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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그럼에도 그래서(왕상19:1-21 )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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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그럼에도 그래서(왕상19:1-21 )

주하인 2010. 10. 21. 09:34

(왕상19:1-21 )  

 

그래도

힘을 내어

다시 설 수 있는 이유는

 

그럼에도

빛으로 비추시는

하나님의

어루 만지심이 있으심이다

 

아침이 맑다

구름을 걷으며 비치는

아침의 햇살이 밝다

 

그래서

다시 힘을 낸다

연약한 팔과

힘없는 다리에

새 힘이 솟는다

 

 

 내가 여기 왜 있었던가(왕상19:1-21 )

1.  아합이 엘리야의 무릇 행한 일과 그가 어떻게 모든 선지자를 칼로 죽인 것을 이세벨에게 고하니 
 세상에 ..

 여자의 독기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무섭다.

 

 

4.  스스로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행하고 한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바로 어제까지 넘실거리든 하나님의 불길 같은 기운이

갑자기 사그러져 '급 우울' 모드로 들어가는

이 놀라운 '감정의 변화'.

 다름이 아닌 엘리야의 그것이 이토록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의 변화를 보이니

참으로 사람은 '논리적 존재'가 아님을 다시한번 보고 있다.

어찌 생각하면 '감정'으로 인하여 혼란스러워 하고

수치감을 가진 다는 것은 별로 의미없는 것임을 보고 있다.

 어찌되었든

엘리야는 대 성공 이후에 급작스러운 위기에 봉착하고 있다. 

 
 
7.  여호와의 사자가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네가 길을 이기지 못할까 하노라

    하는지라
  그럼에도 위로하시는 하나님.

진정한 위로는 하나님에게서만 올 수 있다.


 
8.  이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주 사십야를 행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 
  그럼에도 현실은 무시할 수없다.

현실과 괴리된 지나침은 '영성'이 아닐 수 있다.

 

 아니다.

때로는 지나침이 영성이기도 하다.

엘리야가 그렇다.

 그러나 '상황'에 따라 아닐 수도 있다.

주님이 허락하시는 재산이나 물질 마져 모두 영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배제할 이유는 없다.

'흐름'이 원리다.

주님 안에서 세상의 이치에 어긋나지 않는 흐름.

중도의 원리.

중심 잡힌 믿음.

중심이란 이름으로 '메말라 지지 않는 ' 영적 건강성의 유지.

정말.. 이게 힘들다.

 엘리야는 절절한 뜨거움과 완전한 차거움의 무기력 사이에서

굉장한 갈등을 하지만

식물 조차 주님이 먹이신다.

그 중도의 믿음을 훈련시키고

자유로움의 뜨거운 믿음을 놓치지 않기 위한

아주 진한 영적 심리적 훈련이시다.

그러면서 천사를 통해 위로 하신다.

 

살아가는 것.

물질 세계에서 살면서 영이신 하나님의 뜻을 살피면서 사는 과정.

쉬우면서도 너무 어려운 과정.

주님은 '중도'를 유지하면서도 뜨거움을 잃지 않는

그 믿음을 얻길 원하신다.

성장이다.  

 
11.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가서 여호와의 앞에서 산에 섰으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의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놀라운 진리.

살면서 자꾸 착각하는 것.

대단한 위업이나

주님이 하셨을 것 만 같은 '우람한 ' 일에만 주님이 계실 것 같은...

주님의 이름으로 순탄하게 나가면

그게 주님의 뜻의 모든 것인 줄 확신하는 것.

 

 그 허상의 위험성에 대하여 이렇게 보이신다.

 

 
12.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정말 위험한 것이 이것이 아니던가?

중도와 중용에 대하여 썼지만

차분함과 침잠함을 신앙의 약함으로 만 이해하는 것의 위험성.

뜨거운 것 만이 다 인 것 처럼 오해하는 소지.

'성령'운동의 당연함을 알면서도

그 위험성에 대하여 경계하여야 하는 이유.

