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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와 엘림을 넘어( 출 15:22-27 )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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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와 엘림을 넘어( 출 15:22-27 )

주하인 2008. 4. 22. 11:42

 제 15 장 ( Chapter 15, Exodus )

 

 주님 앞에

꽃같은 삶을 살수 있길..

 


22.  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길을

      행하였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 
 3일 길을 걸어 사막을 헤맸을 때

얼마나 힘들었을까?

아니,

사막을 물없이 3일 간 헤맬 수 있었던 것은

홍해의 기적을 맛보았기에

그 여운이 남아 있기에

그나마 가능한 것이다.


 
23.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오아시스를 발견하였을 때

그 환희는 어떠했었을까?

 그 엄청난 행렬 속에 흐르는

'물을 발견했다'는 탄성이 얼마나 대단했었을까?

 

 그러다가

그 물이 쓴 물이라는 것이 알려지며

온 군중 속을 '실망'의 느낌이

쏜살같이 흘러

모든 사람이 다 알게 되었을 때

그 모습은 또 어떠했을까?

 

 
 
24.  백성이 모세를 대하여 원망하여 가로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

  기적을 본 사람들이

3일 만에

그 감동이 왜 없어졌을까?

실은 의문이 아닐 수 없기는 하지만

나도

주님의 은혜를 맛보고 체험하고서도

까맣게 잊어버리는 것은

그들과 하등의 차이가 없음을 알기에

저들이 꼭

특별한 죄인 만은 아님을 알수 있다.

 

 그렇다면

이토록 놀라운 체험을 하고

주님의 강렬한 임재의 기운 안에서

눈으로 보고

현실로 출애굽해 있는

자신들의 상황을 잘 알면서도

이 어리석은 죄악의 다람쥐바퀴 같은

돌고 돔은 과연 어찌 된 일인가?

 

  차이는 이런 것 같다.

 

출애굽의 이유와

그 안에 임재하시는 주님의 뜻과

군데군데

그 분의 흔적을 틀림없이 보여 주심을 근거로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확신한 후

그 분이 내 인생에 원하시는 게 무엇인가

늘 생각하고

주님의 뜻 안에서

확고 부동한 '삶의 이유'를 깨달은 자들이라면

홍해의 기적 다음

겨우 3일 안에

이러한 고통을 허락하신 것은

그 이후에 또한 어떠하신 의도가 있으심을

의심하지 않게 되었을 것이다.

당연히도...

그렇다면 마라의 물은 쓰되 참을 만 했을 것이다.

 

 그러나,

200여만 군중 속에

자신의 존재를 파묻고

출애굽도 끌려서

홍해 바닥을 단지 신기해 하면서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현재의 삶에만 충실한 사람들,

정체감

인생의 목적

삶의 이유

주님의 뜻...  등에는 전혀 생각을 해볼 이유를 느끼지 않는 사람들은

당연히

뜨거운 사막의 태양이 견디기 힘들 것이다.

그들에게 마라의 물은 절망일 뿐

아무것도 아니었을 것이고..

 

 견디기 힘든 것은 누구나 마찬가지지만

이들은 견디기 힘든 상황에만 집중하고

위에 소명 내지 의미를 찾는 자들은 상황 뒤의 뜻과 그 이후의 축복에 대하여 집중하게 된다.

 둘은 큰 차이를 보인다.

하나는 '아무리 큰 기적을 보아도 고통이 있으면 무조건 불만'이지만

다른 한 부류는 '고통이 있어도 감사하고 다가올 축복을 기대하는 자'들이다.

 


 
25.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지시하시니 그가 물에 던지매 물이

     달아졌더라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새
 
  후자의 부류인

모세에게 주님은 답하신다.

 '한 나무'

영어 성경에는 '나무 한조각'이라 나와 있다.

아마도

마라 근처에 말라 부러 뜨러져 버려 있는

쓸모없는 나무 조각 이었을 듯 싶다.

 이 나무를 물에 던지니

물이 변해서 달아 졌다.

 

 참 이상도 하다.

왜 한조각 나무일까?

굳이?

 혹시 , 주님은 우리에게 아무런 희망도 없을 곳에서

단물을 보이시는

당신의 능력을 보이심으로

희망없을 곳에서

희망을 가지도록 보이실 목적은 아니실까?

 

 다른 방법은 없으신가?

 모세가 손을 높이 들어 축도하고 나서 손을 아래로 내리면

황금빛이 확~돌며 물이 바뀌는 멋진 '이벤트'를 보이신 후

물이 변하면 또 다르지 않을까?
 왜 하필 나무가지 던지시는 거로 그리 하실까?

무엇을 보이시려는 것일까?

 

 

시험하실 새 '라는 구절에

의미가 있지는 않으실까?

 

 위에 나누었던 두 부류에

못 마땅한 심성을 가진 자들에게

그들이 바라는 대로

멋진 모습의 축복은

그들에게 옅무른 신앙으로 굳어지고

신비주의로 빠질까 경계하시던 것은 아니실까?

