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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과 신하( 왕상4:1-19 )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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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과 신하( 왕상4:1-19 )

주하인 2010. 9. 11. 10:28

 제 4 장 ( Chapter 4, 1 Kings )

 


1.  솔로몬 왕이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고 
   왕 위에 오른 솔로몬

그가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고 다시 나온다.

왕의 자격 만 주어져서는 안된다는 이야기다.

진정한 왕이 되기 위해서는

이루어야 하는 것이 있다.


 
2.  그의 신하들은 이러하니라  
 그의 사람들로 '신하'를 채웠다.

그 중에는 익숙한 이름이 많이 띤다.

나단.

그 분의 아들 두 사람의 이름이 눈에 뜨인다. 

온전한 체제를 이룬 후

그는 온전한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

 

 왕 같은 제사장.

기독교인의 자격.

자격 만 주어졌다고 모두 왕같이 잘 유지하던가?

오늘 묵상의 말씀대로

온전한 왕이 되기 위한 우리의 노력도 겸비 되어야 한다.

 온전한 왕이 되기 위한 노력.

 어떻게 생각하면 인간적인 방법을 동원하라는 것 같은데

하나님의 일에 인간적 경쟁이 들어간다면

나 같이 세상의 부적응 자 같은 자나

영적으로 곤고한 자들

어딘가 아픔이 있는 자들은 또 그 경쟁에서 뒤쳐져야 한다는 의미던가?

 예수님을 제대로 믿는 자들에게 나오는 세가지 현상은

'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

' 나와 이웃과의 관계 회복'

' 나와 나와의 관계 회복'에 있음을 잘 안다.

그러나 나.. 스스로 돌아보면 첫번째 관계는 잘 되는 데

두번째, 세번째는 글쎄..다.

그렇다면 안되는 것 해결하여 온전한 신하 - 이웃과의 관계를 의미하는 것이던가?-로 정비된

통치체계를 이루지 못하고 있음에 대하여

또한번 세상에 대한 나의 좌절 처럼

믿음 안에서 또 좌절하여야 하는 것이던가?

 분명코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성령을 보내신 것은

그 안에서 '자유'를 누리게 함인데 불구하고

자꾸만 스스로를 묶어가는 이 어리석음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하나님은 완전하신 분이시고 그 분은 선이신데'

그 어이없음은 나의 오류탓이다.

그렇다면 어디에 어떤 오류가 있다는 말인가?

그리고 그 오류를 어떻게 인식하고 해결한 다음에

나의 온전한 이스라엘 왕으로서의 자격이 어떤 것인가를 어떻게 깨달아야 하는가?

 나 뿐 아니라 많은 분들이 겪는 오류는

'내'가 해야 한다는 자아의 서슬 퍼럼 탓이다.

그 오류 역시 죽지 않은 내 자아 탓이다.

'自我 婦認'

자아가 죽어야 하나님이 사신다.

하나님이 내 안에서 온전히 사시고

내가 온전히 세상에서 왕같은 제사장의 삶을 살 수 있는 길은

'내' 가 죽어야 한다.

 

' 내 힘으로 안되는 것 하나님이 해결 하셨고

  내 모든 죄 하나님 뜻대로 사용하며....♬ '

주님께 모두 맡겨야 한다.

참 어렵다.

죽도록 살아나는 내 생각을 가장한 이 '사단'의 붙들음은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벌써 나쁜 생각 , 부정적 사고, 의심......으로 그득 영혼을 채운다.

너무나 오랫동안 습관이 되어 왔던 그러한 습관은

말씀으로 붙들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그 자리를 대치하기 위한

나의 정신 차림이 있기 전에는

절대로 자리를 빼앗기지 않으려 한다.

 왕.

왕이 되기 위해서는 그래야 한다.

늘 말씀으로 날 사로 잡아야 한다.

말씀에 내 영혼을 맡기기 위한 '선택'을 선언해야 한다.

선언하고 자주 기도 해야 한다.

사단이 주는 모든 부정적인 끈은

주님 성령의 흐름으로 차단해 주실 것을 믿어야 한다.

안된다는 사실 자체를 인정하고 주님께 올려 드려야 한다.

그게 '자아 부인'이다.

