등등하고 무서운지는 아합의 태도로 짐작할 수 있다.

 그러자, 망설임이 하나도 없이 순간적으로 아합은 대답한다.

' 내 주 왕이시여.

 왕의 말씀처럼 내 것이 다 당신 것입니다.'

 아합의 입장으로 잠시 들어가 보았다.  

너무 겁이 난다.

그런 소심함이 그를 안절 부절 못하고 두려워 하게 하는 것이 맞는 것 같다.

아합은 '악한 왕'의 대명사 이지만

그 악함의 원인이 사나움 보다는 '줏대 없는 두려움' 탓인 듯 싶다.

그러한 추정은

어제 묵상에서도 나오지만

엘리야 문제로 인해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이세벨' 왕비에게 물어보는 데서도 알 수 있다.

그러자 이세벨은 조금의 지체도 없이 '걱정하지 말라' 며

엘리야를 죽이라는 무서운 명령을 내리지 않았던가?

얼마나 명쾌한지 아합은 그것이 죄인지도 모를 정도로 나약한 사람이다.

  오늘도 그렇다.

벤하담 등의 아람 일행이 기세가 등등하며 국력을 신장해 가고 있지만

아직 그리 힘이 센 나라는 아닌 듯 하고

그 증거로 전쟁에서 패할 것이 나옴에도 불구하고

그, 아합은 ' 무례한 요구'에도 하나의 지체함 없는 겁쟁이의 모습을 보인다.

전혀 망설임없이 요구 그대로 들어 줄 것임을 천명한다.

심지어는 자식 뿐 아니라, 그토록 믿어 의지하던 '이세벨' 같은 아내까지 주겠다고

서슴없이 물어보고는 하등 갈등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다.

그냥 그의 머리 속에는 까만 장막만이 펼쳐져 있고

눈 앞이 어두워 보이고

심장은 아마도 200/분 이상 뛰었을 것이고

등 줄기에는 식은 땀이 흘렀을 것이고

얼굴은 붉게 상기되다 모자라 얼굴을 타고 흐르는 땀방울이 콧등을 흘러 내려

바닥이 흥건이 젖지 않았을 까 싶다.

그러다가 점차로 하얗게 질리며 

손발은 자기도 모르게 꽉 쥐어 피가 통하기는 했을까? ㅜ.ㅜ;;

 그러던 그가 '사신'이 돌아가고 나자

장로들을 불러 모아 놓고는 자신의 이야기를 창피한 지도 모르고

있는 그대로 이야기 한다.

 그러자, 반대 되는 의견이 나온다.

당연한 것 아닌가?

아람이 힘이 세지기는 하지만 아직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던가?

그러자 아합은 다시 힘을 낸다.

그러고는 멋진 멘트 - 이게 상황에 어울리는 지는 모르지만

아마도 아합은 천군 만마를 얻은 듯 용기가 생긴 듯 싶다. ^^;;- 를 날린다.

' 갑옷을 입은 자는... '

이게 벤하담을 비웃는 멘트가 맞기는 한 것 같은데

다른 영적 의미를 담고 있는 지 생각은 해 보았지만

아무래도 전쟁을 일으키는 너희들 보다는 갑옷 입지는 않은 자기 같은 자들이 이길 것이란

이야기를 상징적으로 비유한 것은

아합의 소심함을 가리고 안심하기 위한 자기 만족적 표현이외는 느낌이 없다.  

 

 그렇다면 아합은 무엇이 문제인가?

그의 소심함을 드러내기 위한 연극 시나리오가 아님은 당연하다.

소심함으로 인하여 그가 그후에 선택하는 방법이다.

정말 모든 것이 '선택'이다.

인생 무대에 '삶'이라는 연극 한편을 펼치고 가는게

우리의 '인생'이고

그것을 보시고 기뻐하시는 관객이자 director이신  '하나님'이시라면

매 한편 한편을 이루어 나가는 것은 시나리오를 꾸며가는 우리의 '선택'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다.

그 선택의 결과가 삶에 무대가 내리워지고 하나님의 앞에 갈 때

전체 인생 드라마의 '질'을 결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더 질을 높이고자 하면 리허설 할 때 '감독'이신 하나님께

하나하나 조율해가면 조절하면 아름다워진다.

훌륭해진다.

훨~~씬...

 

 

 아합은 어떤 선택을 했던가?

그는 소심함을 너무 소심하게 받아 들였다

그는 그 소심함을 더 적극적으로 받아 들여 오픈하고 변화 시키려는 노력보다

그것을 회피하는 것을 '선택'했다.

그 회피의 방법으로 그는 '사람'의 뒤에 숨은 것을 선택했다.

'이세벨'의 뒤.

'장로'들의 뒤.

때로는 '벤하담'의 뒤.

 그는 뒤에 숨으면 그것으로 마음의 안정을 누렸다.

거기에는 '이세벨' 왕비에 대한 미안함,  자식들에 대한 안타까움, 금은의 아까움이나

백성들의 왕으로서의 자존감,

그들의 정신적 지주라는 정체감 같은 것은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소심함.

