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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주님 손에 잡힌 나귀 올시다 (눅 19:28-44 )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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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주님 손에 잡힌 나귀 올시다 (눅 19:28-44 )

주하인 2008. 3. 5. 11:43

제 19 장 ( Chapter 19, Luke )

 

 비록

갇혀 있는

아주 작은 꽃이지만

주님의 빛이

비취니

놀랍게 아름답습니다.

 

 


28.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시더라 
41.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42.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그 분

예수님은

돌아가실 것을 아시면서도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나가셨다.

 

 십자가를 지시기 위하여서다.

 

 어제 'A. W 토져'라는 분의

'나는 진짜인가, 가짜인가'라는 - 정확한가? ㅎㅎ - 책을 보았다.

거기에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개념에 대하여

명쾌하게 나왔다.

당연하지만...

' 남을 위하여

피할 수 있지만

능동적으로 지는 

어려움' 이란다.

맞다.

 

 주님은

틀림없이 피하실 수 있지만

'주님 하나님' 때문에

'세상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러

씩씩하게 나가셨다.

예루살렘으로 ...

 

 보라.

 

예수님이 우신다.

하나님이 우신다.

 

 예루살렘이 불쌍해서..

그 불쌍한 예루살렘을 위하여

그 안타까운 구원받아야할 불신의 세상을 위하여

그 분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러 가신다.

앞서서..

 

 


   
30.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 사람도 타보지 않은 나귀새끼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너라  
31.  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이렇게 말하되 주가 쓰시겠다 하라 하시매 
35.  그것을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새끼 위에 걸쳐 놓고 예수를 태우니 
36.  가실 때에 저희가 자기의 겉옷을 길에 펴더라
 
  오늘은

나귀의 입장에 잠시 서 보도록

허락하시네요.

 아무 사람도 타보지 않은 나귀새끼.

나귀가 고집이 세다는 데..

묶여 있는

어린 나귀 새끼라면

그 입장이 어땠을 까요?

 고집은 세고

어리니

두렵지는 않을 까요?

 눈 앞에 왔다 갔다 하는

모든 환경들이 다 겁이 났을 겁니다.

사람이 오면

그 눈에 겁이 질려

눈의 상안검 - 윗 눈꺼풀-이 아래로 수축하며

눈꼬리가 아래로 쳐지고

눈의 동공은 사정없이 조여지고

다리는 후둘 거렸을 수도 있어요.

 묶여 있으니 어떨까요?

어려서 묶여 있으니

답답은 하지만

어린 나귀이니

답답한 것인지도 모르고 답답할 것이

아닐까요?

숙명이려니 받아 드리고 있지만

그 삶이

낙은 없을 것이 분명합니다.

나귀에게 '낙' 찾는 것이 어불 성설이지만

어차피 오늘 묵상에서 주어진

관점이 나귀니

그 나귀에 제 감정을 이입해 보니 말입니다.

 어린 나귀니

어미 없이 있으니

외롭고 쓸쓸할 것 아닌가요?

 

 

동영상 카피해 놓았습니다.

    일단 클릭해서

   '주를 처음 만났을 때' 만  틀어 놓아  주세요..ㅎㅎ )

 

 

어리니

힘이 있을리가 없습니다.

사뭇

세상에 홀로 놓여

구석에 처박혀

묶여 있는 신세가

마치

예수님 모르던

이전의 내 스스로의 느낌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

바로

어린 '나귀'의 신세가 아닌가 합니다.

 

 

 그런

그에게

누군가 다가옵니다.

그리고는

묶여진 줄을 풉니다.

아직은

풀어도

좋은지 나쁜지

그것이 풀린 것인지

안 풀린 것인지

개념조차 없을 어린 나귀는

끌고가는 제자들의 손길에

저항 제대로 못하고 끌려가고 있습니다.

그는 비록 풀려 났지만

아직

'심정적' 묶임에서는

벗어 난 줄도 모르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런 나귀가

주님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는

나귀고

그는

어리고

그는

아직 묶인 듯하지만

이제는 다릅니다.

