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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는 동안( 삼상 17:28-40 )

주하인 2008. 6. 7. 12:39

제 17 장 ( Chapter 17, 1 Samuel )

 

 

비온 후

우리 집 앞 개울..

참 좋다.

축복이다.

 이것 만 가지고도

내 인생을

그리도 어렵게 만들었던

뒤돌아 보기도 싫은

그 광풍이

전혀 생각나지 않는다.

 

 

 

 

 주님의 축복 만 생각난다.

 죽을 것만 같았던

그 사자와 곰의 입이

이제는 함께 하셨던 주님의 기억만 으로

떠오른다.

 

 

 

 


28.  장형 엘리압이 다윗의 사람들에게 하는 말을 들은지라 그가 다윗에게 노를 발하여 가로되 네가

     어찌하여 이리로 내려왔느냐 들에 있는 몇 양을 뉘게 맡겼느냐 나는 네 교만과 네 마음의

     완악함을 아노니 네가 전쟁을 구경하러 왔도다
 

 가까운 사람이 문제다.

가장 가까운 곳에

원수가 있기도 하다. ㅎㅎ


 아주 익숙하다.

 

노를 잘 발한다.

질투도 많이 한다.

그럴 듯한 이유로

묶어서 꼼짝 못하게 하고 싶어한다.

손해를 끼치는

나쁜사람으로 몰기도 한다.

가끔은 직접적으로

인신공격을 한다.

선한 의도를 오해 내지 곡해하기도 한다.

능력을 폄하하려

각종 모해성 발언을 한다.

 

 물론,

그 바탕이 그리 악하지 않은 줄 알고

그게 형제이기에

그리 오래가지 않을 줄 알지만

그 형의 소리는

다윗의 막내로서 무시하는

상대적 교만함과

더불어

기름 부음을 받은 동생에 대한

질투와

당혹 등

혼란으로 뒤죽 박죽 되어 있는

마음이

그대로 읽혀진다. .

 

 너무 익숙한

사람들의 악함과 

가까이서 보는 소리 들이

수천년 전의 성경 속의 사람들 입에서

그대로 나옴을 보며

살아 있는 성경 임을

다시금 절감한다.

 

 자주 읽어보던 구절이

시간이 지나면서

속상함이 덜 하게 다가오는게

스스로 위안이 된다.

처음 읽었을 때

마치 나에게 하는 소리 같아서.ㅎㅎ..

속이 많이 상했었다.ㅎㅎ

 

 

 


29.  다윗이 가로되 내가 무엇을 하였나이까 어찌 이유가 없으리이까 하고  

 다윗이 배울 점을 보인다.

 

 점잖다.

"어찌 이유가 없으리까"

이 말 한마디에

모든 '하고 싶은 말'이 다 녹아 있다.

 

 

 

30.  돌이켜 다른 사람을 향하여 전과 같이 말하매 백성이 전과 같이 대답하니라 

 그리고는

돌이켜

다른 사람을 향한다.

 

 이것은

아마도

'훽~' 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냥

부드럽게 였을 것이다.

 

그들

형제들은

이미

그의 상대가 아니다.

 

그는

하룻 강아지와 다투는 사자가 아니었다.

강아지의 앙앙 거림은

의미없는 소리들이다.

마귀들의 손가락질은

'어찌 이유가 없으리까' 하고

돌아서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

 어찌

사자가 함부로 다투랴.

 

  
 

 

 

34.  다윗이 사울에게 고하되 주의 종이 아비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떼에서 새끼를

     움키면  
35.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 죽였었나이다  

 이것이 놀랍다.

그는

광야에서 보내는 시절에

놀던 것이 아니다.

 그 때에

사람의 눈에 뜨이지는 않았었지만

사자와 곰을 통하여

연단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중요하다.

 

믿음에는 행동이 필요없다는

현대의 지나친 믿음지상주의나

반대로

봉사나 구휼 만이 우선인듯

행동을 앞서는 자들은

믿음 지상주의를 비웃는 경향이 있다.

 한쪽으로 치우친 것은

모두 정답이 아니다.

 

 하나님은

올바로 믿는 자들에겐

필요하신 도구를 갖추게 하신다.

믿음과 행동은

같이 간다.

