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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나는 (요4:43-54 )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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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나는 (요4:43-54 )

주하인 2009. 1. 13. 13:37

제 4 장 ( Chapter 4, John ) 
 

 

믿음은

이 볼품없는 소품들 사이에서

저리도 소담한 아름다움을 피워내는

꽃과 같은 결과물의 놀라움일 듯 싶다.

s 


 
48.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you people)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너희는'은 누구에게 하신 말씀이신가?

갑자기 왕의 신하가 아들의 병을 고쳐 달라고 하자 마자

뜬금없이 이러신다.

'너'라고 하지 않으시고  'you people (너희, 사람들..)'이라 하신다.

너희가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믿지 않는다 하신다.

너희가 누군가?

분명코 단수가 아님이 '신하'를 보고 하시는 말씀은 아니다.

불특정 다수.

그 불특정 다수에 나는 속해 있는가?

속해 있는 것 같다.

믿는 다고 하면서 아직도 지독한 불신의 부정감들이 한번씩 스친다.

그것을 보면

주님은 나에게 이것을 깨닫길 원하시는 것 같다.

말씀을 믿을 수 있는가?

보지 않아도 믿을 수 있는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을 수 있는가?

혹시 주하인 너도 똑같은 '너희'에 속하는 자는 아닌가?

.......


 
49.  신하가 가로되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신하를 보자.

 그는 촉급하다.

그의 아이가 죽기 직전이다.

 급하다.

그렇지 않았더면 그가 예수님을 찾아올리가 있겠는가?

얼마나 다급했으면 그가 주를 찾아 뵙겠는가?

 

 
 
50.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 하신대 그 사람이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예수께서는

'가라'라고 하신다.

신하의 마음 같아서는 예수님을 등에 업고라도 뛰쳐가서

죽어가는 아이 머리 맡에 앉혀 드리고 

그분이 아이의 이마에 손을 얹고 ' 예수의 명령이니 나아라'하고나면

벌떡 일어나는 장면을 연상하고 있을 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주님은 당혹스럽게

죽어가는 아버지인 그 신하에게 '가라'라 하신다.

그러면서 '네 아들이 살았다'하신다.

 

 이걸 어떻게 받아 들일 수 있을까?

만약 나를 저 상황에 집어 넣어 신하가 나라면..

내 머리속은 뒤죽 박죽이 되어 있어

아이의 어렸을 적 자라던 모습

그 아이가 자라면서 부리던 재롱과

아이가 주던 그 놀라운 경이의 즐거움

그러면서 아이에 대하여 잘 해주지 못해던 아빠로서의 안타까운 기억들

그 아이가 떠나고 날 자리의 큰 흔적에 대한 푹 ~ 파인 듯한 공허와 안타까움...........등이 뒤섞여 있고

그에 따라 심장은 일분에 200회를 뛸 정도로 빠르게 요동치고

결국은 입 밖으로 튀어나올 듯한 분탕질을 하고 있을 그때.........

주님이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 '.....라 하면

어찌 받아 들일 수 있을까?

 

 지금

잠시

마음을 진정하고

그 상황에 들어가 보았다.

 

과연

보지 않고

믿을 수 있을까?

 


 
51.  내려가는 길에서 그 종들이 오다가 만나서 아이가 살았다 하거늘 
  아이의 아버지인 신하처럼

얼른 돌아서서 자기의 집으로 돌아 내려가는 - 정말 믿음이 좋은 듯하다.  - 그 결단이 

나에겐 가능할 까?

그는 주님의 말씀을 듣는 순간 어떻게 반응했을까?

주저 주저 했을까?

갈까 말까 

무엇인가 말을 해야 하고 말씀을 더 듣고 더 요청을 해야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안절 부절 하다가 결국은 훽하고 돌아서지는 않았을까?
 아닐 듯 하다.

성경에 그런 흔적이 없다.

가만히 들여다 보면 성경에는 흐르는 감정이 숨겨져 있다.

뉘앙스가 있다.

그 뉘앙스가 맑다.

더구나, 위에 '너희'라는 표현은

'너희'에 포함되지 않을 , 곧 나올 신하의 믿음을 강조하기 위한 대비법의 표현이실 것이다.

예수님은 엄청난 비유법과

절묘한 심리적 직면기술을 가지신

말그대로 '귀신이 곡하고 말' 하나님의 능력을 가지신 분이 아니시던가?

그런 의미에서

'너희'에 포함되는 '나'에게 배우라는 뜻으로 성경에 이런 대조의 표현을 쓰신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주하인, 너와는 상대가 되지 않을 이, 믿음의 용사를 보라.

 그가 어디 주저 대더냐?

 그가 어디 믿지 못하더냐?

 그가 어디 나보고 가자고 조르더냐?

 그가 어디 나보고 한마디라도 더 해달라고 떼스더냐?

 그는 보지 않고 믿지 않더냐?

 넌 어떠냐?

 말씀에 나오는 그 수많은 약속의 말씀을 허공에 헛되이 흘려 버리지 않았더냐?

...... 

하시는 것만 같다.

 

 그, 신하의 '내려가는 길' 위의 심사는 과연 어떠했을까?

의심했을까?

기뻐했을까?

