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주여 용서하소서 ( 왕상 2:26-35 ) 본문
제 2 장 ( Chapter 2, 1 Kings )
진정한 자유를 위해서는
주님의 빛으로
내 속이 비추어 져야 한다
상처의 그늘 마져도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키시는
그 분을 믿어야 한다
그제야
모든 것이
조화로 승화될 수 있다
그제야
삶속에 피어나는
모든 것에
하나님의 뜻이 계심을
깨달아 낼 수 있다
그제야
내 영혼이
자유를
꽃 피워 낼 수있게 된다
26. 왕이 제사장 아비아달에게 이르되 네 고향 아나돗으로 가라 너는 마땅히 죽을 자로되 네가 내
부친 다윗 앞에서 주 여호와의 궤를 메었고 또 내 부친이 모든 환난을 받을 때에 너도 환난을
받았은즉 내가 오늘날 너를 죽이지 아니하노라 하고
27. 아비아달을 쫓아내어 여호와의 제사장 직분을 파면하니 여호와께서 실로에서 엘리의 집에 대하여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함이더라
아비아달은 죽을 자 였으나
주님 궤를 메었었고
다윗의 환난을 같이 했던 이유로 죽지 않았다.
다만, 유배를 당했다.
28. 그 소문이 요압에게 들리매 저가 여호와의 장막으로 도망하여 단 뿔을 잡으니 이는 저가 다윗을
떠나 압살롬을 좇지 아니하였으나 아도니야를 좇았음이더라
30. 브나야가 여호와의 장막에 이르러 저에게 이르되 왕께서 나오라 하시느니라 저가 대답하되 아니라
내가 여기서 죽겠노라 브나야가 돌아가서 왕께 고하여 가로되 요압이 이리이리 내게 대답하더이다
31. 왕이 이르되 저의 말과 같이 하여 저를 죽여 묻으라 요압이 까닭 없이 흘린 피를 나와 내 부친의
집에서 네가 제하리라
32. 여호와께서 요압의 피를 그 머리로 돌려 보내실 것은 저가 자기보다 의롭고 선한 두 사람을
쳤음이니 곧 이스라엘 군대장관 넬의 아들 아브넬과 유다 군대장관 예델의 아들 아마사를 칼로
죽였음이라 이 일을 내 부친 다윗은 알지 못하셨나니
요압.
'제단의 뿔'을 잡은 것은 잘 했다.
그러나, '여기서 죽겠다'고 말을 한다.
말을 함부로 함은 보응을 받는다.
솔로몬 왕께서 '그의 말대로 하여 죽여서 묻으라' 라 한다.
그리고 그의 다윗 왕 시절의 충성에도 불구하고
그 시절에 잘못한 일을 회개하지 않고 묻어 버린 일로 인하여
결국 죽음에 이른다 .
제단의 뿔을 잡아도 '회개'하는 마음이 아니면 죽을 수 있다.
아도니야도 그랬다.
죽지 않을 수 있는 선택이었으나 온전한 회개가 겸비되지 않은
겉모양의 '선택'은 죽을 여지가 충분하다.
생각하게 하는 바가 있다.
'신앙' 만으로 모든 것을 다 해결 하려 하는 게 옳을까?
진정한 신앙인이 아닌 ..
진정한 신앙인이라면 어떤 것일까?
다윗에 대한 충성을 보였던 두 신하의 말로처럼
인간적 열심과 행위적 옳음 만으로 가능한 것일까?
요압의 제단 뿔을 잡고 늘어지는 그 선택은 분명 옳았으나
그의 죽음은 웬일이던가?
그의 거침없는 - 제재가 되지 않은 - 언행과
그속에 숨어 있는 내적 조화 없는 외적 열심의 결과 탓 아니던가?
제단 뿔을 잡을 결심이면
일단 우선 되어야 하는 것이 무엇이던가?
'하나님에 대한 믿음' 아니던가?
그 분께서는 모든 것을 다 해결 하실 것 이란..
그도 그런 마음으로 제단의 뿔을 잡았을 것이란 생각은 할 수 있지만
만일 그 믿음이 옳은 믿음이었다면
그는 ' 나는 여기서 죽겠다'는 거친 언사는 나오진 않았을 것이다.
조금은 더 겸손하고 낮아지는 모습이 나오지 않았을까?
'심플 라이프' 라는 '리처드 포스터' 님의
너무도 뛰어난 책을 읽고 있다.
그 분은 '영성가'다.
