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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QT

난 나비냐 나방이냐(골 3:1~11)

주하인 2007. 3. 6. 13:54

2007-03-06 골로새서 (Colossians) 3:1~3:11

 

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꽃에 있지만 난 나비냐 나방이냐? )

 

 나는 누군가?

나는 죽었다 살아난 자다.

오늘 묵상에서 그리 말씀하신다.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았다고...

틀림없이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모른다.

자꾸 잊는다.

세상의 번잡함과 유혹이 날 잊게 한다.

 내가 누군가를 잊는다는 것은

내 정체를 잊는다는 말이다.

내 정체가 누군가를 안다는 말은 건강하다는 말이다.

세상에서도 정체성을 찾기 위해 입양갔던 아이들이 부모 찾아온다.

부모와 핏줄이 그의 정체를 밝혀주는 것이고 정체를 잊으면 혼란이 온다.

그게 미치는 지름길이다.

그러나

실제로 일상의 삶에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스스로 정체를 절대로 잊지 않고 사는가?

아니다.

 

아침에 내일 제주도로 수학여행가는 둘째가 심히 아프다고 투정을 한다.

이 아이.

머리를 만져보니 열이 없고 외견상은 너무나도 튼튼하다.

순간 옛날 어릴 적 부터 왕따의 경험이 있던 아이라서 같이 어울리는데 두려움을 가지고 있어서

자주 여행을 같이할 때 약간은 힘들어 하던 경험이 있어왔다.

그래서 불현듯 아이의 그 꾀병이 도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서 마음이 그 아이를 절개 해부하여 보고 있었다.

그리하여 꾀병으로 단정을 짓고 출근했다.

그러면서 마음에 부담이 온다.

아이가 실제로 안아프면 그것은 마음이 아픈 것이고

아프면 육체가 아픈 것이다.

어디가 아파도 다 아픈 것이다.

난 내 정체를 잊고 있다.

 아버지로서의 정체.

나이든 사람으로서 위안을 해야할 정체.

하나님의 자손으로 베풀어야할 사랑 덩어리로서의 정체.

 

아..

버스 안에서 불현듯 그 사실을 깨닫고 회개하며 왔다.

그럼에도 오랜 옛버릇으로 멍하니 있으며

아이를 위해 중보하지도 못했다.

 

묵상에 이리 나온다.

'난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 받은 사람이다.

 그러니 그대로 살아야 한다. '

 

왜 이리도 세상에 살면서 정체를 잊고 사는가?

비단 그게 내 아들에 대한 문제 뿐인가?

내 곁에 오는 가까운 자들.

환자 분들.

나와 상관없이 외롭고 힘듦을 조금이라도 알아주었으면 하고 오는 현시대의 수 많은 영혼이 빈자들.

그들을 위하여

나를 다시 살리신 주님이

죽었던 나를 살리신 것처럼

그들을 위해 살 길을 베풂도 옳지 않은가?

 

 

 

 

 
2.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 분명 이분도 위로는 향하지만 예수님을 위함이 전제가 아니면 그 목표는 땅엣 것임이 분명합니다.


 
그래

위엣 것을 생각해야 만 한다.

땅엣 것을 생각지 말아야 만 한다.

 당연히도 난 위에 살 사람이고 그리스도로 인해 그리 되었기에 그렇다.

 

 그렇다면 위엣 것을 생각하란 것은 무엇인가?

천국의 삶 을 의미하는가?

물론 그렇기도 하다.

천국의 삶이라면 얼마나 행복할까?

그 삶만을 언제나 기억할 수만 있다면 이 세상에서의 삶은 얼마나 의미없고 하찮고 항상 기쁜 마음을 유지할 수가 있다는 말인가?

 마치 대학 시험에 합격해놓은 마지막 겨울 방학의 후련함 처럼 말이다.

 

그러나

항상 좋은 것 만을 보아도 늘 무뎌지는게 인간의 죄악된 본성이거늘

그 본성을 어겨가며 늘 그러한 상태를 유지함이 가능하단 말인가?

 

그렇다면

일상에서의 '위엣 것'이란 어는 것을 의미하는 가?

 

 이런 것인 것 같다.

천국에서의 삶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정서를 이 땅에서 이루어 가는 것.

그래야 하늘 나라의 질서가 유지가 되지 않겠는가?

당연히도 예수 십자가의 보혈로 우리는 의인이 되었다.

허나

정확히 말하면 의인이 되었을 뿐 지금도 의인처럼 행동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늘 주님 십자가를 묵상하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매일 살아있는 산제사를 드리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야만 되는 것을 성령의 기쁨을 놓치는 날이면 더욱 심히 몸서리쳐지게 느껴진다.

그러한 위엣 것을 찾는 매일의 삶이

바로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를 내 속에서 맺는 길이고

그길 만이 예수그리스도의 향기를 내 뿜는 길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지금의 나는 아직도 그렇지 못하다 .

난 겸손해야 한다.

난 더 온유해야 한다.

난 더 절제해야 하고

난 더 양선해야되며

난 조금 더 자비로와야 하고

난 지금보다 더 오래참아야 하며.......

 

 아랫 것이란 무엇인가?

 

아래에 나온다.

