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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러나지 않아도 기뻐하다 (마 21:1-11 )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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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러나지 않아도 기뻐하다 (마 21:1-11 )

주하인 2010. 3. 3. 13:29

제 21 장 ( Chapter 21, Matthew )

 

어느새

봄은 가까이 왔습니다

 

우리가 노력하지 않아도

봄은

바로 근처에 있었습니다

 

칭찬

받으려 노력하지 않아도

주님은

아시고 계시리라 압니다

 

내 사랑

주님

그 놀라운 분에 대한

나의

순종의 마음을 말입니다

 

주님

당신의 인도하심 따라

더 인내하고

더 기뻐하게 하소서

 

나도 모르는

내 겸손이

당신의 향기를

드러내는 하루가 될 수 있길

간절히 바랍니다

 

 

 

 


1.  저희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2.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너라

  예루살렘성.

제자들의 환상적인 기대에 의하면

멋진 입성이 기대될 바..

 드디어 예수님, 그 위대한 스승께서 입성 준비를 위하여

제자 둘 - 왜 둘인지 잘 모르겠다 .     한분이면 충분할 일을... - 을 보내서

타고 멋지게 들어가실 '말.................' 이 아니고

'나귀..............' 를 끌고 오라 명하신다.

 

 두제자.. 명령을 듣고 가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기왕이면 나귀보다는

 백말을 가져오라 시면 낫지 않으실까?'

'그래도 주님은 무슨 뜻이신가 있겠지..

 설마 ...'

 

 

 나귀와 나귀 새끼.

묶여 있는 나귀와

곁에 놀고 있는 나귀 새끼'

 나귀를 끌고오면 나귀 새끼가 따라 올 것이다.

구약의 '궤'를 지고 오는 암소와 새끼가 생각이 난다.

 분위기가 잘 맞지 않는 나귀.

거기에 묶여 있는 나귀와 그 새끼.

 

 
3.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분위기 상

내용의 진행상 잘 맞지 않는 이야기가 또 있다.

 

 얼굴이 들어나지 않는

나귀의 주인.

갑자기 나타난 두 남자로 부터

나귀와 나귀새끼를 강탈 - 강탈당하는 분위기가 맞다 ^^;;- 당하자

그것을 만류하고 제지하려 할 것이고

그러자 두 사람이 '주가 쓰시겠다' 하자

온몸에 힘을 풀고 그냥 보내는...

 

 어떤 일이 그 사내에게 있었을까?

아마도 지난 밤 꿈에 천사나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내일 모시에 네 나귀를 끌고가려는 두 남자......주께서.... 하면  그냥 두말하지 말고....'

 하지 않으셨을까?

그리고 나서는 꿈을 깨고는

참 희한한 꿈이라 생각하고 있던 차

똑같은 일이 벌어지자 그냥 자신도 모르게 전율하면서

따를 수 밖에 없었을까?

 아니면 기도 중에 환상이 보여서 그랬을까?

 어찌 되었던 간에

나귀와 나귀새끼는 그 사람에게는 꽤 값나가는 자산이었을 것을

두말하지 않고 준 것으로 보아

그 분의 믿음내지 순종도 참으로 놀랍다.

 

 보이지 않는 순종자의 순종

보이지 않는 나귀 주인의 믿음이 놀랍다.

누구에게도 그가 누군지 알려지지 않았어도

그는 아마도 주님께 칭찬을 많이 받았을 것이 틀림이 없다.

 

  
5.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또 하나 걸리는 부분이 있다.

주님은 '나귀'를 두고 '나귀 새끼'를 타셨다.

왜 이실까?

겸손.

더 낮아지는 모습을 보이시기 위함이긴 해도

어미를 두고 굳이 새끼를 탄 것은

나귀 새끼에게는 너무 과도한 부하가 걸리는 상태가 아닌가?

 

예루살렘 입성을 앞두고

예수님의 행적은

겸손과 순종이라는 측면에서

교육의 목적도 있으시고

이해가 되지만

걸리는 부분이 위의 논리처럼 없지 않아 있어 보인다.

늘 그렇지만

이런 막히는 부분이 '묵상'의 포인트가 맞는 듯하다.

 

 나타나지 않는 나귀 주인.

