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한므나 를과 한 므나 가의 종과 일곱 종 ( 눅19:11-27 ) 본문

신약 QT

한므나 를과 한 므나 가의 종과 일곱 종 ( 눅19:11-27 )

주하인 2008. 3. 4. 12:56

제 19 장 ( Chapter 19, Luke )

 

 

날이 저물어

오라 하실 때

영광 중에 나아가

열 고을의 상급을

얻을 수 있겠는가?

두려워 하겠는가?

아무리

이 땅의 삶이

아름다워도

밤이 오면

집으로 돌아가야 만 하듯

주님 오시는 그날엔

무어라 말할 까?

 

 


11.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있을 때에 비유를 더하여 말씀하시니 이는 자기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고 저희는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함이러라

  주님은
우리의 마음을 헤아리셔서

응답을 하신다. 

 하나님 나라가 곧 나타날 줄 알고

들떠 있는 제자들의 마음을 헤아려

비유를 더하셨다.


12.  가라사대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 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갈 때에  
13.  그 종 열을 불러 은 열 므나를 주며 이르되 내가 돌아오기까지 장사하라 하니라 
 

 열 사람의 종에게

골고루 한 므나씩 나눠 주시며

장사하라고 하셨다.

 

 골고루 나누어 준게

꼭 달란트, 재능 만은 아닐 듯 싶은데

무얼까?

 열 사람의 종에게

모두 나누어 주었는데

나머지 일곱 종의 얘기는 어디로 갔을까?

어떻게 되었을까?

 

 거론의 가치 조차 없어서 일까?

그렇다면

누구에게나 나누어준

므나라면

받을 자격이 있는 자를

기독교인 전체로 제한한다면

일곱 명의 종은

어떠한 상태일까?

 한므나 남긴 종이

악하다는 소리를 들은 정도라면

아예 일곱 종처럼 혼나지도 않으려면

복지 부동하여야 하는가?

 

 
15.  귀인이 왕위를 받아 가지고 돌아와서 은 준 종들의 각각 어떻게 장사한 것을 알고자 하여

     저희를 부르니
 

 예수님 재림 하셔서

우리를 부를 때

므나에 대하여

말씀하실 텐데

그 므나가

정말 무엇인가?

 

 전도인가?

 
 
16.  그 첫째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한 므나 열 므나를 남겼나이다  
17.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하고   
18.  그 둘째가 와서 가로되 주여 주의 한 므나 다섯 므나를 만들었나이다  
19.  주인이 그에게도 이르되 너도 다섯 고을을 차지하라 하고
  

 므나에 대한

주님의 의도는

시험의 의도신 듯하다.

그리고

그 남긴 모든 것을

상급으로 주시려는 것이시다.

 즉,

므나의 주신의도는

전적으로 우리를 위함이고

그 모든 것은

상급을 위한 시험이란 것이며

므나를 받는 자의 의무는

'충성'을 전제로 한다는 것이다.

 

 충성하는

열므나와 다섯 므나의 종들의

므나에 대한 태도를 보면

"므나'를' "이란  목적어로 사용한 표현을 보아

주님이 주신 므나의 의도를

잘 아는 자들이다.

 그들에게

므나는

그들을 옥죄는 또다른 감시의 주체,

즉 멍에로 본게 아니고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용하여 얻어야할 도구일 뿐이라는 것을

확실히 아는 것이다.

그들의 주인은

하나님이신 주인 밖에 없고

부여된 므나는

무거운 의무가 아니고

허용된 자유로 본 것이다.

그러기에 그들은

주님이 주신 것을 -므나를- 기쁘게 사용하였을 것이다.

 그러기에 효율 성 있게

했을 것이다.

 

 


  
20.  또 한 사람이 와서 가로되 주여 보소서 주의 한 므나 여기 있나이다 내가 수건으로

     싸두었었나이다  
21.  이는 당신이 엄한 사람인 것을 내가 무서워함이라 당신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나이다  
22.  주인이 이르되 악한 종아 내가 네 말로 너를 판단하노니 너는 내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 엄한 사람인 줄을 알았느냐 
 
  반면,

한 므나를 받고도

그대로 남긴 

종의 표현은 다르다.

 한 므나'가'라 한다.

 

 그 한 므나가

자신을 옭죄는 듯한 느낌이다.

그 한므나가

그 삶을 크게 힘들게 했다는

느낌이다.