 

 

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금방 나온다 .

음란, 부정, 사욕, 악한 정욕, 탐심

많이 듣던 것들이다.

 현재 우리 나라, 세상에 만연하고 있는 문화코드와 어찌나 이리 일치하는 고?

동성애가 문화로 자리 잡고

부정은 하도 많아서 이제는 웬만한 것은 죄로도 느껴지지도 않고

자신의 사욕을 위해서는 남의 불행에는 눈도 깜짝하지 않으며

자신의 욕심을 위해서는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는

아니

그것 자체를 즐기는

관조하는 악한 정욕들...

그리고 탐심

돈을 탐내고

명예를 탐내고

TV오락 프로그램 만 봐도 남을 누르는데 열을 내며 자신의 승부욕 자체를 탐내고....

이게 세상의 돌아가는 현실이다.

 여기에 동조하지 못하는 자들은 부족한 자들이고 이해하지 못할 자들로 치부되는 게 작금의 현실이다.

 

  이 땅엣 것 들 !!

 

그러나

과연 얼마나 난 이 땅엣 것들을 놓을 수가 있는가?

과연 자신이나 있는가?

다 버려야 하는가?

버리기가 너무나도 어려울 것들을 어찌 세속에 살면서 다 ....

 

 물론 도 닦는 자들이나 고행을 즐기는 자들과 우리 기독교 인들은 너무도 다르다.

그들은 그들의 힘으로 면벽과 수행을 하지만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따르려는

단지

의지와 지혜와 그 체험만 가지고

주님의 뜻에 맡겨 내려놓을 기다림만 가진다면

주님이 알아서 하실 것이고

단지 우리는 그 분의 도우심을 빨리 하시도록 촉발하는 작용만 할수 있을 뿐이다.

 

문제는

이러한 땅엣 것을 배제하려는 노력을

내가 누구인지 확실히 인식하는 정체성 확립이 우선이 되지 않으면

또 다른 바리새파의 율법이 될 뿐이라는 게

수많은 기독교인들의 실족을 통해 증명되는 바이다.

 

내가 그리스도로 인하여 완전히 다시 살아난 자임을 인식해야 한다.

날마다 주님 십자가를 묵상하는 일정의 시간을 할애하여야 한다 .

그 분의 도우심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눈 앞에 만나는 개인적 체험을 해야 할 것이다.

아니

그보다

진심으로 내가 그 분으로 인하여 감사의 소리가 저절로 나와야 한다.

그렇다면

이 땅의 것은 저절로 나의 관심사에서 멀어질 것이고

늘 주님 그 분을 사모하고

사모함의 결과로

우리 영혼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서서히 뿜어져 나오며

시간이 되면

그 분께서 우리로 하여금 일으켜 세우시며

세상을 향하여 당신의 뜻을 나의 달란트에 맞게 펼치라는 말씀을 하실 것이다.

 

 

10.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이게 새 사람을 입는 과정이라 생각된다.

새사람이 완전히 입혀지고 더 이상 세상의 것이 그 영혼을 미동이라도 할 유혹거리가 되지 못할 때

그 때가 되면 지식에까지 새롭게 되는 현상이고

그게 바로

오랜 역사가 증명하는 '성자'

그리스도의 처음익은 열매

이긴자가 되지 않을까

그게 바로 영적 아비의 단계를 넘어서는 단계가 되지 않을까 싶다.

 

 

 

11. 거기는 헬라인과 유대인이나 할례당과 무할례당이나 야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분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
 그런 분들에게는

세상 속에 어디에서나 그리스도를 만나 뵐 수 있는 상태가 되며

만유를 보면서 그리스도를 보는 그런 상태가 될 것이다.

 

 

 적용

 

1. 오늘 '위엣 것'은 어떤 모습으로 나에게 다가올까?

 

2. 일상에서 땅엣 것이라는 것을 몇번이나 느낄 것이며

   그 인식되는 땅엣 것을 몇번이나 배제해 나갈 수 있을 것인가?

 

3. 둘째를 더욱 사랑으로 감싸야 겠다.

 

4. 기도한다.

 

5. 성경 5장 읽겠다.

 

 

 

기도

 

주님

오늘도 말씀을 깊이 허락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자꾸만 잊고 있습니다.

주님 제가 죽었던 자였었음을요.

제가 죽은 세상의 것을 아직도 탐내해 하는 저급 품종의 강아지 같음을요.

이제

귀한 성령의 열매를 단 한번이라도 더 맺을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도우소서.

주님 늘 당신의 귀한 것을 제 영혼에 조금이라도 더 간직하고

주님의 말씀으로 제 인지 체계 를 온전히 세척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그래서

세상의 똑같은 일에서

주님을 직접 만나길 원합니다.

지금껏 습관적으로 만나고 행했던 것들에서

주님을 위하는 만남과 주님을 위해 하는 일로 바꾸어 나갈 수 있기를 원합니다.

이 땅의 삶이

이제는 나 혼자 사는 삶이 아니고

주님이 나로 인하여

세상에 영향을 더욱 내 보내실 수 있는 도구로 사용 받기를 원합니다.

주님

위엣 것을 사모합니다.

주님

위엣 사람임을 더욱 깊이 인식하길 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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