믿음이 깊어지면

행동은 결과로 나오고

행동은

주님을 믿음이 기뻐서 하게된다.

 

 이게 Bussiness as Mission의 또다른 예이기도 하다.

교회와 일상의 분리.

삶과 신앙의 분리는

이분론적 믿음이다.

신앙과 삶은 하나이어야 한다.

삶을 통해서

주님의 말씀을 실행하고

주님의 말씀이

인생에서 녹아져 배어 나오는 것이

주님의 원리다.

주님을 손잡고 가다가

주님이 시키시는 대로 하게 되는 것이

코람데오의 신앙이다.

이러한 삶은

일상에서

자신의 주어진 일에도

최선을 다하게 되고

최선을 다하는 일이

주님의 뜻에 순종하는

또다른 신앙생활임을 알게 되는 것이고

그 과정에서

놀라운 하나님의 평강을 맛보고

드러내게 되고

그러다보면

자신의 영역에서

한 영역의 경지에 오르게 되는,

예수님이 설파하신

'하나님을 바라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리라'하는

그 놀라운 말씀이 경험되어 지는 것이다.

 

 다윗은

사자와 곰을 막아내는

양치기로서의 용맹을

하나님을 믿고 시행하다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체험하고

그 분을 믿는 신앙을 깊게 하는 계기가 되고

그러한 믿음은

나중에

하나님의 때에

세상을 향해

자연스레이 쓰게 되는 것이다.

 

 주모도

나이 오십 다된 나이에

새로운

의학 기법을 습득하게 해 주셨다.

놀라운 일이다.

내 스스로 생각해도......

그리고는 기다린다.

 

 

 

 

36.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이리이까

       그가 그 짐승의 하나와 같이 되리이다  

 다윗은

그러한 경험을 통하여

당연히도

세상사람들과는

다른 감정반응을 보일 수 밖에 없다.

 

37.  또 가로되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가라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기를 원하노라

 

그들,

오합지졸 군사들은

하나님을

이론적으로나 

혹은

주일 날만 뵙는

현실과는 동떨어진 분으로

인식하는 자들이지만

 다윗

그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은

늘 곁에 계셔서

사자와 곰의 입에서도

다치지  않게 하시는

살아계신 분이심이

그들과  

철저히도 다르다.

 

 그들은

그를 이해 못하는 것처럼

그들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철저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보라.

사울이

' 너와 함께 계시기를 바라노라'라 하지 않는가?

바라다니..

다윗에게는

항상 현실화되어 같이 계신 분이신데..

겨우 바라다니.. 

 그,

다윗은

너무도 당연히

하나님이 함께 계시니

사자보다 약하고

곰보다 적은

골리앗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사울의 믿음과는

격이 다르다.

 

 

  
39.  다윗이 칼을 군복 위에 차고는 익숙치 못하므로 시험적으로 걸어보다가 사울에게 고하되 익숙치

      못하니 이것을 입고 가지 못하겠나이다 하고 곧 벗고  
40.  손에 막대기를 가지고 시내에서 매끄러운 돌 다섯을 골라서 자기 목자의 제구 곧 주머니에 넣고

      손에 물매를 가지고 블레셋 사람에게로 나아가니라 

 

 자신에게 맞는 것이

최고이다.

익숙한 달란트로

최선을 다하는 것을

주님이 원하신다.

 

 다윗은

돌 다섯개로만으로도

사자와 곰을

이겨냈다.

그런 그에게

사울이

자신의 경험과

다른 분들의 고찰의 결과물인

갑옷을 입히고

군장을 채우려 한다.

하나님의 사람에게

세속의 물건이자 세상의 원리로

칭칭 동여매려한다.

 높은 자에게

낮은 자가

헛된 염려로 가르치려 한다.

 

 다윗은

당연히도 불편하다.

'벗는다'

자신은

자신의 것이 있다.

자신은

하나님과 함께 해왔던

결과물이 있다.

'매끄러운 돌 다섯 알"

 

 멋지다.

황홀하다.

솔직히

'공감이 간다.'

 내 무슨 자격이 있다고 공감을..?

하지만

지금 저 입장에 가져다 놓으면

두가지 마음이 있다.

