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당나귀 아들들 (마21:1-11) - 추가 묵상 본문
그들은
나귀가 아니다
더더구나
그들은
나귀 새끼는 아니다
그들은
아직
주님을 업지 않은
어린 영혼일 뿐이었다
그들은
주님을 모시면
백마가 되고
기사가 될
주님의 재목들이다
그렇다
주님 만이
답이시다
그렇다
주님을 모셔들이고
주님의 임재를 사모함 만이
우리가 해야할
유일한 삶의 태도이다
그들은
사랑하는
내 아들들이다
그들은
주님이 허락하신
둘도 없이 귀한
내
가족이다
오늘은 바빳습니다.
바쁜 반면 마음은 게을렀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말씀에
깊이 고착하지 못했습니다.
문제는
그럼에도 별 마음의 부담이 없다는 게 문제입니다.
난,
주님의 말씀을
죽도록 붙들기를
간절히 바랬거든요.
그리고 그러기를
나름
서언했었습니다..
아.
다짐했었습니다.
그럼에도
이런 어리석음이
이런 게으름이
날 사로잡기 시작한 것입니다.
굴곡이 없는 자
오르막과 내리막이 없는 자
파동이 없는 세상이 어디 있겠느냐 마는
그럼에도 말씀 앞에 섬은
달라야 한다는 걸
알고 있는 내가 그런게
난 당혹스럽습니다.
그렇습니다.
그것마져 내려놓고
주님이 회개시켜 주시면 따르고
다시 일어서면 되는 원리는 알지만
그럼에도
발전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도 압니다.
쉬는 것은 죽는 것입니다.
넘어지면 일어날 수 있지만
게을러 지는 것은 어쩌면
일어나기 어려운 위험일 수 있습니다.
게으르게 겨우 마친 묵상글을
두서없이 정리하고
기도 글 올리고
얼른 '수영장'으로 향했습니다.
열심히 폼을 익히고
쉬지 않고
자유영, 평영, 접영을 마치고 나니
온몸의 근육이 느슨해지고 나른해짐을 느낍니다.
오늘이 수요일.
수요예배 있는 지 알지만
그 마져도 부담이 적습니다.
게으른 것 맞습니다.
게으른 영혼은 여지없이 낮에 고백한
비교의 마음
평가의 마음
늙은 나의 육신의 능력이 떨어짐의 속상함......
다양한 어리석음이 감지 되려 합니다.
어찌되었든
천천히 마치고 나오니
기분좋은 육체의 나른함이 몰려옵니다.
늘어져 가는 근육에 소롯이 힘이 올라오는게
마침 봄 나무 가지에 물오르는 느낌같습니다.
육신이 편하니 잠이 오려 합니다.
기도원으로 가야겠다는 마음에
걱정이 앞서게 됩니다.
가서 졸면 어쩌지?
오늘만 잘까..
그러나 올라갔습니다.
올라가는 길은
역시나
날 기다렸다는 듯이
내 기분을 어루 만집니다.
마침 올라가니 예배가 끝나고
사람들이 몰려 나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기도회가 시작이 될 시간입니다.
집중이 안될 것을 걱정했던것과는 달리
내내 난 기도에 푹빠졌습니다.
참으로 다양하게 기도했습니다.
'찬감자 중간'
언젠가 목사님 설교 중에
찬양 찬미
감사
자백
중보
간구...순으로 하라던 대로
그리했습니다.
간구는 말씀구절에 맞추어 했습니다.
아닙니다.
그대로 되었습니다.
주님의 성령이 이끄심을 난 절절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전혀 피곤치 않았습니다.
아니
잊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얼마나 내 생각을 넘어서시는 지요.
주님은 나의 기도와
나의 예배를 기뻐 받으십니다.
단 한번도,
그러고 보니 정말이네요....
단 한번도
나는 내가 피곤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했었습니다.
그렇다고 열렬히 기적적인 체험을 했거나
둥둥 떠다니는 엑스타시는 없었습니다.
그냥 줄줄히 기도가 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기억나게 하셨습니다.
이해가 가지 않던 부분.
나귀가 나귀새끼를 바라보면서
느꼈을 모성의 충격을 불문하고
예수님이
겨우 젖떼었을 그 나귀새끼를 타신 일 .. 말입니다.
그것은 내 '기우'였었습니다.
주님은 주님의 영광으로 새끼를 북돋아 주셨습니다.
새끼는 처음이지만
생전 처음 느끼는 힘이
연약한 팔다리와 힘없는 어린 관절에 모여짐을
느꼈습니다.