 

 3일의 훈련과

늘 주위에서 찾아볼 수 있는

기적과 먼 것으로

기적을 보이심으로

덜 신비적인 모습을 통하여

신비적 기대와 의지하려는 무기력감을

배제하시려는...

 

 

 


26.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아니...

어이가 없는 상황이 아니신가?

목이 말라 죽을 상황에

이제 겨우 물을 꿀같이 먹고 있는 데

계명 말씀하시고

치료 말씀 하신다.

 

'치료하는 하나님'

 

웬 뜬금 없으신 말씀이신가?

 

아침에 한 묵상은

너무도 유명하고

너무도 분석이 잘 되어 있는 구절의 연속이라

오히려 힘이 들었다.

 거기에

치료하는 하나님이시라니...

 

하지만

눈을 들어 멀리 보지 못하고 하루의 삶에 찌들리는 자들과

비교되는 모세 같은 분들의 차이가

치료가 필요한 영역이 아닌가 싶다.

 

 영적인 치료

 

 삶을 살되

주님을 위하여 살고

세상을 살되

천국의 삶을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냥 이 땅에서

한몸 편하고

몸의 반응이 가장 우선하는

말초적인 삶을 탈피하여

영적인 나라

그 영원한 나라를 염두에 두기 시작하는 삶을 살기 시작하기 위한

치료 !

 

 출애굽은

불신자의 삶에서 구원 받은  기독교인을 상징하고

그 후의 요단 강을 건너기 까지는

지속적으로 영적인 성화를 상징한다.

 

 첫 만나는 시험은 '마라'다.

예수님 영접하고

첫 4개월 간 나는  날아다녔다.

둥둥..

그리고 나서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불평도 많이 했었다.

그러나, 돌아보면

그 모든 것이 주님의 사랑 탓이었음을 알 수 있다.

내 속에 근 40년간을 불신의 삶 속에

자리 잡은 모난 부분들을 정으로 깨듯이

하나하나 깨뜨려 가시는 과정..

 우리는

출애굽 하지 않고는

즉,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에 의하지 않고는

인생의 과정

성화라는

이름 조차 붙힐 자격이 없다.

 

 예수님 영접하고야

이제 주님이 본격적으로 내 인생을 치료하시는 것이다.

 


 
27.  그들이 엘림에 이르니 거기 물샘 열 둘과 종려 칠십주가 있는지라 거기서 그들이 그 물 곁에

     장막을 치니라

 

 그렇다고 인생에 고난 만 있는가?

 

위안도 있고

쉼도 있다.

 

그게 엘림이다.

 

주님은

성난 망아지 같은 내 인생에 당근과 채찍을 통하여

갓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 같이

틈만 나면 원망하고 거친

내 영혼에

마라와 엘림을 통하여

연단의 과정을 완성해 가신다.

그 분은

그것을 '치료하신다'라 표현하셨다.

 

 

 

적용

 

1. 치료하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은 내 앞에

마라와 엘림을 허락하셨다.

 고통과 위안은 모두

내 영적 치료와 성화를 위해 주님이 허락하신 도구일 뿐이다.  

 

 

2.  마라처럼 쓴 물도 기도하면 단물로 변했다.

 기도만이 살길이다.

고난은 기도로 이겨낼 수 있다.

 

3. 넘푸른 바다를 땅을 밟고 지나갔듯

 마라도 나무 조가리 하나로 단물로 변했다.

 주님은 우리의 예상을 넘어 서시는 분이시다.

 근심도 걱정도 할 이유가 없다.

 

 

4. 원망 금지.

 입조심하겠다.

 

5. 고난이 오면 그 이후의 축복을 보자.

 너무 슬퍼할 이유도

너무 기뻐할 이유도 없다.

주님은 나에게

고난이 올 때

그 고난을 넘어 보는 눈을 가지시길 원하신다.

 

 

6. 성경 여섯 장 읽겠다.

 

 

기도

 

주님

한동안 놀랍도록 평강을 누리다가

이제는 되었다 생각할 즈음에

다시 옛 감정들이 떠올라

저를 혼란하게 할 때가 있습니다.

나름대로 영적 훈련이 되어 있던 터라

잘 대처는 하고 있지만

불현듯

이게 쓴물을 들이킨 듯

속이 상할 때가 있기도 합니다.

그럴 때

몸에서 힘이 쭉 풀려나가기도 합니다.

피곤하기가 말도 못하게 되기도 합니다.

이게 마라 인줄

이제는 압니다.

마라 인줄

눈치 채는 시간 간격이 짧아진 것이

그나마 다행입니다.

마라는 힘들지만

그 마라 다음에

엘림이 있음도

잊지 않게 해주심을 감사드리나이다.

예.

그렇겠지요

마라와 엘림을 거치다 보면

언젠가는

주님이 예비하신

그 요단강을 넘어설 시간이 오겠지요.

 

마라에서도 속상해 하지도

엘림에서 오래 머물지도 않겠나이다.

그리하겠습니다.

그리하게 도우소서.

제 머물 곳은

마라도 아니고

엘림도 아님을 압니다.

힘주소서.

치료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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