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단 고난 기쁜 복종[겔4:1-17] 본문
주여
여기 있사옵니다
쓰시옵소서
주께 드리는
제 복종이
꿀보다 답니다
그걸 앎이
그게 느껴짐이
제게는
가장 큰 축복입니다
주여
1.너 인자야 토판을 가져다가 그것을 네 앞에 놓고 한 성읍 곧 예루살렘을 그 위에 그리고
2.그 성읍을 에워싸되 그것을 향하여 사다리를 세우고 그것을 향하여 흙으로 언덕을 쌓고 그것을 향하여
진을 치고 그것을 향하여공성퇴를 둘러 세우고
'예루살렘'
"그것을 향하여'.....라 나온다 .
예루살렘.
무엇인가?
어쩌면 죄된 현대 사회의 도시들 같은 의미의 '예루살렘'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새 예루살렘성 같은 회복되어야 할 '천국'의 상징이기도 하지 않을까?
'그것을 향하여'... 향하여.. 향하여.....라는
하나님의 지시에서 알 수 있다시피
이 복잡하고 더러운 시대에
오직 회복해야 할 것은
우리의 영적 예루 살렘성이며
붙들어야 할것이 그러함을 암시하는 것 같이 느껴진다.
9.너는 밀과 보리와 콩과 팥과 조와 귀리를 가져다가 한 그릇에 담고 너를 위하여 떡을 만들어 네가 옆으로
눕는 날수 곧 삼백구십 일 동안 먹되
그러하시면서
어제 묵상 중에 '성령께서 일으켜세우신' 것,
그 이유가
이제 이 타락한 , 그러나 반드시 회복되어야 할
예루살렘성을 위하여
고난의 모범을 보이는 도구 , 매개체로서
에스겔 님을 쓰기 위함이심이심을 보이시는 바,
그 들의 타락(오늘날 우리들, 내 내면에 남아 있는 죄... )이 너무도 더러워
이러한 고난을 감내(堪耐, 기쁘게 인내 , 달게 인내) 해야할 것임을
보이시는 데
그 고난, 그 참아내면서 떨구어야할 죄악들이
너무도 더럽고 추악함을 볼 수 있다 .
그런데.. 희한하게도
그 더럽고 힘들고 ,어찌보면 대신 받아야할 억울함의 크기가 큼에도 불구하고
'소망이 있어'
그리 힘들어 보이지 않는
엄청나지만 '단(sweet ,감내.. ) ' 고난 같은 느낌이다.
힘들지만 감해주시는,..
그날을 감해주신다는 약속(성령의 도우심으로.. ) 말이다.
자주,
난... 고등학교 때인지 중학교 때인지 잘 모르겟지만
그 머리복잡하고 심사가 온통 가시 돋힌 때..
복종이라던가, 억압, 규제, 명령.. 이런 거에 엄청 거부감을 가지고 있던
그 때 이상히도
'한용운 (만해 스님)'의 '복종'이라는 시가 가슴에 들어오고
지금까지도 가끔 기억 난다.
오늘 또 그렇다 .
그 분..
스님이자 독립운동가라서
예수님을 복종하는 글은 절대 아님을 알지만
큰 의미가 있는 대상에게 '복종'함은
자유보다 더 큰 기쁨이라는 그 시가
아~무 문학에 관심이 없고 머리 복잡하던 그 시절의
어린 나에게
왜 그리도 가슴에 남았던지...
아래에 글을 옮겨 놓았다 .
어제 '정두언' 전 의원이 '자살'을 했다 한다
'노회찬' 의원도 자살한게 몇년 안된다.
고인에게 누가 될까봐 함부로 단언하긴 곤란하긴 하다
하지만.. 난.. 내 나이 또래의 그 분들,
그 잘나가고
나름 이 모진 세상에서
덜 공격 받으며
앞서나가는 비교적 '어른 같은'행동하던 분들이라서
더 아쉽다.
이 분들,
그 자리에 올라가기 까지 엄청난 세상적 고난과 노력이 있었을지
그것은 잘 모르겟지만
일단 그 자리는 세상 사람의 극소수에 해당하는 자리가 아니던가?
거기에 두 분 모두 메스컴 등에서 지속적으로
지혜있고 맑은 분들로 칭송을 받던.. .
그야말로 그들이 살아있던 그 당시까지는 '잘나가던 분'들이 맞았다 .
그런데 .. 왜 .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선택을 했을까?
정의원은 '우울증 있있다'한다.
노의원은 작은 돈 수수로 자괴감으로 그랬다한다.
그거..
잘 나가는 데.. 나름 올바른데
왜 그들 삶을 포기할 정도로
나쁜 선택을 해야했을까?
우울증.. 있다고 다 '자살'하나?
더더구나 나름 잘 나가던 분들이?
자괴감 때문에 자살한다면 난.. 1000 만 번은 넘게 했을 것이고
아, 나보다 뛰어난 , 청렴을 목표로 한 분들이
자신의 실수 때문에 자살한다면
그런 사람들, 옳다고 볼 수 있던가?
아.. 사회적으로 존경할 만한...
그것.. 우리 인생에 존경할 만한 것은
겉 모습 뿐,
속은 누구나 다 똑같을 개연성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세계에는 누구도 다 똑같이
'더럽고 추악하고 괴로운 권세 잡은 자들의, 사단의 ' 세상에 살고 있는 자들이기에
불완전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
그러기에........부함, 잘나감, 성공 ....그 어느 것도
부러울 것 하나도 없다는 것........
내 나이가 되면
저절로 깨달아 알게 되는 것들이다 .