한편으로 제한하는 것의 '차거운 위험성'.

그 중도에서 중심을 잡는 것의 어려움이 이것이다.

 

엘리야는 놀라운 영적 능력을 발휘한 후

극도의 좌절을 느꼈다.

누구도 설명하기 힘든...

그러나 '영적 인 추구를 해나가는 ' 선택받은 자들이 걸을 수 밖에 없는 과정.

 

 주님의 세미한 소리를 듣는 능력.

그 세미한 소리가 의미하는  영적 평강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

세미한 주님의 소리를 사모하는 지혜.

세미한 주님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영적 평온함.

 
 
13.  엘리야가 듣고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우고 나가 굴 어귀에 서매 소리가 있어 저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엘리야가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우고

대단한 그 자연 현상 앞에 섰다.

서는게 중요하다.

너무 힘이 들어 손발에 힘이 하나 없을 때 조차,

죽을 것 같이 무기력할 때 조차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을 미룰 수는 없다.

모든 회복은 '하나님'으로 부터 시작이 된다.

현상으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

또 다시 기적적인 현상을 사모하여 옛날로 회귀하려는 노력은

그리 의미가 없다.

주님 주시면 기적은 일어날 것이고

아니 주시면 없을 것이다.

 

 이제는 조금 더 주님 말씀에 더 침잠해야 한다.

그 분의 말씀 안에서

'내 의지와 상관없이 춤을 추는 감정'에 따라 휘둘리지 않고 

말씀이신 하나님이

잠잠히 내 영혼에 함께 하시고

그 분의 평강으로 영혼의 지평이 훨씬 넓어지고

그분이 허락하시는 은혜와 축복과 은사가

기적이 아니고 일상의 당연함으로 함께 되어

굳이 돌이 굴러다니고 천둥 번개가 치고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지 않더라도

그리 나타나더라도

기뻐하고 자연스러워 하는 것.

 그것이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시다.

  

 
17.  하사엘의 칼을 피하는 자를 예후가 죽일 것이요 예후의 칼을 피 하는 자를 엘리사가 죽이리라 
그리하여 열렬한 노력을 하고 처절한 금식을 하지 않아도

주님의 말씀이 내 생활의 자연스러운 일부가 되어

다시 '일상에서 하나님과 동행'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뚜렷한 징조와 함께 전설처럼 내려오지 않더라도

주님의 말씀을 듣고 준행하는게 일상화 되어 가는 것.

 물질계를 살더라도 영이신 하나님이 뚜렷하게 동행하게 되어가시는 것.

 그것을 위하여

주님은 영적 은사와 기적도 허락하신 후

영적 심리적 깊은 고난을 허락하신 것이시다.

 

 
18.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칠천인을 남기리니 다 무릎을 바알에게 꿇지 아니하고 다 그 입을

      바알에게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고난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필요한 것을 아신다.

 절망이 우리를 덮고 있어도

그 절망을 넘어서는 '해결책'을 가지고 계시신 것이다.

 그 분은 엘리야의 절절한 필요를 아신다.

엘리야가 진정으로 자신의 무기력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었어도

하나님은 다 아시고 계시던 것이다.

 엘리야는 '두려워 했다'

그 두려워함은 '혼자 있음'이다.

하나님이 계시지만 그 깊은 속에는 혼자 해내야 하는 '부담감'이 었던 것이다.

주님은 '왜 내가 있는데... '하며 혼내시지 않으셨다.

다 배려 하셨다.

 

 

 나이가 들어가며

신앙 연륜도 조금씩 조금씩 더해져 간다.

나이가 들어가며 모든게 다 성숙해지면 좋겠지만

꼭 그게 비례하지는 않는 듯 싶기도 하다.

