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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은 일천번제를 안 드렸다(왕상3:1-15 )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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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은 일천번제를 안 드렸다(왕상3:1-15 )

주하인 2010. 9. 9. 11:19

제 3 장 ( Chapter 3, 1 Kings )

 

주님의 빛 가운데 만 있다면

홀로 있다해도

이리 당당할 수 있다

 

주님 만 늘 바라볼 수 있다면

비록 화사하지 않더라도

참으로 아름다울 수 있다

 

주여

내 내면을

온통

주님의 사랑으로

비추소서

 

 
1.  솔로몬이 애굽 왕 바로로 더불어 인연을 맺어 그 딸을 취하고 데려다가 다윗성에 두고 자기의 궁과

     여호와의 전과 예루살렘 주위의 성이 필역되기를 기다리니라 
  죄의 씨앗을 들여 놓았다.

부흥할 기회에 부흥할 순서로 생각되는 세상적 행태.

죄는 아니지만

솔로몬이 너무 앞서간다.

주님의 뜻을 앞서 자신의 생각이 넘친다.
  
 

3.  솔로몬이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부친 다윗의 법도를 행하되 오히려 산당에서 제사하며 분향하더라
 아버지 다윗이 행한 법도를 모두 행하고

다윗 조차 못해본 산당에서 분향하는 일까지 한다.

대단해 보인다.

이때까지는 대단할 수도 있었다.

 

 
4.  이에 왕이 제사하러 기브온으로 가니 거기는 산당이 큼이라 솔로몬이 그 단에 일천 번제를 드렸더니 
 일천 번제.

대단하다.

마음과 영혼을 다한 일천 번제라면

더더욱 대단할 것이고

죽을 때까지 변치 않는다면

더더더 대단할 것이 맞다.

 
     
12.  내가 네 말대로 하여 네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주노니 너의 전에도 너와 같은 자가 없었거니와

      너의 후에도 너와 같은 자가 일어남이 없으리라
 하나님이 감탄하실 만한 간구.

'지혜'

 
 
13.  내가 또 너의 구하지 아니한 부와 영광도 네게 주노니 네 평생에 열왕 중에 너와 같은 자가 없을 것이라 
 얼마나 대단한 지

하나님께서 복에 복을 더하신다.

 일천 번제와

지혜 구함과

축복.
 여기까지는 수많은 신앙인들이 닮으려고 애쓰는

그래서 축복을 천배 만배 누리고자 하는

너무나도 유명한 구절이 맞다.

 그러나 처음에 나오는 이방여인과의 정략 결혼이 미심쩍다.

그러면서 솔로몬의 '열심'과 그 유명한 '지혜' 구하는

지혜롭기 이루말 할 수 없는

유명하고 멋진 장면에 대하여 나오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며 축복하시는 장면이 나오신다.

 

 어딘가 이상하지 않는가?
왜 처음에 이방여인 문제가 나오는가? 

그러면서 그 열심과 그 지혜.

또 축복.

하나님은 앞을 내다 보지 못하시는 분이시던가?

솔로몬의 말년을 모르실 분이시던가?
당연히 아니지 않을 것이 아니던가?

 무엇을 말하려 하시는 것인가?

 

 우선 '죄'에 대한 것이시다.

죄는 타협의 여지가 없다.

그게 비록 현재는 작아도 나중에 인생을 망친다.

영혼이 파괴된다.

솔로몬의 최후는 '헛되고 헛되니...'다.

 

 두번째로 '죄'에 대한 주님의 태도이시다.

주님은 '우리의 현재 상황'에 따라 그것의 최선을 보신다.

나이어린 솔로몬.

그가 죄의 여지는 두었지만

그가 하는 것은 죄가 죄인지도 모르고 죄를 짓는 것이기에

주님은 그것을 그냥 인정하시고 두고 보시는 것이시다.

그 분은 그래도 어린 영혼에게 늘 최선의 결과를 보고 계신다.

'잘 할 거야.'

' 잘 될 거야'

그러시면서 잘하는 것 만 보신다.

다윗보다 훨씬 열심히 신앙생활을 시작하지 않는가?

다윗의 유지를 모두 지켜 행하고

산당을 세워서 일천 번제를 행하고

지혜를 구하는 등..

놀라운 '영적 신동'의 모습을 보이지 않던가?

