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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과 연합한 감동으로 또하루 살아내기[렘50:1-10]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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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과 연합한 감동으로 또하루 살아내기[렘50:1-10]

주하인 2024. 8. 14. 00:17

부제 ) 불현듯 찾아 오고야 말 감동의 그날 그때

          지금도 우리를 언약 가운데 지켜보신다

          지금 내가 해야할 일, 주님과의 연합

(펌)

내게 필요한 것.

주님과 연합하기

주님 안에 거하고

내 안에 주님 거하게 하시기

 

내가 기대해도 될 것.

내 거하는 곳 어디든지

감동으로 터질듯한 이벤트가

언제든 가능하다는 것

그리고 그 기대는

현재의 상황과 아무 상관없어도

무방하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사는것

 

내 오늘 사는 삶의 태도는

더 기도하고

더 기대하고

더 기다려도 될

고요하고 잔잔한 초연함 유지

 

그 모든 것

내가 말씀 앞에 서 있고

그 말씀을 통해 주님이 임재하시고

그 주님의 임재 가운데 살아갈 수 있음이

진정한 원리이고 사실임을

인식함으로 시작된다는 것을

오늘도 깊이 인식하고 살아가기

 

1 여호와께서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바벨론과 갈대아 사람의 땅(NIV; Babylon and the land of the Babylonians)에 대하여 하신 말씀이라

 바벨론.

갈대아(아래에 #1.로 정리해 놓았다.  갈대아와 바벨론은 거의 같은 의미로 씌이기도 하고, 갈대아는 남 바벨론으로 바벨론을 통일한 '신 바벨로니안 왕국'이기도 하다.  그래서 NIV에서 Babylonians라고 갈대아인을 표현했다. 현대의 이라크. )땅..에 대한 예언.

 

 애굽을 무릎 꿇리고 

이스라엘을 멸망 직전까지 이끌어가며 

유다백성의 상당수를 포로로 끌고 갔던 

그 시대 고대 근동의 절대 강국.

 

2 너희는 나라들 가운데에 전파하라 공포하라 깃발을 세우라 숨김이 없이 공포하여 이르라 바벨론이 함락되고 벨이 수치를 당하며 므로닥이 부스러지며 그 신상들은 수치를 당하며 우상들은 부스러진다 하라

 그 나라가 또 다른 예상치 못했던 신생강국,

메대, 페르시아(역시 아래에 #2.에 정리 해 놓았음..현대의 이란) 에 의하여

'무혈입성' 형식으로 파멸 당했다고 나온다. 

 

 그리고는 

 

4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 날 그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돌아오며 유다 자손도 함께 돌아오되 그들이 울면서 그 길을 가며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구할 것이며
5 그들이 그 얼굴을 시온으로 향하여 그 길을 물으며 말하기를 너희는 오라 잊을 수 없는 영원한 언약으로 여호와와 연합하라 하리라

'그 날 그때에'

포로로 잡혀갔던 유다 자손,이스라엘 자손들이 

'울면서 그 길'..

고향으로 돌아오는 그길을 

감동의 눈물로 돌아오며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구할 것'을 말한다 .

 

 무엇인가?

무엇을 보이시는가?

 

 절대 강자들.

절대 강자의 국력,

그 세상의 기준으로 보아 도저히 불가능할 것이라 (그 안에 포로로서 갇혀서 판단하면 어찌 안그렇겠는가?  지금이야 온통 발전한 정보 기술 때문에 '지정학적'으로 웬만하면 쉬이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지구촌 시대이지만... )

단 한톨도 생각조차 할 수 없던 

그 상황에서 

갑작스레이 이루어진 '귀향길'이라니... 

 

 얼떨떨 하던 상황에서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오는 것은 '눈물'과 '울음'과 '감사' 뿐이지 않겠는가?

 

 이 표현이 가슴을 친다. 

'잊을 수 없는 영원한 언약'으로 란다 .

 

 그렇다 .

하나님의 언약.

하나님이 우리에게 일방적으로 하신

''사랑의 약속' 

그 언약은 영원하시다. 

그것을 우리는 

나는

너무 일상에서 쉬이 잊고 살아가고 있음이 문제다. 

 

 하나님이 '언약'으로 

우리를 구원하신것.. 

예수께서 이땅에 육신을 입고 십자가에 달리신

그 놀라운 구원의 언약이 아니었더라면

과연 내가 

지금의 내가 있을 수나 있겠는가?

굳이 '영원 영생의 구원'을 염두에 두지 않더라도 말이다. 