 나귀 본연의 일을 합니다.

처음으로 짐을 집니다.

그 짐이

온 우주의 창조주 이신

예수님이시니

그 얼마나 대단한 영광입니까?

 

 이런 것 만 같습니다.

 

' 답답하고 힘들고

 세상이 어둡고

 아무 것도 희망이 없는 것 같은

 주님의 백성들이시여.

  힘을 내세요.

 주님이 오셔서

 그 어둠을 쫓아내고

 그 아픔을 달래주시며

 그 외로움을 안아 주실 것입니다.

 비록 영접해도

 아무 변화가 없는 듯

 무력해도

 변화는 일어나고 있습니다.

 어느 순간

 우리의 인지를 넘어서는

 크고 놀라운 일이

 우리 주위에서 벌어질 겁니다.

  갑자기

 이곳 저곳에서 환호성이 벌어지고

 사람들이 우리의 앞 걸음에 겉옷을 깔듯이

 이곳 저곳에서 우리를 도우려 나타날 것이고

 우리의 인생의 목표가

 뚜렷이 보일 것입니다.

 우리 삶은 힘이 있어지게 될 것입니다.

  주님을 등에 업고 걷는 길은

 말해서 무엇할

 영광의 길이 아니겠어요? '

 

 이런 변화.

 

전요.

제 자아상이

어린 나귀의 그것보다 훨씬 못했어요.

외롭고

쓸쓸하고

죽음보다 더한 답답함이

날 사로잡고 있었지요.

예수님 영접하여

무언가 변화가 있을 것의 기대에도 불구하고

전혀 달라지지 않는 듯

의혹이 들었었지요.

그러나

어느새

말씀의 시간이 늘어나고

내 영혼이

주님의 내 가슴에 계신 흔적을 느끼는

그 순간이 자주 자주 되풀이 되어가며,

어느새

내 영혼에는

폭죽이 터지기 시작했습니다.

'팡~펑~뻥~~'

주님 안에서

삶의 의미를 찾았습니다.

내가

어느새 풀려 나왔고

아직은

주님의 손 아래

약간의 제약은 있지만

이것은

억압이 아니고

주님 안에서의 '자유'임을 알았습니다.

내 등에

주님을 태울

다리 힘이

더욱 더 생기기를 원합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어디까지나

그 분을 모시고 갈 수 있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무겁지만

무겁지 않습니다.

힘들지만

힘들지 않습니다.

 나훔1:12-13)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들이 비록 강장하고 중다할지라도 반드시 멸절을

                       당하리니 그가 없어지리라 내가 전에는 너를 괴롭게 하였으나 다시는 너를 괴롭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이제 네게 지운 그의 멍에를 내가 깨뜨리고 너의 결박을 끊으리라

 난

묶였던 어린 나귀였었습니다.

하지만

이젠

주님의 손에 잡힌

힘쎈 나귀 입니다.

 

 난

행복합니다.  

 

 

 

 
37.  이미 감람산에서 내려가는 편까지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의 본바 모든 능한 일을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40.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

 

 A W 토져의 그 책에 서두 부분에

'진짜 그리스도인'은

항상 기쁘지 만은 않다는 얘기가 나옵니다.

  항상 기쁘고

항상 좋기만을 바라고

늘 긍정적 상황이 있다고 상상하는 것은

마치

'숨을 들이 쉬기 만 하지

 내쉬지 않는 자'와 비슷하다고요.

 긍정적인 면 만을 강조하는 목회자들은

사탕만 먹이는 부모와 같다고요.

주님은

자기 십자가를 지기를 바라신다고요.

 

 당연하지요.

주님은 분명히

'주님으로 고난이 오는 만큼

주님으로 부터 은혜도 넘친다'고 하셨지요.

 주님의 원리는

절대로 '달콤한 것' 만은

아닙니다.

너무 힘들지만도 않지만요.

 

 하지만

오늘

이들의 환호는

분명코

자신 들의 뜻대로

'긍정적인 면' 만을 보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마져도

용인하십니다.