그렇다고 수도자는 아니다.
삶속에서 영성을 놀랍게 구현해 내는 정말 대단하신 분이시고
이 책은 '상'을 받을 만큼 대단한 책이다.
주제는 '단순성'이다.
삶이 단순해짐.
미련해지는 단순이 아니다.
복잡성 속의 단순.
역설속의 단순.
정말로 내 블로그를 통해서 구현해놓고 싶은 이야기들로
그득 그득 정확하게 표현해 내는데 놀랍다.
수일 간의 고통기간 동안,
주님께 내 의지와 생각을 맡긴다고 결단하며
그 동안을 '책'도 읽겠다고 빌려다 놓은 책에서
하나님께서 이걸 읽게 하시려고.. 라는 조금은 과장된 생각을 할 정도로
은혜깊은 책이다.
거기에서 나온다.
단순하게 되고자 하는 유혹 중에 가장 강력한 게 '행동'을 통제하는 게 가장 쉽다한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십일조'를 내면 끝이다.
그것을 준행 만 하면 마치 훌륭한 신앙인의 모습을 갖추기 위한 모든 조건을 다 갖춘 듯 느끼게 되는 듯.........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한 기준은 '최소한'의 것이고
그것의 틀을 너무 강조하는 것이야 말로 '율법'이란 것이고
그 율법을 준수하는 자들 영혼은 또 분주한 생각이 많기에
단순성과는 멀 수 있다는 것이다.
진정한 단순은 '하나님의 뜻'에 온전한 순종으로
거기에 따르는 '기쁨'이 에너지가 되어 따르는 것...이고
그 분은 단순성의 끝은 주님이 원하시면 '십일조'는
가장 최소한 단위까지 될수도 있다고 하셨다.
맞다.
주님이 주시는 기쁨이 원동력이 된다면
나도 그럴 수 있을 것만 같다.
전 재산 까지는 아니라도 어쩌면...
오늘 '요압'이 보이는 것은
율법적 선택이다.
행동 만 앞서 나가는 것이다.
그에게는 제단의 뿔을 잡는 것이 '자신의 필요'에 의하여
'내면적 단순성'과는 전혀 거리가 먼 행동의 선택 결과일 뿐이다.
그가 주님이 인정하시는 '제단의 뿔'이 되려면
자신의 오류를 회개하고
주님 앞에 처절히 매달려야 했을 것이다.
아도니야는 '순수한 면'이 있었다.
바보처럼 절절하게 매달렸다.
나중에 미련하게 행동해서 죽었지만..
요압은 다르다.
과거의 잘못에도 전혀 회개함이 없었다.
그게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이유다.
우리의 영적 죽음도
믿는 자의 실족도
주여 주여 하는 자 마다 모두 구원 받지 못할 가능성도
모두 일리가 있지 않는가?
오늘 묵상의 중요 포인트가 이것이다.
주님 안에서의 단순성.
그것은 주님 안에서 주님이 원하시는 뜻에 닮아가 지는 것이고
그것은 주님의 임재를 기뻐하는 체험을 하는 자들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죄'로 부터 멀어야 한다는 것이다.
죄는 주님을 가까이 할 수 없게 한다.
믿는 자의 죄는
제단의 뿔은 붙잡지만
그들로 하여금 요압처럼 붙들게 하는 이유가 된다.
거기에는 '단순한 평안, 단순한 평강, 그 고요한 기쁨'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제단을 붙들고 있지만 그들의 마음에는 복잡하고 더러운 생각들로 가득차게 된다.
그러다가 불현듯 주님 오시면 '회개'할 틈도 없이 후회하게 만든다.
'죄'
죄가 그렇다.
오늘 묵상은 '죄'를 빨리 회개 하라는 것 만 같다.
그리하여 단순하게 주님과 동행하는 삶으로 복귀하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삶이 세상의 불신자들과 다름없는 아귀다툼 속에 허덕이며 살다가
때가 되어 심판의 시간이 도달하면
그제야 허겁지겁 주님 제단 앞에 서도
주님께서 '나 몰라라' 하면 어떻게 하는 가.. 이다.
나.
무슨 죄가 있던가?
너무도 많다.
눈을 뜨고 눈을 감을 때까지
사람들에게 하는 죄,
나 자신에게 끼치는 죄.
주님의 말씀을 알면서도 부지 불식간, 의식 중에 짓는 죄....................
말도 못하게 많다.
더럽기가 한량없다.
꼭 범죄자가 되어야 더러운가?