 

 그 감동을 

우리는 너무나 쉽게 잊고 산다. 

 그것은 '잊을 수 없는 영원한 언약'이시다. 

그러함에도 '포로'생활 하게 되는 것.. 

그것은 철저히 우리의 '죄' 탓이다. 

회개하지 못하는 죄.

무엇보다 '감사하지 못하는 죄'.. 

이 포로 생활같은 현실의 각박함 마져 

하나님의 허락하심으로 살아 있음이다. 

감사보다 좌절,

좌절이 깊어 무기력하고 소망하나 없이

그대로 현실에 묻혀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우리'를 

그냥두지 않으셨던 것이다. 

 그분은 '잊을 수 없는 영원한 언약' 가운데

지금도 우리를 지켜보고 계심이시다. 

 

 그렇다면 지금의 나.. 는 어떠한가?

이들처럼 '감동의 상태'.. '포로로 풀려난 상태'인가?

 

 당연하다 .

난.. '주님 예수그리스도의 철저하신 십자가 은혜'로 말미암아

포로에서 풀려난 상태다 .

그런데.. 왜 저러한 눈물의 감동,

갑자기 풀어지는 '회복'의 징조들이 없는가?

 또다시 밀려오는 영적 전쟁 가운데 있기에 그렇다 .

광야 연단에 있어서 그렇다 .

 

 그렇다면

오늘 말씀대로 

'잊지 못할 영원하신 언약의 감동' 은 어찌 받아 들여야 하는가?

 내 부족함을 회개하고 더 돌이키고 더 힘써

내 자신이 

절대 강자이고 철벽일 듯한 

현실의 벽에서 

완전한 하나님의 손길, 기적으로 

다시금 '감동'으로 

그 감동의 마음의 상태로 변하길 기대하고 

전신 투구해야 하는가?
그런 감정 회복시켜 달라고...?

 

 그것도 맞다 .

하지만... .

풍랑 밤바다의 조각배 속에서 마주한 

그 절대절명의 풍랑 속 제자,

유라굴라 풍랑 바다 배 안의 '사도바울 일행'들의 

외침과 기도의 간구의 방향과는 다르게 

더 바라심이 있으심이다. 

 

'감동'도 좋고 

'회복'과 

'풀려남의 나른한 안전감'도 좋다. 

당연하다. 

하지만.... 본질은

그 속에서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함께 하셨음을 인식' 하는 

그래서 '풍랑'이나 '고난'.. '두려움'..........의 여부보다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음'.. 

'주님의 영이 내 인생의 배 안에 같이 계심으로 안심' 함이 

더 확실한 목표가 아닐까?

 오늘 말씀처럼

'여호와와 연합하라'심,

하나님 안에 내가 거하고 

내 안에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언제나 깨닫고 인식하여 

영혼 깊숙이 갈무리 되어

'풍랑'이 밀어치는 밤바다도.. 

'갑작스레이 밀려오는 대 격변의 충격 '속에서도

'감동'은 유지하되

극단의 눈물과 극단의 두려움과 혼란으로 

롤러코스터 타는 감정의 회오리 안에 갇혀

이게 과연 신앙인지

내 심리의 왜곡인지 알수 없을 정도의 

그러함은

주께서 굳이 기뻐하지 않으실 수 있음을 인식하는

그러한 성장된 '믿음'으로의 준비............

그것을 주께서 오늘 

이 말씀을 투영시켜

내 안을 밝히 보여 주심이시다. 

감사하다. 

 

 주님.

늘 그러시지만 

주님 말씀을 들으면

마음이 훨씬 밝아짐을 느낍니다. 

 

저 포로되었다 갑작스레이 '귀향'길에 오르는

'유다의 포로되었던 자들의 감동'을 봅니다 .

절대 '일상, 현실'에 갇혀 자포자기의 심정 비슷이 살다가

한번도 상상해보지 못했던 꿈같은 일을 마주하며

'극도의 감사'로 

시가 입에 서 튀어나오고

찬송과 찬양의 노래가 

영혼 깊숙이서 튀어나오며

그 신앙의 일시적일 것이나마 (아.. 우리는 압니다. . 주여.. 끝까지 돌이키고 유지하지 못함을요.. 죄송합니다. ) 회복과 돌이킴을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임재의 결과로 벌어지는

그 내면의 깊은 고백,

여호와와 연합하라는 선언들이 이루짐을 봅니다. 

 

그렇습니다. 

주여.

저 감동은 깊이 공감하고 마음에 갈무리 할 수 있길 원합니다. 

그리고 그러나 선후가 바뀌지 않게 하소서.