우리는 안다.

그가 결국 망령된 이방여인의 술수에 말려들어가는 노후를...

주님께서 그것을 모르실 리 없으신가?

그러기에 솔로몬의 그 모습을 보며

난 '어려움 없이 커온' 신앙인이 리더급에 올라갔을 때

어려움 겪는 자들의 어려움을 이해하지 못하는

영적 전횡 - 자기가 옳다고 밀고 나가 상처 주는 - 을 보며

솔로몬의 그 영적 로얄 패밀리의 열심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더구나 처음 시작이 '애굽 왕의 딸'을 들이는 일로 시작하지 않는가?

그들의 그 무모한 신앙은

이곳 저곳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히고 분열을 가져온다.

가까운 곳에서 많이 본다.

하지만, 주님은 나보다 훨씬 더 잘 아시고 계심에 도 불구하고

그들의 '죄'보다는

그들의 장점을 보신다.

 "그게 놀랍다. "

난, 역한 느낌이 먼저 드는데

하나님은 '놀라운 기쁨'을 먼저 느끼신다.

나는 부정적인 면을 먼저 보는 데

하나님은 '긍정적'인 것을 늘 보신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난 예수님 모르는 시절 부터 훈련되어진 '의심'의 프로그램이 있었기 때문이지만

주님은 그의 잘하는 점 만을 보심으로

그의 장점으로 인하여 더욱 영향 받는 사람이나 일을 보고 계시는 것이시다.

그러고 보니 그렇다.

그들, 로얄 패밀리 비슷한 리더 들에 의해서

상처 받는 부분보다는

하나님의 일이 역사되어가는 부분 또한 놀랍게 많기도 하다.

그 일로 통하여 천파만파

주님의 파도가 번져갈 기회가 되기도 하지 않던가?

 과연 하나님의 그 지혜를 누가 알랴?

그 사랑을 어찌 짐작하랴?

솔로몬 역시 그 사랑 안에서 결국

말년에 산에 올라 '인생의 허무'를 고백하고

그로 인하여 오직 붙들 분은 하나님이라고

고백을 해내지 않았던가?

잠언서를 쓰지 않았던가?

 주님은 우리의 영적 성장도에 따라

'죄'로 보시기도 '인내'하시기도 하신다.

 

 ' 영적 열심'에 대한 것이다.

다윗은 일천 번제를 안드렸다.

산당도 안꾸몄다.

멋진 성전을 꾸미려다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셔서 포기했다.

솔로몬이 하실 것을 미리 말씀 하셨다.

그럼에도 다윗은 솔로몬에 비교도 되지 않을 영광을 누리고

영원까지 그 이름은 남아 있게 될 것이다.

무슨 차이던가?

영적 열심이 과연 주님이 모두 기뻐하실 것을 말하시던가?

 위에도 썼지만

은혜가 올때

그 은혜를 받아 그를 넘어서는 '자아'의 발로일 때는

그것은 위험한 일이 될 수도 있다.

지나치지 않을지라도 주님을 앞서나감은 위험할 소지가 있다는 것이다.

 주님이 무엇이 부족해서 산당을 받으시고 일천 번제를 받으셔야 한단 말인가?

그리 안해도 온 우주가 하나님의 말씀 한마디로 만들어 지시는데..

영적 열심.

그것은 우리의 성장을 위하여 필요한 행위일 뿐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그 분과의 동행함이다.

 다윗님은 영적으로 주님 앞에 숙연하였다.

그게 진정으로 중요한 일인듯 싶다.

 

그러나, 참으로 사람은 복잡하고 미묘한 창조물이다.

주님의 완벽한 창조물이지만

사단으로 인한 원죄적 존재이다.

그러기에 그러한 자가 주님의 성품으로 성화되기 위하여서는

믿음에 행위의 훈련이 더해지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기에 어렸을 적은 '유치원'이나 '초등학교'를 거쳐

박사과정까지 사람에 따라 필요한 것이고

그 후는 배운 것을 가지고 풍성한 삶을 누리듯

신앙도 마찬가지다.

솔로몬의 일천번제와 지혜를 구하는 태도는

우리의 어릴 적 마땅히 본받아야할 열심이 분명하다.

그것이 없어도 나이는들지만

게으른 노숙자같이 되기 쉽상일 뿐이다.