 

하나는

그래,

이해가 간다.

다윗이 그럴 수도 있다.

그의 입장에서

이렇게 하여

이런 반응을 보일 거야.. ..라는

영적인 공감대가 있다.

묵상의 글을 옮길 때

내 눈앞에 떠오르는

그림이 있다.

그것은

내 경험에 비추어지지 않으면

말 그대로 공상이겠지만

공감의 경험에서 맞추면

그것은

하나님이 그려주신

'관상'이나 렉시오디비나와

비슷한 현상이 아닌가 싶다.

 

 이제

또하나의 마음.

그것은

열등감이다.

두렵다.

아직은..

솔직히

골리앗의 자리에

격투기 선수들을 올려다 놓아도

다리가 덜덜 떨릴 것 같다.ㅎㅎㅎ

 

가끔

둘째와 집에서

침대에서 '프라이드'나 '씨름' 장난을

자주친다.

아내에게 침대 고장 난다고 혼나면서도..

그럴 때

아들에게 깔리면

숨도 못쉬고 죽을것만 같을 때도 있다.ㅎㅎ

 그런데

최홍만 선수보다 훨씬 큰

골리앗이

날 누르고 있다고 생각하니

오금이 덜덜 떨릴 것 같아

그 다윗이 놀랍다.

 

 아..

혹시 다윗은 아들이랑

프라이드 격투기 장난안해봐서 그런가?ㅎㅎ

 

 어찌되었든 간에

나의 하나의 감정은

주님께 감사드릴 감정이다.

내 속의

놀라운 변화와

그 놀라운 변화를 가지기 위해

지난 오랜 세월

광풍과 같은 시간을 거쳐오는 동안

늘 나와 함께 하셨던

주님의 놀라운 평강이 기억나고

그 기억과 더불어

나름대로

주님이 살아계셔서

앞으로도

더욱 좋은 쪽으로 인도하실 것임을

알게되어 감사하는 것이고

내 부족한 부분은

나름의 한계를 인정할

올바른 눈을 가지게 됨을 감사하고

앞으로도

그런 부분까지

주님이 원하시면

더욱 나아지게 할 여지가 있으니

감사한 것이 아닌가 싶어

또 한 감사하다.

 

 

 

 

적용

 

1. 감사하는 하루가 된다.

 감사하는 자는

화날일도 가벼워지고

인내못할 일이 없어지는 것이다.

 

2. 성경 여섯 장 읽겠다.

 

3. 토요일

 주님을 잊지 않는 하루가 되려 노력한다.

편한 하루는

나태한 하루와 동일한 의미였었지만

이제는

그러한 부분에

조금 훈련을 하겠다.

 

4. 혼란한 세계적 상황에

 두려워 하기 보다는 깨어 있는 자가 되겠다.

 

5.어찌 이유가 없으리이까 를 레마로 외우고 다니겠다.

 이유는 있지만

 굳이 변명하려 하지 말자.

 

 

6. 나, 내 아들들에게는

 자신 만의 달란트가 있다.

과도한 세상적 기준과 원리를 내려놓겠다.

 나 자신에게도

아이들에게도....

 

 

 

기도

 

주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주님

어리석은 도전의 말에

다윗과 같이 반응하게 하소서.

어찌 이유가 없으리이까  

이 말씀을 명심하고

그냥

가벼이 흘려 보내는

담대한 하루가 되게 하소서.

감사하는 자로서

이기는 하루가 되게 하소서.

주여

제 자식들을 지켜 주소서.

주여

주님 앞에 서는 자가 되게 하소서.

주여

우리 식구들 지켜 주소서.

아직은

세상의 뛰어난 자들처럼

경쟁에 발군의성적을 보이지 못하는 아이들과 식구들

주님 보시기에

보이지 않는

그 광야에서도

사자와 곰의 입에서 지켜주시고

그 과정에서도

아이들과 식구들의 믿음은

커져가고 있음을

저로 믿고 기다리게 하소서.

 

오시는 모든 블로거들

주님의 이름으로

하나가 되고

올바로 믿음을 가지게 하시고

같은 기쁨을 누리게 하소서.

주님의

놀라운 병사들로

쓰임 받게 하소서.

 

주님

이름으로 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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