특별히 많은 영적 체험을 하고 난 후,

열렬한 주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난후,

자신의 온 정열을 다 받쳐 이게 '인생의 목적'이었구나 생각될 만큼

생을 걸고 추구했던 어떤 일들이

무사히 마쳐지고 나서 오는 그 허탈함,

그리고 허탈함을 타고 들어오는 '믿는 자로서의.. ' 개념.

 한참 열심을 보이던 믿음에 불구하고 '자녀'들이 빗나갈 때...

 그 틈을 파고 드는 '혼란'.

그 혼란 중에서도 가장 큰 혼란이 ' 주님이 ... 내가... 맞던가?' 다.

 

 의혹.

 

참으로 많은 체험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엘리야의 허탈한 무기력 처럼

사단이 비집고 들어와 초래하는 

감정적 혼란이 없으라고는 누구 장담할 수 있다는 말인가?

 

 나.

 

그래.

서서히 '그것'마져 ..

나 만이 알 수 있고

하나님 만이 아시는 그것..마져

이제는 주님이 허락하셨음을 믿을 수 있게 되어간다.

많은 우여와 곡절이 내 인생을 사로잡아

삶이 쉽지만은 않았고

그 와중에서도 정말 힘든 것은

이 놀라운 하나님을 앎에도 불구하고

그 하나님의 허락하신 것이 이렇게 시퍼렇게 내 주위에 널려 있음을 알고 있음에도

힘이 빠지려 하게하는 흔들림이다.

 그런데, 다시 한번 '엘리야'의 너무도 유명한 이 구절을 통하여

하나님은 말씀을 허락하신다.

 그 중의 위로가 이것이다.

 '감정의 이 예기치 못한 어려움' 조차도 주님이 허락하셨음이다.

 딱 떨어지게 옳고 그름을 구분하기 어려운게 사람이고

그것은 주님의 사랑이 깊으셨던 '엘리야'에게도 예외는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러면서 그 허락하심은 좌절하기보다는

더 나아지기 위해서 몸부림치기 보다는

그것마져 인정하고 주님 안에서 회복을 기대하면서

누리는 것이 중요하단 점이다.

 그 힘듦 속에서도 임하시는 하나님의 세미한 소리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어렵더라도 주님의 말씀을 사모하길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고

없는 힘이라도 주님의 말씀이라면 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렇다.

많은 경험이 있다.

굴곡이 심할 때

주님의 말씀을 붙잡기는 정말 어렵다.

마치 사단이 비웃는 듯하다.

'그래서 효과 있겠어?'

그러나 말씀을 사모하는 순간, 회복은 다시 시작이 된다.

억지로 안되면 '주님 아시지요.. ' 하면 된다.

주님을 놓치지 않으면 회복이 된다.

빨리 붙들면 빨리 회복된다.

 이제 모든 것에서 다 그러하다.

하나하나 주님 앞에서 내려놓고 해결 받아야 한다.

 

 

적용

 

1. 사람은 의지할 상대가 아니다.

  존중해주고 인정하고 참고할 상대다.

  사람을 의지함은 이세벨에 맡기는 아합의 형국이 될 수 있다.

 

2. 부끄러워 할 이유는 없다.

 엘리야 조차 어이없는 행동을 했다.

 

3. 주님 만이 해결의 답이시다.

 주님이 먹이시고

 주님이 치료하시고

 주님이 지도하시고

 주님이 기적을 베푸신다.

 

4. 말씀 세장 읽겠다.

 주님은 말씀이다.

 말씀이 주님이다.

 말씀을 놓치지 않으려는 결심을 주님은 귀히 여기신다.

 가장 사랑하는 자녀는 내  말에 집중하려는 자식이다.

 

5. 모든 것을 받아 들인다.

 어이없는 것도 주님이 허락하심이다.

 

 수영장에서 옆레인의 나보다 빠른 여성을 보며 열심히 몸에 힘주어 따라가다

지치며 불현듯 느낀 것이 있다.

