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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를 아는 자의 자유로움[요7:1-13]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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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를 아는 자의 자유로움[요7:1-13]

주하인 2013. 1. 20. 10:14

 



1. 그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다니시고 유대에서 다니려 아니하심은 유대인들이 죽이려 함이러라

 예수께서 '피하신다'

유대인들이 죽이려 한다고 피하신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인간이 죽이려 한다고 피하신다.

 

 

4.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하니

 제자들은 당혹스러워 한다.

늘 그 분이 세상에 나타내려 하시는 일을 안다고 생각했는데

그 분이 숨어 다니신다.

부끄럽고 놀라운 일이다.

 

 

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

 그런데 그 분은 부끄러워 하지 않으신다.

아마도 '담담히' , 예의 그 부드럽고 포근하면서도 거부할 수 없는 음성으로 그러셨을 것이다.

'아직 내 때가 아니다.

너희 때는 늘 준비 되어 있다 .'

 

그것.

무슨 이야기시던가?

예수님은 

당신이 누구신지 , 무엇을 하려 오셨는지 , 지금 어느  상황인지 확실히 안다는 이야기다.

그러기에 세상의 소리,

가까운 자들의 약간은 질책이 담겨 있는 소리,

의혹의 소리를 듣고도 아무렇지 않으시는 것이시다.

당당하시다.

그렇다.

그 분은 '때'를 아시는 것이시다.  

 

 한편 제자들에게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신다.

아니...

나에게 하시는 말씀이신 듯하다.

' 주하인, 너희 때는 아무 때나 준비되어 있다.'

이것..

나의 인간적 한계에 의하여

어쩌면 온전히 '내 때'를 앎에 장해가 있을지 모르기에

온전히 내가 나의 누구임과 내 때를 모르더라도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허락하셔서 인도하실 것이란 이야기시다.

 

 그렇다.

어떻게 언제 어디서 행동을 하더라도

모두 하나님의 뜻에 따라 달렸다

나의 의지와 행동과 내 성장의 정도는

그 모든 변수 , 나의 성장 정도와 하나님과의 관계와 시기.. 에 의하여

시나리오가 달리 그려져

이루어지는 시간과 고난의 강도, 성화의 정도는 당연히 달라지겠지만

모두 주님께서 '선'으로 이루어 주실 것이란 이야기시다.

감사하다.

그래서 좀더 삶이 가볍다.

어떤 행동, 어떤 실수, 어떤 미련한 짓을 해도

주님 말씀 가운데 거하려는 의지와 선택만 있다면

주님은 나를 무조건 '선한'방향으로 인도하시고

결국 승리하게 하실 것이란 이야기시다

부끄러워 할 이유도

두려워 할 이유도 없다.

오직 감사할 일이다.

모든게 '내 때는 어느때나 가능하다'라시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가능하다.

 

 

10.그 형제들이 명절에 올라간 후에 자기도 올라가시되 나타내지 않고 은밀히 가시니라

 주님은 그처럼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아시기에

남들은 명절에 떠들썩하며 자유롭게 올라가도

'은밀히 '올라가시는 

요즘 말로 '쪽'팔리고 체면 구기는 행동을^^;;; 당하시면서도

당당히 하신다.

' 아직 '하나님의 때'가 아니시기에 난 당당하게,  은밀히 간다"

그게 오늘 예수님이

나에게 보이시려는 '레마'다.

 

 나에게 이런 상황을 대입하면 난 .. 좌절한다.

우선 그들이 미워지려 한다.

나 .

좋은 일을 하려 이곳에 왔다.

그런데 저들은 저렇게 미워한다.

'내가 왜.. ???' 하며 항변하고 미워하고 싶다.

그리고 '난.. 하나님의 권위로 이곳에 왔으니 대우해달라'고 세상에 소리소리 치고 싶다.

그래도 알아주지 않는 저들을 저주하고 싶어질 것 같다.