자신의 선택에 따라 '악'이 되는 지름길 임을 아합은 잘 보여준다.

소심함을 회피로 선택한 그는 '악함의 대명사'가 되었다.

 

 그 소심함.

누구에게나 없을 수 없겠지만

다른 현명한 선택은 무엇이 될 것인가?
'하나님'이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물어 봄이다.

 

 세상의 어떤 결점도 결점으로만 존재하진 않는다.

성경에는 분명히 나온다.

약함이 강함이다.

세상의 원리도 마찬가지다.

약함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승화'라 한다.

그게 심리적 기제의 긍정적 역할이다.

일단 아합은 '하나님 앞'에 나갔어야 한다.

히스기야 왕이 그랬듯이 죽도록 그래야 한다.

꼭 큰 일 뿐이던가?

매사에 선택의 기회는 온다.

매사 매사 다 그래야 한다.

그렇게 되면 그의 소심함은 강함이 되고 아름다움이 된다.

그는 훨씬 겸손하고 윤기있는 왕이 되었을 것이다.

안타깝다..

 그렇다.

소심함 뿐이랴..

내적인 단점을 , 스스로 생각하기에 문제가 되는 결점들 조차

다 주님에게 맡겨야 한다.

그로 인한 인생의 문제들의 해결을 다 맡겨야 한다.

맡긴다는 것은 내려 놓는다는 것이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믿고 기댄다는 이야기다.

쉽지 않은 이야기다.

왕비는 쉽게 보이고

장로는 일단 눈에 보이지 않는가?

그럼에도 보이지 않으시는 영이신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것이 쉬운가?

그래서 더욱 기도해야 한다.

말씀을 붙들어야 한다.

 

 나.

정말 일상에서 주님을 의지하고 붙들던가?

문제가 있을 때만 그러는 것은 아니던가?

 

 실크로드.

8년 전 .

정말 선교의 사명에 부글부글 타는 의사들이 이 병원에 모여 들면서

그 에너지를 찬양으로 나누기 위해 자생적으로 형성된

남자 의사 중창팀.

우리나라에 거의 없을 정도의 의사 중창팀은 드문 경우이고

특별히 점심 시간 , 일주일에 한번 모여서 연습을 하던 중

이태리 유학 다녀오신 테너 선생님의 지도로 급성장하며

안양 지역에서는 꽤 알려진 팀이 되었었다.

특별히 우리의 팀이 놀라운 것은

연습량에 비하여 너무 은혜롭다는 것이었고

기도하며 하나된 팀원들의 기쁨 탓이었던 것이 맞다.

그러던 것이 다양한 이유로 인해서 인원이 줄고

연습도 조금씩 빠지며 이제는 정말 행사 있을 때만

잠시 잠시 연습하여 이름  때문에 나가는 ...

안타깝기는 하지만 그래도 실크로드를 사랑하는

몇몇 지속적인 감성을 가진 분들 때문에 명맥이 유지 되는 느낌이 없지 않았다.

 그러던 차, 수년전 한참 열심일 때의 실크로드의 공연에 감동하신

일본과 대만의 기독교 의사 연합회의 초청으로

11월 12일 부터 3일 간 일본에 공연가게 되었다.

물론 '회의'의 행사 일부분 담당이지만..

병원에서 전액 부담한다는 조건으로 우리의 연습은 다시 피치를 가하게 되었지만

지난 수요일 연습 후 몇가지 변수에 대하여 이야기가 나왔다.

 급작스레이 식은 '열기'

그나마 근근히 버티던 마음이 급격히 냉랭함을 느끼고

그러한 지원의 중단에대하여 우리의 태도를 이야기 하던 중

다양한 이야기가 나온다.

 난..그렇다.

실크로드의 '존재 이유'다.

정체성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들이 없는 시간 모아 기쁨으로 하모니를 드림으로

그 감동을 같이 누리는 것이다.

듣는 자들.

부르는 우리들.

정말 그랬다.

연습했던 것이 부족했어도 기도하고 들어가면 그 큰 무대에서

우리 팀이 가장 갈채를 많이 받았던 경험이 너무도 많다.

나와서 감동하며 서로 등 두드리고 콧날을 시큰 거리고

눈물 그렁거리던 기도를 기억한다.

그런데 , 시들거리는 사람들,

기도하고 하나되는 감정을 공유하지 못하는 몇몇 분들...

거기에 사정상 그 중의 일부는 안가겠다고 빠지며

'윗분'들의 뜻이야기 하며 소수라도 가자는 의견들..

못마땅해서 그냥 나왔다 .

진료시간이 넘어서이지만...

 

아침에 출근하니 메일이 와 있다.

윗분을 이야기 하던 그 분이 '성경 구절'을 넣어 보냈다.

평시에 순종에 대한 구절로 가장 즐겨 암송하는 구절.

그러면서 기도하잔다.

금식하잔다.

틀리지는 않지만 방향설정이 틀리지 않았는가?

 살그머니 '실크로드'의 정체성 이야기를 넣어

주님이 일본을 가시는 것을 싫어하시는 것은 아닌가 먼저 기도하자고 답장을 보냈다.