두려워 했을까?

아들이 건강해서 마중 나올 기대로 흥분했을까?

나라면 어떠했을까?

 

아들이 대학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기도하는 분들의 응답에 '아이가 합격 될 것이다'라고 호쾌이 나온다.

그게 옳은 방법의 믿음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다.

계시를 즐겨하는 것.

하지만, 그러한 신비적 현상을 완전 무시한다면 '기도'는 왜 하는가?

하나님이 영적인 분이심을 믿지 않는 것은 아닌가?

 문젠 있다.

그 응답을 받는 분의 영적 지적 상황, 그리고 팔이 안으로 굽고 싶은 자의 심리.........

따라서 어디까지 응답을 옳게 해석해야 할 지 문제기는 하지만

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싶다.

하지만, 솔직히 가슴 깊이 들여다 보면

벌써 틀릴 결과에 대한 두려움과 그 때에 실망감이 먼저 그려짐이 사실이다.

 

참 어려운 문제다. .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보지 않고 믿는다는 것.

 

그 신하는 예수님을 직접 뵈었다.

그리고는 믿기는 쉽지 않을까?

그렇지만, 지금의 우리 21세기 사람들은 성경을 통해서 확신을 하는 상태니 그렇지만

그 당시의 신하는 그 분이 메시야 임을 믿는 게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그 분의 '가라'라는 말씀을 믿기는...

지금의 내 입장이나 셈셈이긴 할 것 같기는 하다.

 

그 는 어찌되었든 '내려가는 길'을 내려갔다.

머리속은 아마도 복잡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렇다면 감정적으로 확신을 가지고 안정감과 기쁜 마음을 가지고 믿는 것만

올바른 믿음인가.. 라는 생각이 든다.

그도 사람이다.

아이가 죽었으면 어떠할 것인가.. 하는 생각도 스치고는 갔을것이다.

하지만 그는 의지적으로 자꾸만 물리쳤을 것이다.

 그렇다.

순간적으로 스치고 지나가는 망상적 생각들은 내 것이 아니다.

그 영적인 부정적 존재들을 내 것이라 착각하고

내가 믿음이 적다고 좌절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믿음의 정의를 다시한번 정의할 필요는 없겠는가?

믿음이란, 어쩌면 주님의 말씀을 받아 들여서 의심하지 않으려는 노력의 결과일 뿐일 것이다.

과정에서 드는 의혹까지 책임질 필요는 없다.

단, 싸워서 받아들이지는 말아야할 의지적 결단은 필요하다.

 

어쨌든,

내려가는 길의 그는 그리 밝지만은 않았을 것 같다.

 

사람들이 마중 나와 얘기한 후에야 밝아졌을 것이다.

그의 가슴은 환희로 뛰었을 것이다.

환희로 뛴다는 것은 그 만큼 마음을 조렸다는 이야기다.

마음이 조렸다는 이야기는 그도 의혹을 싸우고 있었다는 이야기도 될 수 있다.

 

이제 그와 다른 나의 입장이다.

나도 믿음의 결심을 할 수 있다.

성경에서 나온 말씀을 믿겠다.

믿으려 최선을 다하여 노력한다.

그러고 나서 '성령'께서 도우심을 믿는다.

내 감정까지 그 분은 주장하신다.

감정이 온전하게 된 상태가 믿음은 아님을 다시금 이해한다.

믿음은 결심이지 평강의 상태까지 도달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성령의 도우심의 결과일 뿐이다.

 

 

 

적용

1. 가라.......... 네 아들이 붙었다.

 믿습니다.

 주님의 약속의 말씀으로 믿겠습니다.

의심치 않겠습니다.

 의혹은 물리치겠습니다.

 특별히 오늘 저에게 레마로 주신 것을 믿습니다.

  곧 좋은 소식이 있음을 믿겠습니다.

 

2. 가라.. 라면 간다.

 어떤 일이 나에게 부딪힐 지 모른다.

 하지만 주님의 약속, 성경 안에 구구히 흔들리지 않는 약속은 믿는다.

  '먼저 그의 나라와.............. 이 모든 것을 더하신다. '도 믿는다.

 

3. 성경 일곱장 읽겠다.

 말씀은 하나님의 영의 흐름이고 하나님이심을 믿는다.

 난 성공할 것이다. 

 아이들도 쓸모있는 자가 될 것이다.   주님과 세상에..

 믿는다.

 

4. 믿음에 대하여 다시금 묵상한다.

  간간히 드는 의혹까지 누르지는 못한다.

 그럼에도 믿으려는 노력을 주님은 기뻐하실 것으로 믿는다.

그게 기쁘다.

 편안하다.

 난, 믿음이 적은 사람이 결코 아니다.

방법을 잘 몰랐을 뿐이다.

 

 

 

기도

 

 주님 하나님

감사하여이다.

믿음에 대하여 다시 한번 생각해볼 기회를 주심을 감사합니다.

 주님

의혹에 져서 포기하고 주저 않지 않게

힘을 주시고 지혜를 허락하심을 감사합니다.

아이의 합격을 믿습니다.

주님 마음이 부드럽게 해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주님

저의 결국의 성화의 성공을 믿게 해 주심도 감사드립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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