또 , 그러면서도 절대로 그렇게 받아주지 않을

이 세상의 풍조에 대하여 절망하고 저주하고

나의 이렇듯 거대한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세상에 왔으면서도

이렇게 은밀히 숨어다닐 수 밖에 없는

내 초라함이 너무 부끄러웠을 듯 싶다.

 

 저주와 부끄러움.....

아무렇지 않음과 당당한 은밀함...

그것이 내가 '주님께 진정 배워야 할' 태도이다.

 

아..

그 차이는 내가 하나님과 같지 않을 너무너무 당연한 이유를 제외하고도

모두 아직도 죽어지지 않은 이 강력한 '자아' 탓이다.

자아를 십자가에 못박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도 싱싱하게 자아가 살아있다.

이.. 버거운 자아를 어찌해야 하는가?

 

우리 예수님은 행간에 답을 숨겨 놓으셨다.

'네 때는 언제나 가능하다. '

그렇다.

그래서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게 아니시던가?

당신의 모습,

당신의 하나님께 대하여 고정된 모든 생각,

하나님 안에서 당신의 위치가 어느 정도인지 아시고

그래서 당연히도 무엇을 해야할지 아시고 (십자가)

그때가 아직도 도달하지 않았음을 너무 당연하게 아시기에

세상의 썩어져 갈 불신의 덩어리들이

아무리 '아웅하고 다웅하여도'

세상의 원리 속에서 흘러가시는 것이시다.

그들의 체제를 말씀 한마디로 명령하시어

세상에 불칼을 가진 천사로 쓸어버리고

당당히 예루살렘으로 멋지게 입성해도 되실 것을

그냥 숨어 올라가시는 것이시다.

아.

이 흐름.

이 때를 아는 흐름.

그래서 부끄러워 할 수도 조차 없는

이 당당한 흐름을 배우길 원한다.

 

오늘 '안식'일이시다.

하나님 안에서의 진정한 안식.

이 부끄러울 수없는 당당한 흐름에 대하여

아침에 이렇게 말씀을 허락하신다.

 

그래야 나..

부끄러워 하고

부끄럽게 하는 자들을 미워하고

그런 내 자신을 속상해 하지 않고

주님 안에서

진정한 평안과 안식 가운데

자연스럽게 흐르는 하루가 될 것이다.

아니..

온전한 일생이 되리라.

묵상할 일이다.

기도할 일이다.

감사할 일이다.

 

 

 

귀하신 내 하나님

오늘은 부끄러워 하지 않으시는 예수님을 봅니다.

얼마나 자신을 낮추시는 지 숨어 다니시며 은밀히 올라가시는,

세상의 흐름에 자신을 맞추어 낮추기까지 하시면서도

자신에 대하여 하등 흔들림이 없으신 예수님을 봅니다.

세상을 미워하기는 커녕

단 한점의 감정의 혼돈이 보이지 않으시는

흐르시는 예수님의 고요한 행태를 뵙고 있습니다.

주여.

세상 뿐 아니라 심지어는 제자들까지

너무도 당연한 말을 합니다.

그러심에도 불구하고 흔들리지 않는 예수님.

저도 주님을 닮고 싶습니다.

자꾸 이유없이 ..

아니 이유를 아는 부끄러움이 저를 잡으려 합니다.

주님.

부끄러움 뒤에 그들을 향한 속상함과 미움이 드리워지고

자신에 대하여 좌절이 있으려 했습니다.

아직 내 자아가 시퍼렇게 살아 있음임을 깨닫습니다.

주여.

간절히 비옵건데

주님 안에서 제가 누구인지

주님 안에서 오늘 어떤 모습으로 행하여야 하는지 아는 제가 되게 하소서

그래서 부끄럽고 밉기 보다는

아무렇지 않고 자연스러운 제가 되게 하소서.

제 주여.

절 붙드시고 성령으로 이끄시어

아무런 형상도 만들지 않게 하소서.

내 하나님이시여.

제 하나님이시여

날위해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사랑하신 내 하나님.

절 붙드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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