아마도 그 나귀새끼가 느꼈을 感은 은혜가 충만할 때,
아.. 오늘 내가 전혀 피곤치 않은
그러면서 내가 피곤치 않은게 이상하다는 사실을 인지하지도 못하고
그냥 은혜 받지 않은 것처럼 은혜가 넘치는
이러한 현상이
이 미물 나귀새끼의 팔다리에 오르지 안 했을까요?
어쩌면 나귀새끼의 주위로 하나님의 오라(aura)가
휘황히도 뒤덮었을 지도 모릅니다.
그 모습을 보는 어미 나귀는
본능적 모성의 걱정을 내려 놓고
눈을 지긋이 뜨고는
터덜터덜 예수님 태운 새끼의 뒤를 따라갔을지도 모릅니다.
전혀 영적이지 않은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어쩌면 그 모습은
우리의 어린 시절 국민학교 도덕책에 나오는
아버지와 아들과 당나귀의 모습처럼
어이없이 보였을 지도 모릅니다.
이것은 어쩌면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고
세세한 기적
세밀한 주님의 흔적
그 안의 평강 속에서
주님께 모든 것을 내려 놓고 살아가는 자들이
세상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어리석어 보이는 것과
비슷할 지도 모릅니다.
어렸을 적부터 아이들을 위해 전력투구하는
세상의 교육법으로 보면
시험 전날 주일에도 '기도'하고 '예배'드리러
교회에 나오게 하는
신실한 기독교인 가정의 모습을 보며
이상하게 보는 것과 어찌보면 다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식의 시선 말이지요 ..
그러다가 갑자기
난,
나귀 새끼가
내 자식들 같다는 느낌이 '팍~'하고 들었습니다.
아직도 어리석어 보이는 그들.
발길질 하는 게
어리석은 나귀같이 보이는 그들.
삶의 방편이 세상의 경쟁 속에 비교하면
어이없어 보이는 저들.
난, 삶이라는 끈에 묶여
아직도 깨닫지 못하는 무지의 끈에 묶여 있는
나귀고
그들은 아직도 날 독립하지 못하는
어린 나귀 새끼..
그러나,
주님이 부르시어
주님, 그 거대하신 분이 타겠다하면
내 눈에 그것은 경약을 금할 만큼 충격일 수도 있겠다는...
어쩌면 그런 마음으로
아이들에 대하여 깊이 기도하지 못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던가
하는 깨달음이 왔습니다.
그러다가
그 부러질 것 같이 약하고 가녀린 영혼의 그들 등에
주님이 타시어도
그들은 거뜬히 주님을 태울수도 있겠다..는...
주님이 주시는 힘이지
결코 내 육신의 유전의 힘과
세월의 힘이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기뻣습니다.
이제 조금 풀린 것 같습니다.
지난 금식 후 아무것도 변화 없을 것만 같았던
내 영혼이 알게 모르게 조금은 깨달음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믿음.
늘,.의혹이 많아서 잘 믿지 못했던 자.
수술 후 회복이 더디던 분을 놓고
마음이 불편했었다.
기도로 맡긴지 며칠.
아침에 만난 신경외과 닥터가 의외의 이야기를 한다.
'많이 좋아졌어요'
아니 그 며칠 전 만 해도 더 나빠졌다 하지 않던가?
할렐루야.
난 믿음의 기도를 했기에 이루어졌음을
직관적으로 알았다.
나귀새끼 아들 들.
그것은 내 눈이었다.
아직도 혼자 서지 못할 것이지 않을까
아직도 어리석다 생각하는
내 의심어린 눈이고
내 부정적인 눈이었다.
주님이 하시면
주님을 업으면
그들은 '하나님의 백마'인 것을..
왜 늘 나는
내 경험의 틀 속에서
그 어두운 경험의 폭이 얼마나 된다고
그 안에서만 모든 것을 제한하려 하던가?
주님이 타시면
주님을 모시면
그들은
그들이 아니다.
그들은
주님의 그들이다.
그들은
나귀가 아니다.
그들은
나귀의 새끼에 불과하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마다.
그들은
하나님의 기사다.
죽도록
주님을 놓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주님 말씀을 놓치지 않는 다면...
'신약 QT' 카테고리의 다른 글
권위를 인정함 (마 21: 23-32) (0) | 2010.03.05 |
---|---|
기도하는 자로 일컬음 받다(마21:12-22) (0) | 2010.03.04 |
드러나지 않아도 기뻐하다 (마 21:1-11 ) (0) | 2010.03.03 |
난 어느 길위에 서 있는가 (마 20:17-34 ) (0) | 2010.03.02 |
주님으로 앓다( 마 19:23-30 ) (0) | 2010.02.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