자기의 생각을 죽이는 것이고

자기의 뜻을 내려 놓는 것이다.

그제야 주님은 내 안에서 역사하실 수 있다.

내가 해야 할 일은 '왕'이 되기 위한 노력이 아니고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이 내 안에서 역사하시도록

자꾸 자리를 만들어 드리는 것이고

슬그머니 내 머리속을 차고 드는

많은 생각들을 의도적으로 주님 십자가 앞에 내려 놓는 것이다.

 '온전한 왕'이 된다는 것.

그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인생의 허겁허겁한 일도 많은데

'왕'같은 소리하는 것은

정말 뜬금없는 어이없는 일은 아닐까?
너무나도 당연하지만

산다는 것은 '유한하다'

무슨 의미가 있는가?

당연히도 우리의 거처는 주님 곁에 있고

우리가 살아갈 시간은 '영원'이다.

영원 안에서 '천국'으로 살 거처를 정할 것인가

지옥의 영원을 살아갈 것인가다.

천국은 이 땅의 버거움은 하등 없는 곳이다.

이 땅에서도 왕같은 제사장의 삶은

어려움이 아니다.

고식적이고 답답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런 느낌,

그 답답한 뉘앙스는 '사단'의 왜곡이다.

너무도 오랫동안 사단의 흔들음에 속아 살아왔기에 경험한

서슬퍼런 자아의 왜곡 탓이다.

' 세상을 살되 천국을 산다'

이게 왕같은 제사장으로서 세상을 사는 우리 기독교인의 운명이다.

온전한 왕이 된다는 것은

세상의 온갖 부대낌 속에서 한걸음 떨어져

관조하는 여유로 살아간다는 것이다.

물질이 풍부해도 좋지만

물질이 없어도 좋다.

'풍부에도 처하고 비천에도 처해도 그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는 '

그러한 바울님의 고백처럼 되는 것이다.

과도한 기쁨,

과도한 슬픔,

괜한 칭찬에 대한 허겁거림

칭찬이 없음에 대한 머리아픔과 짜증,

자신이 없어지는 듯한 허무함과

지독한 외로움

젊음이 사라짐에 대한 안절 부절 못함과

그걸 붙들어 줄 자들에 대한 눈치 보기,

슬픔과 분노

남을 누르고야 느끼게 되는 저급한 만족감,

그보다 더 커져 가는

어찌할 수 없는 지독한 '공허감'....................

이러한 데서 자유로와 진다는 것이다.

'평강'

'샬롬'

왕이 누릴 수 있는 천국적 감정.

 

 기독교인.

묵상하는 자.

하나님을 잘 믿는 자........

이러한 자들이라고

늘 온전한 평강 중에 거할 수 있는가?

솔로몬도 왕이 되었지만

어이없는 '이방 애굽 공주'를 불러들이는 실책을 범한다.

그로 시작한다.

그것은 그의 고통을 예고하는 것이다.

왕이지만 온전한 왕은 아니다.

오늘에야 그는 온 이스라엘의 왕으로 올라선다.

 성화가 필요하다.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온전한 체제를 갖춤이 필요하다.

 온전한 신하는 나에게 오늘 무엇을 의미하는 바이시던가?

 사람들에게 더 잘하길 원하시는것일 수도 있다.

특히 가까운 사람들과의 관계를 더 신경쓰라는 이야기이실 수도 있다.

오늘 하루의 삶의 배정에서

'하나님과의 만남'의 시간, 기도의 분량을 늘이라는 말씀이실 수도 있다.

그것이 무엇이든간에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태도를 규격있게 잡아가야 할 것 이다.

더욱 묵상이 필요할 것이다.

나에게 원하시는 오늘의 '신하'와 '규격'에 대한 의미가 무엇이신지...

 

 

 

기도

 

주님

오늘 묵상은 어렵습니다.

그러나 온전한 왕이 되기위한 나의 결심과 결단에 대하여

말씀하시고 계시는 듯합니다.

온전한 왕이 되면 주어질 주님의 사랑에 대하여 느낌도 강조하시는 듯합니다.

토요일.

주님 뜻대로 더욱 가까이 할 수 있도록

흔들리지 않는 공정함 유지할 수 있도록

주여.

잡으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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