아니,

저렇게 환호하는 것을 하지 않으면

돌이라도 대신 환호하실 것이라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

주님은 기쁨입니다.

기쁨을 온전히 누려야 합니다.

그게

기독교인 누구에게나 허락된

주님의 뜻입니다.

 그 안에서

주님의 사랑을 온전히 만끽하길 원하십니다.

주님은

주님 안에서

주님의 사랑으로

그 사람 사람 가슴 속에 있는

사랑의 탱크가 가득 차길 원하십니다.

그 가득차기 까지의

그 환호와

엄청난 하나님의 기쁨을

절절히 느껴가며

두 손을 높이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길 원하십니다.

 

하지만

그 환호 뒤에 놓인

십자가의 고통은

소수에게서만

이해가 허락된

비밀입니다.

 

 오늘 날

잘못된 신앙의 개념으로

자신의 성공을 위하여

힘든 하나님

어려운 하나님의 뉘앙스는

철저히 가리고

왜곡된 부활신앙으로

환호 만을 부르짖게 만드는

잘못된 신앙인들이 없지 않습니다.

 

 우리는

과거의 흔적으로 부터

어린 나귀 같은 두려운 멍에로 부터

주님 십자가의 이름으로 놓여나

우리 빈 가슴의 영혼이

그득 주님으로 채워 질 때까지

온전히

주님 안에서 기쁨을 누린 후

때가 되면

우리 주님께서

결단을 원하십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기를 요.

 

하지만

그 십자가는

마치

어린 나귀가 지기 힘든 무게지만

창조주를 등에 모시고 가는

그런 놀라운 역사가 될 것입니다.

 십자가 사건 후

오순절 성령 강림 후

지금 보여지는

그 유치한 환호의 기쁨 보다

몇 백 몇천배나 귀중한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슬프지만 기쁘고

힘들지만 익사이팅한

우리의 삶이

주님 안에서

죽을 때까지 이루어지는

놀라운 심령 천국 안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그래요.

나는 나귀였습니다.

하지만

주님을 만나고

내 삶이 방향이 뚜렷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난 환호를 합니다.

허락된 환호입니다.

이제

주님 뜻대로

깊이 이끌리며 살것입니다.

 난 모든 것을

이제 주님 앞에 내려 놓겠습니다.

주님 내 고삐 잡아 이끄시는 대로

그리 그리 끌려 가겠습니다.

그것은

힘듦이지만

그것은

또다른

놀라운 나의 인생의 기쁨이 되리라 압니다.

 

 

 

 

 

적용

1.  성경 여섯 장을 읽겠다.

 

2. 나귀였던 나를 묵상한다.

 

3. 주님을 업고 다니는 나임을 묵상한다.

 

4. 주님은 나에게 무엇을 원하시는 가 묵상한다.

 나귀는 업고 다는 게

나는 주님을 위해

 찬양을 하고

 진료를 열심히 하고

 환자를 열심히 보고. ...

 또...

 

5. 너무 달콤한 샬롬 만을 원하여 주님을 따르 던 것 만은 아닌가?

 고난이 있어도 과연 난

 지금 처럼 지속적인 평강을 외칠 자신은 있는가?

 묵상할 것이다.

 

6. 수요일 기도원예배 간다.

 

 

 

 

 

기도

 주님

나귀 같던 저

그 중에서도

어린 나귀 같던

저를 구원해 주시고

 지금껏 주님 인도하셨습니다.

그 주님을 찬양합니다.

그 주님을 사랑합니다.

어리석게도

주님이 날 풀어주셨음에도

이제껏 길 몰라 헤메이는 듯

착각을 하여왔습니다.

주여.

이제

주님의 그 환호와

주님의 그 평강을 깊이 이해하오니

저로

주님 등에 태운 이 다리에

힘을 허락하소서.

주여.

부족한 부분은 아시지요?

특별히

간절히 소원할 것은

예루살렘 성

천국의 그 새 예루 살렘을 향해

나가는

내 가녀린 발에

힘을 주소서.

당신의 성령으로 굳건케 하소서.

확실한 나의 본분을 알고

기쁘게 가게 하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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