마음이 불편하다.

그 분이 아전인수격으로  성경을 들이대는 것 같아 부담스럽다. ^^;;

 

그러다가 불현듯 깨달았다.

'아.

 저분은 그래도 실크로드를 위해서 기도했는데

 난 무엇인가?

 다 아는 듯이

 이제는 시들거려져 실크로드의 존재가치는 끝났으니.. '하는 것처럼 

그냥 '동호회'의 태도로 대한 것이 바로 내가 아니던가?

 말씀 묵상을 하던 중 

난 내가 아합과 다름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랬다.

주님이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은 비판이나

아합이 장로들의 도움으로  소심한 마음에 대답할 것을 마음에 준비한 후로

멋진 듯이 외치는 그 모습이 아니시다.

 혹시 아합의 그런 모습이 내 모습이 아닐 까 하고 반성했다.

 그래서 얼른 실크로드에 대하여

'하나님 어떻게 해요..' 하고 잠시 기도했다.

어쩌라시는 답은 없으시다.

하기야 기도의 분량이 그것 밖에 않되는 나로서

그런 응답을 기대함은 무리일지 모르지만

마음이 안온해진다.

주님은 기도하는 것 자체를 기뻐하신다.

그리고 아주 자연스레이 인도하신다.

최소한 억지로 윗분의 눈치를 '순종'의 이유로 따르는 것이 능사는 아닐 듯하기는 하지만

환경이 그리되면 자연스레이 순종하는 것은 무리가 없다.

 어리석은 듯한 그 분의 판단에 대하여도

'다른 의견' 정도로 가벼이 받아 들여진다.

실크로드를 위해서 기도했다.

주님.. 인도하소서.

앞으로 어찌 이 찬양팀을 이끌어 가실 지 모르지만

주님이 귀히 여기시면 계속 유지되고

기도하는 자들로 인하여 융성화 될 것이라 생각한다.

 

 살아가는 상황상황 중에서

아합의 모습과 비슷한 패턴을 취하면서도 깨달아 내지 못하던 것,

주님의 말씀이 거울이 되어

내 안에서 발견해 내게 하시고는

또 한번 내 영혼 안에 깊이 숨어 있던

악할 뿌리들을 뽑아내는 아침이다.

  말씀은 살아 있다.

말씀은 하나님이시다.

그 세심한 하나님이 너무 감사하다.

 

 

 

적용

1. 실크로드를 위해서 기도한다.

 . 존재 이유에 대하여 다시 한번 생각한다.

 . 실크로드를 존속하길 원하시면 단합되게 ..

 . 지도하시는 지휘자 님을 위하여..

 . 팀원 하나하나의 통합을 위해.

 . 수고하는 자들의 고생을 위하여..

 . 일본 행에 대한 주님의 인도하심을 기도로써 보길 원한다.

 

2. 매사에 주님을 의지한다.

 주님의 뜻을 더욱 깊이 인식하자.

 매사에 주님의 뜻을 생각하자.

 

3. 뜻이라 생각되는 것에 대하여 전적으로 따르는 하루가 되겠다.

 손해가 되어도.. 

 

4. 성경 세장 읽겠다.

 

5. 내 가장하고 있는 소심함은 무엇이던가?

 소심함을 가장하려 무엇을 의지하던가?

 가까운 자던가?

 권위던가?

 

6. 선택에 대하여...  

 

기도

 

주님.

아합과 벤하담.

전혀 영적이지 않은 자들의 치고 받는 모습을 보며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의 어이없는 것을 웃어버리게 됩니다.

어이가 없습니다.

이세벨.

그 기세등등하던 여인도

아합의 결심에 따라 하루 아침에 끌려가는 여인네가 되고 말 뻔했습니다.

이것이 악한 자들의 어쩌면 가야할 운명이 아닌가 합니다.

주님을 모르는 자들이 이 세상에서 겪어야 할 운명인지 모릅니다.

그러면서도 이 유한한 세상에서 서로를 딛고 안전하고자 몸부림치는 것을 보면

어이없고 안타깝기 그지 없습니다.

그러나, 내 삶이라고 그리 다르지 않음을 실크로드를 생각하며

다시 한번 느끼고 있습니다.

주님을 생각하지 않고 매사에

내 판단, 내가 옳음에 따라

그 이유의 근거가 하나님이 되는 것처럼

합리화 시키는 그 저변에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그들과 하나도 다름없었던 것을 보며

내 이 악할 수 있었던 부분을

말씀 묵상에 맞추어 빼냅니다.

빼내려 합니다.

 

주여.

감사합니다.

늘 말씀으로 인하여

이리 매일 같이 돌아보고 회개하고

들여다 보는 기회로 삼아주시니

그 놀라운 간섭과

그 세미한 음성이 감사할 따름입니다.

 

주여.

죽을 때까지 말씀 앞에 설 결심을 다시한번 합니다.

저...

제 아내..

제 자식들...

제 아는 모든 분들..

다 그리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이땅이 천국이 되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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