그 한므나가

멀리 떠나간 주인이

자신 대신 감시의 존재로 알리기위한

징표로 아는 듯한 표현이다.

그러기에

그에게는

그냥 두면

그 한므나가

그의 가슴을 옭죄어 

늘 무엇을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으로 느껴졌을 것이기에

그 한므나의 무거운 짐을

탈피하기 위해서는

꼭꼭 싸서 묻어 두어야 하는

귀찮고 두려운 상징물일 뿐인 것이다 .

그게

그렇게 표현 된 것이다.

 

 그의 잘못된 인식은

주님의 신랄한 질책을 받게 된다.

 

 그래도

매는

사랑의 표라 하셨는가?

 

  

24.  곁에 섰는 자들에게 이르되 그 한 므나를 빼앗아 열 므나 있는 자에게 주라 하니 
  곁에 섰는 자들

일곱 종 이 아닐까?

그들은

관심 밖이다.

이야기의 언급도 되지 않는다.

  

 '부끄러운 구원'이라는

말을 종종 듣는다.

겨우 지옥 백성 면한..

수만 명의 무리들이

주님을 따르지만

꼭 주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따로 말씀하신다.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은

그냥

부끄러운 구원 받은

일곱 종이고

곁에 섰는 자들이다.

 어찌되었던간에

므나는 빼앗겨 열므나 번 자에게 주어진다.

그리 보면

므나는

임무이되

축복이다.

 므나는  

시험이지만

상급 시험이다.

생각 만 바꾸면

기쁨인 것이다.

 

 므나는 과연 무엇인가?

믿는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지는 임무이고

충성을 요하는 시험이기에

의지를 발해야 하고

하늘에서 상급으로 그냥 나누어 지기에

엄청 귀한 선물이기도 한...

 

 전도 일 수도 있다.

구제일 수도 있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똑같은 달란트가 있는 것은 아니다.

아무래도 적극적 성격을 가진 자는

전도나

구제가 더 쉬울 수는 있다.

그렇다면

공평치 못한 므나가 될 수도 있다.

나중에

다시 하나의 므나를 돌려 받는

열므나의 종에게

전도를 상처럼 주면

그것은 또 논리에 맞지 않는 듯하다.

 

 분명코

므나는

힘들수도 있지만

귀한 선물일 수도 있는 것이다.

 

 므나를

'성령'으로 대치시키면 어떤가?

 이 땅의 삶을

주님 안에서 살기가

정말 녹녹치 않은 환경이다.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주님 뵙기 전

정말 선하고 겸손하고, 온유하고, 절제하고.... 하길

원하지만

세상의 유혹은

세상의 엄청나게 빠른 속도의 변화는

눈을 뜨고

온전히 서 있기도 힘들게 한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 믿으시라고

온전히 성화되어

천국에 가자고

아무리 소리를 발해도

그들은 들을 수 조차 없다.

아니,

열심히 기도하고 신앙생활 한다고

노력하는 우리들 조차

아차 하면 넘어지기 쉬운 형국이다.

실족하지 않고

서 있음 만 해도

참으로 귀한 세상이다.

 그러기에

이 귀한 성령의 은혜를

누구에게나 주셨지만

그 성령을

귀찮은 존재

고리 타분한 존재

기도하고 은혜받고 하면 좋지만

그 후

행해야할 충성을 생각하면 골치가 아플 것 만 같아서

그 성령이(한 므나'가') 두려운 것이다.

 

 현실을 돌아보면 그렇다.

직장 내에서도

친구 들 중에서도

기독교 인이지만

성령, 성경, 예수님 얘기하면

비웃는 사람들이 없지 않아 있다.

그들은 단지 일요일 예배에 참가하는 것으로

족하지.. 라는 푸념의 소리를 하기도 한다.

 일곱 종 같은 자들이다.

 예수님의 은혜를 받고

첫사랑을 경험하고

일시적으로 놀라운 체험을 했으나

더 이상의 진척 자체를

두려워 하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경우도 있다.

'한 므나 가'의 종 같은 사람들이다.

 이들에게는

한 번 비취임 받고

하나님의 비밀을 허락 받은 자들 중에서

타락한 자 같은 자.. 라는 성경의 표현 같은

자가 나오지 말라는 법이 없다.

 이들에게는

주님께서

준엄한 심판이 기다리고 있을런지 모른다.