' 여성이 남성보다 못해야 한다'는 미련한 고집일 뿐이다. ㅜ.ㅜ;;

 연륜이 성별을 앞설 수도 있고

 젊음이 늙음을 건너 뛸 수도 있다. '

 어이없는 주장에 붙들림은 '망상'이다.

  망상은 고난을 더 초래할 뿐이다.

 

 엘리야도 아파했다.

 엘리야의 감정반응도 '멋진 영웅의 그것'은 아니었다

 그것을 부끄러워 하지 않았음이 엘리야의 실제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 올바로 서는 자세이다.

 부족함을 인정하고 받아 들이라.

 

6. 주님은 모든 것을 다 책임 지심을 믿는다.

 믿음이 부족한 나.

 더욱 믿음이 필요하다.

 '백발까지.. 노년까지.. 다 그리하겠다.'를 믿을 수 있도록 해주소서. 주여...

 내 자식들 까지 주님을 놓치지 않고 있으니 축복할 것을 믿는다.

 

7. 주님은 쉼도 허락하신다.

 자연스러움이 흐름이다.

 흐름은 주님의 성령이 허락하심이시다.

 

8. 당당하라.

 모든 것이 다 주님이 허락하심을 믿고

 내 도덕적 성결성과 상관없이 주님을 의식하기만 하면

 난 '옳다' .. 아니.. 옳아질 것이다.

 곧........회개하고 회복할 수 있다.

 

9. 엘리야의 무기력을 묵상하자.

  엘리야의 회복을 묵상하자.

 

10. 주님은 식물을 주신다.

 식물도 구하자.

 

11.  기뻐하라.

 주님은 자유다.

 그러니.. .기뻐하라.

 그것을 알고 인정할 수 있는 내가 감사하지 않은가?

 그보다 더욱 큰 축복이 또 어디 있던가?

 

 

기도

 

주님.

엘리야의 대 성공 후의 이해할 수 없는 감정적 혼란을 보고 있습니다.

오래된 묵상의 결과들로서 그 감정의 흐름에 대하여 잘 이해하고 있으나

특별히 오늘 관심이 가는 부분은

감정적 혼란이 엘리야 같은 분들에게도 있을 수 있음과

그러함을 그리 부끄러워하지 않으심과

그 과정에서도 주님 하나님은 여전히 변개치 않으시고

그를 먹이시고 안으시고 인도하시고

세미한 음성을 주시고

동행하시어서 그를 다시 회복시키심을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그 기적으로만 하던 엘리야님의 영적 역사에

하나님과 하나되어

동행하는 믿음의 성장을 보게 하고 계십니다.

 예.

혼란이 많았고 아직도 혼란합니다.

저 혼자 만의 내적 혼란을 정비하고 나니

관계의 혼란은 어찌 힘든지요.

더욱 힘든 것은

실은 그보다 더 빨리 회복하게 하시는 원동력은

하나님을 신경씀에 있음을 다시한번 확인하고 있습니다.

주여.

감사합니다.

진실의 눈을 뜨고 하나님을 제 인생의 삶에 받아들이고

주님의 뜻에 맞추어

일상의 부족하고 버걱거림을

하나하나 정리하게 해주심을 느끼니

얼마나 얼마나 감사한지요.

 참...

저는 축복 받은 자 중에서 더욱 더 축복 받은 자임을 깨닫고

감사함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믿는 길이 얼마나 크고 넓은 지 놀라고 있습니다.

마치.. 산을 넘으면 또 산이 앞을 가리는 것 같이..

그럼에도 그 산을 나 혼자 건너지 않게 하고 계심을

이제 이 만큼 많은 길을 걸어오고 나니 느끼고 있습니다.

아.

제가 잠시 보지 못했지만

절 인도하시는

제 인생의 동반자이신 하나님...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있었음을 이제야 다시 한번

세미한 소리로 체험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제가 아는 모든 자들 주님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소서.

제 자식들, 이 비밀 진실로 깨달아 주님 안에서 하나되게 하소서.

 

주여.

귀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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