 영적 열심.

주님과의 동행을 놓치면

자칫 율법이 되기 쉽상인 미묘한 문제다.

따라서

열심을 보이는 어느 누구를 통해

부러워 하거나 열등감 느낄일 도

쉬는 것 같이 보이는 사람에게

질타를 할 일도 아니다.

 그 분은 그 분의 영적 상태에 따라

그 분의 하나님이 이끌어 가실 일이고

난 내 하나님께서 그러실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물론 주님 만 바라보고

성경의 말씀대로 살아가려는

그 기본을 전제로 말이다.

 

 

 그렇다면

오늘 나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말씀은 무엇이던가?

 

1.  죄를 멀리하라.

 그 동안은 어리다고 받아들여졌던 '죄'가 아닐 듯 여겨졌던

'죄'의 씨앗들을 들이지 말라.

 어쩌면 'TV'가 될 수도 있다.

상처를 이유로 함부로 했던 것 들이 될 수도 있다.

도저히 어찌 할 수 없던 이유로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셔 그냥 두셨던 것이

바로 그것일 수 있다.

 돌이켜 묵상해볼 일이다.

 

2. 회개한다.

 오늘 지은 죄는 무조건 회개한다.

 

3. 예수 그리스도의 빛 가운데 모든 사람을 올려 드린다.

 어제 읽은 simple life란 책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을 그렇게 한다고 하셨다.

그러고 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게 느껴지는 것 같았단다.

 사람에 대한 미움이나 원망이 사라진다 한다.

함부로 판단하는 '치기어린 리더'들의 어리석은 영적 행동으로 비판 하였던 것을

그러지 않도록 막아주는 것이 '중보'다.

사랑섞인 중보하자.

가까운 자들을 위해서 그러자.

스쳐 지나가는 자들을 위해 그러자.

내 진료실 문을 들어오는 분들을 위해서 그러자.

 

4. 영적 규격을 갖추자.

일천 번제는 내 취향은 아니어도

기도의 모습...

특별히 cycle의 단순화가 단순성에 다가가는 훈련이라신다.

내 시간을 간소화하고 단순화 하자. 

일천번제는 아니더라도 일정한 시각을 두고 회개하고

일정한 시각을 두고 중보하고

일정한 시간을 두고 간구하는 습관을 들이자.

 

5. 성경 세장 읽는다.

무슨 일이 있어도...

 

6. 주님의 말씀을 간구하자.

 살아계신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싶다.

'KBC야... '

'주하인아.. '

'이제는 이렇게 하는 것이 어떠니... ' 하는 소리.

그럴 때 난,

'주님.. 주님 맞으시지요?

 저 이렇게 하고 싶습니다..' 하고 싶다.

'솔로몬'의 꿈 같은 그런 뚜렷한 꿈을 꾸고 싶다.

눈을 뜨고도 그리하고 싶다.

내 눈뜨고있는 대부분의 시간을

주님과 대화하고 싶다.

 

 7. 주님을 앞서지 않도록 하자.

기다리자.

그럴 듯한 이유로 영적 행동을 해치우지 말자.

자아가 주님을 앞서는 일이 없도록하자.

기다리자.

먼저 속단하지 말자.

 

기도

 

  귀하시고 감사하신 주님.

솔로몬의 시작부터 열정에 부풀어 하는

그런 패착처럼

자신의 자아가 주님을 앞서지 않게 하여주소서.

때로는 그게 주님을 위하는 듯하고

때로는 그게 옳은 듯 해도

주님께 여쭈어 보지도 않고

주님의 기뻐하실 일임을 느껴 보지도 않고

먼저 해치우는

이 자아의 싱싱한 시퍼럼을 느끼지 않도록 하소서.

제발 그리하소서.

제 인생 ..

그 앞서나가는 조급함으로 인하여

얼마나 많은 손해를 보았는지요.

이제 주님.

조금은 그때보다 성장하였고

자아 부인의 연습을 하게 하시는 듯 하므로

주님의 뜻대로

다윗님 같이 주님과 합한 자 되게 하소서.

영적으로 그리하게 하소서.

내면적으로 합치되게 하소서.

주님.

주님.

순간적으로 튀어나오려 하는

이 어이없는 자아의 승함을 가로 막으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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