그가 나귀를 빌려 줄 때 어떤 마음이었을까?

철저한 기쁨이었을까?

베일에 쌓인 그는 아까워 하기 보다는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는

영적으로 뛰어난 분이셨을까?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

특별히 오늘 날은 서로 자신의 이름을 나타내기 위해

나라를 볼모로 잡고 무한 투쟁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이고

종교계에서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갖은 악을 불사하는 세대인데...

 젊은 이들은 이뻐보이기 위해

성형을 마치 유행처럼 하는 세대고

이뻐보이기 위해

'안구 미백'수술까지 유행처럼하는 세대다.

그러한 사람들

자신의 이름이 들어나지 않으면

아무리 고상한 이유를 들이대도

선뜻 나서지 않는

이 자아 중흥의 세대에

드러나지 않는 나귀 주인의 순종을

어찌 감당할 수 있던가?

 

 

 업무가 끝나고

여성회관 내 장애인 복지관의 수영장으로

자유수영을 다닌다.

하루당 2500원이라 부담도 적고

아무 때나 시간이 되는 날 갈 수 있는데

바로 걸어서 20여분 거리라서 편하고 좋다.

10년도 전에 배워둔 수영이라서

이제 서서히 폼이 익혀지려하니

자꾸 경쟁심이 솟아나려 한다.

옆레인에 상급코스에서

치고 나갈 때는 나도 모르게 몸에 힘이 들어가고

자꾸만 잡혔던 폼이 무너짐을 느낀다.

물도 몇번씩 들이키고.ㅎㅎ

그러다,

아차 한다.

나이 51.

젊은이들과 비교하여 '호승심'내지 '경쟁심'을 발하는 자체가

참으로 우스운 일인데도

내 마음은 지기 싫어해서

나도 모르게 팔다리에 힘이 들어가다 보면

폼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지치기 쉽상이다.

누가 옆에서 '잘한다' , '폼좋다' 하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부풀고 ..

이 바보 같은 자아의 드러남을 느끼며

내가 바로 영적 장애인임을 깨닫고는

씁슬한 웃음을 짓는 경우가 한 두번이 아니다.

그래서 물 속에서 자꾸만

예수님을 그려보려 노력한다.

손을 움직여 가며 레인 바닥 앞에

어디에나 계신 예수님을 상상하며 집중하면

그나마 마음이 차분해지고

그러한 헛된 경쟁심이나 비교 질투에서

조금은 차분하게 된다.

그러한 나.

벌써 살만큼 살 나이인 나.

육신에서 젊음이란 빠져나간 나이의 나도

아직도 그들 젊은이들을 이겨내려는 게

스스로 생각해도 얼마나 가소로운지..

그러함에도 정신을 놓고 있으면

어느새 속상한 나, 부족한 나를 발견한다.

 

 나귀 주인.

손해를 보면서도

이름하나드러나지 않고

성별이 누구인지도 알려지지 않은 그는

순종의 참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아마도

그 분은 그러하신 분이시기에

주님은 그러한 그를 더욱 귀히 생각하고

천국에서 그의 상급 높이시려

이름 드러내주지 않으신 듯 싶다.

 

 나귀.

새끼가 예수님을 업었다.

새끼는 새끼대로 영광이지만

힘이 적잖이 들었을 것이고

어미 ,

아무리 미물이지만

어미는 어미로서 가슴이 아팠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 예수님을 업었다.

그들은 영광이고

아마도 알지 모르는 놀라운 힘이

새끼의 팔다리에 넘쳤을 것이고

그러한 위용을 보는 어미의 눈에는

이해할 수 없는 기쁨이 있을 것이다.

 

겸손.

순종.

드러나지 않음.

그러한 그들을 더 기뻐하시는 예수님.

 

아마도 이게 주님이 오늘 나에게 주시려는 메시지 가 아닐까 싶다.

 

 

기도

 

주님

감사합니다.

순종과 겸손

주님 뜻대로 받아 들이길 원합니다.

그리고 그보다 더.

나타나지 않는 자의 외로움을

주님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것으로

대신 채워

더욱 성숙한 하루가 되길 소원합니다.

그리 하게 하소서.

드러나지 않아도 기뻐할 수 있도록

깨어 있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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