 

주님과 연합되어 사는 영혼의 상태로

이 땅, 

이 바벨론 포로, 출애굽 전의 포로 상태와 비슷한 

이 일상에서 '광야의 연단'을 

거쳐나가고 있는게

이제의 '저희'의 모습임을요.. 

  

 감동과 전율의 기쁨으로 

영혼 깊숙이 터져나오는 감사의 외침도 좋지만

그 우선에

'하나님의 함께 하심'.. 

내 영혼의 배 안에 함께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

성령으로 

하나되는 삶을 놓치지않고 

세상을 살다가

마침내 주어지는 

당연하신 '주님 언약, 영원히 잊혀지지 않는 언약'의 이루어짐을

목도하고 

깊이 감사하며 

그 당연한 감사에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같이 흘러가는 

그런 자 되게 하소서.

 

더 시간이 필요하고 

더 성장이 필요할 줄 믿습니다 .

앎에 대하여 

더 깊은 깨달음을 허락하시고 

그 말씀을 근거로 한 '감동의 에너지'가 

오늘도 또 제 영혼의 한자락을 넓고 깊게 다지시어서

한걸음 더 성장하여 출근하고 퇴근하는 하루 되길 기대합니다. 

 

거룩하고 귀하신 하나님

내 안에 연합하고 계실 내 구주 예수님

성령 하나님의 

삼위일체 완전하신 연합을 

진정 감사하고 찬양합니다. 

 

거룩하고 귀하신 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바벨론과 갈대아, 그리고 메대 페르시아)

 

#1. 바벨론과 갈대아

   : 긴밀한 관계 속에서 변화된 의미

 

바벨론갈대아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역사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서로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었지만, 역사의 흐름 속에서 그 의미가 변화하고 결국에는 거의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갈대아의 기원과 의미 변화

  • 원래 의미: 갈대아는 원래 메소포타미아 남부 지역, 특히 신바빌로니아 제국의 지배 세력이었던 반유목민 부족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 의미 확장: 신바빌로니아 제국이 강성해지면서 갈대아인들이 바빌로니아 전역을 지배하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갈대아'라는 말이 바빌로니아 전체를 가리키는 말로 확장되었습니다.
  • 학자 계층으로의 의미 변화: 갈대아인들은 천문학, 점성술 등 학문 분야에서 뛰어난 능력을 보였기 때문에, '갈대아 사람'이라는 말은 학자나 점성술사를 지칭하는 일반적인 표현으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바벨론과 갈대아의 관계 요약

  • 초기: 갈대아는 바빌론의 일부를 차지하는 부족이었습니다.
  • 신바빌로니아 제국: 갈대아인들이 바빌로니아를 통치하면서 갈대아와 바빌론은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 학문적 의미: 갈대아는 학자, 점성술사를 지칭하는 일반적인 표현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왜 중요한가요?

바벨론과 갈대아의 관계를 이해하는 것은 성경을 비롯한 당시 역사 기록들을 정확하게 해석하는 데 중요합니다. 특히 구약성경에서 '갈대아 사람'이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는 단순히 한 민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당시 시대의 문화적, 사회적 배경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합니다.

예시:

  • 성경: 다니엘서에서 '갈대아 사람'은 바빌론의 학자이자 점성술사로 등장합니다.
  • 역사: 바빌론의 함무라비 법전, 천문 관측 기록 등은 갈대아인들의 높은 학문 수준을 보여줍니다.

원본: Gemini  , 2024. 8. 13.

 

 

 

#2. 바벨론의 멸망, 메대 페르시아

예레미야서 50장 3절에서 언급된 "한 나라"는 **메대와 페르시아**를 가리킵니다. 이들은 북쪽에서 내려와 바벨론을 공격하고 멸망시켰습니다¹.

역사적으로, 바벨론 왕국은 기원전 539년에 **페르시아 제국**의 **키루스 대왕**에 의해 정복되었습니다. 키루스는 바벨론을 거의 무혈입성으로 점령하였고, 이 사건은 바벨론의 멸망을 의미합니다⁷.

현재 바벨론은 **이라크**에 위치해 있습니다. 바벨론의 유적지는 이라크 바그다드 남쪽 약 80km 지점에 위치해 있습니다¹¹. 한편, 메대와 페르시아는 오늘날의 **이란**에 해당합니다¹³.

이 외에도 궁금한 점이 있으신가요? 다른 성경 구절이나 역사적 사건에 대해서도 질문해 주세요!

원본: Copilot과의 대화, 2024. 8.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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