그들 속과 내 속이 무엇이 다른가?
더구나 내 입에서 나오는 칼 같은 아픔,
내 눈에서 나오는 번개 보다 찌릿한 통증의 찌름등이
타인에게 끼치는 해악을 말하면
그들보다 훨씬 더 추악한게 맞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과 다른 듯
이렇듯 글을 쓰고 하나님 말씀을 묵상하는 양,
의인처럼 행동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아직은 '죄'에 대한 부담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죄에 대하여 주님 앞에 가져오려 노력을 하기 때문이다.
아직 덕이 부족해서 빈도가 많지 못하는게 문제긴 하지만,
주님께서는 '주님의 뿔'을 붙잡으려 몸부림 치는 내 마음을 잘 아실 게다.
그래서,
그래서 그냥 서 있다.
이제 이래야 한다.
이전에 지은 죄를 조금 더 기억 나게 해야 한다.
그래서 십자가 앞에 가져 와야 한다.
오늘 그래야 한다.
주님을 믿는 순간 이전에 지은 죄는 모두 잊으신 바 되었다고 하시지만
제단의 뿔을 잡으면 살 기회가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자칫 요압의 입이 될 수 있을 지도 모르고
아도니야의 엉터리 같은 여자 탐함 같은 '무서운 죄'가 될 수 있다.
주님 앞에
주님을 굳게 붙들고
매일 말씀 묵상과
그로 인하여 나오는 행동강령을 준행하고
주님이 주시는 회개의 시원함과
주님이 허락하시는 장래의 인도하심을
인도 받아야 한다.
그게 내가 더욱 치중해야 할 삶이다.
그게 내가 이루어야 할 '아이 같은 단순함'이 되는 지름길이다.
단순함이 다른게 아니다.
그냥 모든 판단과 내 정욕을 다 버리고
주님 뜻 안에 나를 단순하게 맞추는 것이다.
그것을 위한 전제 조건이 '회개'다.
주여.
절 용서하소서.
주여
절 회개케 하소서.
적용
1. 기도 한다.
기도원 가겠다.
2. 회개한다.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이 아직도 남아 있다.
자꾸만 불같이 치밀어 오르려는 미움이 꼬리를 안감춘다.
내 속의 이 포악을 주님께 회개한다.
3. 성경 세장 읽는다.
말씀이 살길이다.
죽어도 말씀은 놓치면 안된다.
말씀으로 만이 내 삶이 단순해질 수 있다.
4. 모든 분을 주님의 빛 가운데 올려 드린다.
아침에 읽고 나온 책에 매일 만나는 사람을 주님 빛 앞에 올려드리는 기도를 하란다.
화살기도로..
그러면 그 은혜가 얼마나 클 것인가?
그로 인하여 얻는 유익은 얼마나 많을 것인가?
그들이 천국에 가서 그 사실을 알면 얼마나 귀하게 여길까.. 하신다.
그렇게 하다보면 영혼이 빛을 발할 것이다.
5. 한 가지라도 착한 일 하자.
6. 죄 짓지 말자.
죄는 언젠가 보응 받을 위험성이 있다. ^^;
기도
주여.
절 용서하소서
매일 매일 용서 받을 것 투성이지만
인식조차 못하고 산 것이 얼마나 많던가 회개 합니다.
그 수미산 보다 큰 죄를 회개 합니다.
요압처럼 묻어 놓고 도 아무렇지 않게 살던 그 죄를 기억나게 하시고
주여.
죄가 더 이상 그 발톱을 제 삶에 제 영혼에 박지 못하도록 도우소서.
그리하여
주님을 더욱 가까이서 만나길 원합니다.
그리할 수 있길 소원합니다.
세상은 너무나도 강한 에너지로
나에게 내 방향의 잘못되었을 가능성에 대하여 슬그머니 흔들어 놓고 갑니다.
그럴 때마다 지축이 흔들리는 혼란을 경험할 때도 있습니다.
주님.
귀하신 분이시여.
늘 말씀으로 인도하시고
매일 상황에 정확히도 맞는 말씀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사심이 너무도 기쁩니다.
그래서 걱정 안하려 합니다.
매일 매일 내려 놓으려 애를 씁니다.
오늘
말씀 가운데서 '죄', 특별히 잊어먹고 눌러 놓은 죄의 위험성에 대하여 보고 있습니다.
실족하고 사망까지 유발할 그 아무렇지 않을 듯한 죄를 기억나게 하시사
깨끗하게 회개하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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