그 속에 들어가 보지 않았지만
아마..돌아가신 그 분들,
자살하시는 많은 분들 (아.. CJS배우, J씨집안 대기업가, 고위 공무원 ,검사..얼마나 많았나? )은
아마 그들 속에
끝까지 목표한대로 성공해보니
남은게 하나도 없어
더 이상 살 목표와 이유를 잃은 차
그래서 방황하던 차
나이들어, 세상에 조금 덜 관심을 받는 것으로
일어설 스스로의 명분을 잃어서 일게다.
분명코..
젊었을 적에는 당연히도 젊음의 힘, 아직 나가야할 야망, 욕심이 남아
그것으로 그들 스스로 치고 일어날 힘이 남아 있었겠지만
내 나이 되어
더 이상 '소망'.. 나아갈 방향이 잃어지면
돌이키기 힘들 만큼 힘이 빠지는게 사실이다.
오늘.
에스겔님의
심지어 인분(똥, 사람똥~~ㅠ.ㅠ;;) 불을 켜서 음식먹고
징징 동여매서 390며칠을 좌로 우로 눕는
세상의 가장 힘든 고난을
그것도 자신의 잘못보다는
타인의 잘못으로 겪는 고난을 보고 있다.
그런데...
그 예언된 고난,
실제 그리 되어질 고난이
이상~히도 읽어가면서 '우울'하거나 '답답하지 않았다. '
정말이다.
그래서 '단 고난' , 소망있는 고난이 생각난 것이고
그래서 '복종'의 시가 생각나게 된듯하다.
복종
만해 한용운
남들이 자유를 사랑한다지마는
나는 복종을 좋아하여요.
자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당신에게는 복종만 하고 싶어요.
복종하고 싶은데 복종하는 것은
아름다운 자유보다도 달콤합니다.
그것이 나의 행복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나더라
다른 사람을 복종하라면
그것만은 복종을 할 수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복종하려면
당신에게 복종할 수 없는 까닭입니다.
그 분,
한용운 님은 스님이고 '님의 침묵'이란
아주 유명한 시를 남기신 분이시며
여기서 말하는 '복종'이나 '님'이란
아마도 '나라'를 의미하는 게 아닌가 싶긴 하지만
그 분의 그 복종이
예수님을 깊이 만나고서야
내 뇌리에 자주 떠오르던 것이
아마 진정한 복종에 의한
옳은 대상에 대한 바른 복종,
아.. 복종이 됨에 대한 기쁨,
진정한 자유는
예수님으로 인하여 얻은 선택된 자의 자격으로 인하여
주어주신 성령의 은혜를 통해
진정한 하나님 나라에 속하는 자의 자유.......에 대함임을
절실하게 느껴진다는게
아마
세상 그 어떤 것도
들어 쓰시는 하나님의 권세가
심지어는 '스님'의 입을 통해 지금까지 내 가슴을 자극한 탓일게다.
이 분.
에스겔 님은
철저한 복종의 모습이다.
구겨짐, 욱여쌈, .........마치 십자가 지시는 예수님의 그 굴종처럼
그리 고생을 하지 않으시던가?
'고난을 위해 우리가 구원의 자격을 받았다' 거나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 심
'고난이 유익'이라 심은
고난 그 자체보다
고난을 통해 그 고난을 순종하는 자의
감사한 감내의 기쁨을 통해서 만이
하나님의 나라에
이 불완전한 영혼을 탈피할 계기가 됨을 말씀하심이며
그 진정한 감사의 고난을
감사로
진정 받아들일 마음이 생김을 발견하는 게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대로 잘 나가는 자의 증거일 수 있음을 말씀하심이리라.
오늘.
내게 고난을 그리 주시겠다는 예언이라기 보다
고난이 있어도 감사할 자의 깨어 있음,
그 복종의 감사함,
단 고난에 대하여 묵상해보라심이 아니실까 싶다.
그리고 , 그들 성공한 자들의 어이없이 무너지는
그 불신자들의 반드시 도달할 '사망'의 증상에 속하지 않음,
죽음의 방종에 벗어남을 감사하라 심 같기도 하다 .
난.. 행복한 자다 .
다행이도 고난이 있어도 '소망이 있는 단 고난'을 깨달아
큰 흔들림이 없는 자다.
40살 넘지 못할 운명인듯 살아오던 불신의 그 젊은 시절을 건너
전적으로 선택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으로 인하여
지금껏 살아오며
이제 '온전한 구원'의 결과에 대한 소망으로
가슴이 뿌듯함을 느끼며
하루 하루 말씀따라 살고 있는
그리 넉넉치 않은 ^^;; 나이의
녹록치 않은 환경 속이지만
가장 넓고 든든히 살게 되어 가는 자.. 말이다.
그게.. 행복하다 .
주님.
깨달음이 감사하나이다.
주여.
불쌍히도 '자신의 자아'의 결심대로 만 살고
이 세상이 모두 인듯,
도망가는 마음으로 자신의 목숨을 끊어대는
이 불신의 시절에
그래도 주여.. ..진리이신 하나님의 소망있게 하심으로
그리 살아가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주여.
더 잊지 않게 하소서
더 크고 놀라운 체험으로
온전한 천국의 소망의 기대로
제 가슴을 채우소서.
제 주변, 제 가족 , 그리되게 하시고
그래도 이 세상에 기도하는 자들이 많아
덜 타락한 저의 한국 .. 지켜주소서.
정치가들, 경제인들..
무엇보다 기독교 리더들의 깨우침을 늘게 하소서.
마지막 시대,
이 멸절의 프로그램이 돌아가는 마지막시대에
주님의 말씀 준행하는 숨겨진 144,000명의 기도하는 자들의
영혼을 더욱 단단히 하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들어 감사하며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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