 

 성령의 은혜와 인도하심을

철저히 사모하며

자신의 달란트에 따라

최선을 다하여

열심히 사는 사람들,

그들은

선교로 나가기도

열심히 구제의 자리에 나가기도

교사의 자리에 서기도 한다.

물론

자아가 아니고

성령의 이끌리심에 받은 자 들에 국한 되지만..

어떤 이들은

깊이 깊이

자신의 내적 성화를 위하여

일상의 삶에서

Bussiness as Mission

즉 '소명자로서의 삶'을 사는 분들이 있다.

틈이 나면

전도하고

틈이 나면 말씀보고

틈이 나면 기도하고

틈이 나면 기쁜 주님에 대하여 알리고

틈이 나면 가난한 자들을 돌아보고

날마다 말씀에서 떠나지 않고.. .

그들의 삶은

겉으로 화려하게 들어나지는 않지만

자신의 달란트에 맞게

주님이 명하시는

삶을 살아드림으로써

자신 보다는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일을 즐겨하고

단 일분이라도

주님의 살아계심을 느끼지 못할까봐

늘 기도와 묵상과 관상으로

하루를 보내는  자들이다.

 

 이런 모든 것들이

주님이 주고 가신

그 골고루의

한 므나가 없으면

불가능한 이야기다.

그 한므나를 '성령'으로 보아도

합당할 일이다.

 비록

주님이신 성령 하나님을

낮추려는 의도는 아니시지만

골고루 나뉘어진 므나의 도움에 대하여

아주 합당한 해석일 수도 있다.

 

이제

그 성령님

그 성령님으로 인하여

쉽게

아주 쉽게

이 땅의 삶을 힘있게 영위할 수 있게 된다.

주님이 말씀하신 말씀을

주님이 허락하신 므나인 '성령님'을 도구로 -죄송 ^^;;-

내 달란트에 맞추어

약간의 의지를 발휘하여

열심히

성령 충만한 삶을 살게 되면

열 명 백명 ...

그들이 나로 인하여

주님을 알게 되고

성령의 기쁜 삶을 살게 되니

죽어가는  이 땅의 영혼들에게

꽃이 피는 생명력을 불어 넣는 일이 되니

그게 얼마나 귀중한 일일까?

 

주님

감사합니다.

주님 뜻대로 살길 원합니다.

주님 허락하신  성령님

그 분으로 인하여

나에게는

무언가 짐이 지워진 듯하지만

그게

짐이 아니고 축복임을

잘 압니다.

그럼에도

순간 순간

주님의 뜻대로 따르기가 겁이나

못들은 척 하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한므나의 그 종 같은

마음이 아닐런지요.

 

주님은

므나

즉 ,

성령의 말씀이

무거움이 아니고

축복임을

빼앗아 다시 나눠 주시는

그 뜻에

알 듯도 합니다.

주여

간절히

간절히

바라옵기는

허탈한 마음 들지 않도록 하소서.

나만.. 이라는

어리석은 두려움으로

그 귀중한 주님의 므나를

꽁꽁싸매어 두는

어리석은 종 같이 되지 않기를 원합니다 .

 

주여

기쁨으로 받게 하소서.

기쁨으로 살게 하소서.

기쁨으로 주님 맞게 하소서.

기쁨으로 일생을 보게 하소서.

주님 계시면

주님의 므나가 있는데

걱정할 일도

아무 두려워할 일도 없음을 압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세상 부귀 안일함과 

1
세상부귀 안일함과 세상근심 하다가
주님 나를 찾으시면 어떻게 만날까
주님 내게오시면 나 어찌 대할까
멀리 방황하던 나 불쌍한 이 죄인
이제 주만 생각하며 세상 근심 버리고
손들고 눈물로써 주만 따라 가오리다

2.
세상일에 얽매여서 세상일만 하다가
주님 나를 부르시면 어떻게 만날까
주님 내게 오시면 나 어찌 대할까
멀리 방황하던 나 불쌍한 이 죄인
이제 주만 생각하며 세상권세 버리고
오직 주만 바라보며 주만 따라 가오리다

3.
지금까지 내가 한일 주님께서 보시고
훗날에 나를 보면 무어라 하실까
주님 내게 오시면 나어찌 대할까
멀리 방황하던 나 불쌍한 이 죄인
이제 주만 생각하며 세상 영광 버리고
십자가를 내가 지고 주만 따라 가오리다

출처 : Tong - Good Man^^님의 CCM통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