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그래서 힘내어 산다[창5:1-32] 본문
차가운 한겨울
외로운 내 길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뒤덮는
짙푸르고 광활한 하늘
홀로 가지만
함께 하시는 주님
온 우주를 아우르는
그 거대한 에너지
그를
가슴에 담으며
난 다시 힘내어
남은 여정을 재촉한다
6 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7 에노스를 낳은 후 팔백칠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8 그는 구백십이 세를 살고 죽었더라
셋은 105세, 늦은 나이까지 불임이었다 ^^;;
그렇고는 800년 넘게 아이들을 나으며 902세까지 오래오래 살았다.
오래 기다리며 아이낳고
그후 봇물터지듯 오랫동안 아이를 낳고 살았다.
'지루하지 않았을까?'
21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22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23 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24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에녹은 제대로 젊은 나이 ^^;;; , 65세에 애를 낳기 시작하여
305세에 '단명'短命 했다. ㅜ.ㅜ;;
그렇지만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그냥 하나님이 데려가셨다. ^^*
얼마나 사랑하셨던지...
지금과는 비할바는 아니지만
그당시의 시간으로 보아 짧게 세상을 살았던게
슬픈 일인지...
하나님께 불려서 그냥 하늘로 직통으로 올라가 살았으니
기쁜 일인지...
어느게 옳은지는 당연한 거 아닌가?
그런데 세상에만 눈이 고정되면
슬픈 일, 저주 받은일로 보이지 않았을까?
난... .어디에 사는 사람인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인가?
25 므두셀라는 백팔십칠 세에 라멕을 낳았고
27 그는 구백육십구 세를 살고 죽었더라
므두셀라 역시 '180세' 늦은 나이에 아이를 낳았다.
불임 ^^;;;.. 이었다가... 늦게 대박터뜨리고
최고 장수를 한자.
이것도 나쁜 삶인가
좋은 삶인가?
32 노아는 오백 세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
노아는 더욱 '불임'이 심했다.
오백살이 되어서야 겨우.......
그러나 오래도 살았다.
하나님의 일을 처절히 하면서..
오십 몇년을 살다보니
알 것 다 아는 거 같고
재미는 그리 있지 않는 것 같다.
자식들도 그리그리 다 커있고
어느새 내가 영향을 미칠 영역에서는 멀어진 거 같구
부부간에도 더 이상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아도
흐를 것은 흐르고 바뀌지 않을 것은 바뀌지 않을 것 같다.
세상을 보아도 희망 보다는 악함이 자꾸만 커져 가는 것 같다.
소통을 이야기 하지만
그것은 입 센 사람들의 여과없는 강제 뿐이고
모두 자기 주장 뿐이지 아픔은 이곳 저곳 늘어가는 것 만 같다.
'힐링'프로그램이 대세고
슬로우.....를 외치며 웰빙은 벌써 한물간 유행이다.
대통령이 나와서 대박을 외치고
이웃나라의 수장은 고삐풀린 망아지다.........
아니 .. 마음 같아선 강아지의 센말 ^^;;을 외치고 싶을 정도로
경우와 도덕과 양심과 절제는 보이지 않는다.
'커밍아웃'이라는 그럴 듯한 명분으로
인간들이 서로서로 이해하면 다 되는 것 처럼
'양성애자', '동성애자'들이 세상에 뛰쳐나와 물을 흐린다.
그렇게 해도 그들은 생물학적 메카니즘, 심리적 메카니즘... 혹은
영적 메카니즘에 '고장'이 난 것은 당연한 것을..
그렇게 인간들이 서로서로 이해해주면
진실이 바뀌고 진리로 되는가?
다 괜찮은가?
그래도 그들은 생명을 잉태하지 못하고
신의 명령.. 번성하고 생육할.. 것을 못하는 상황은 달라지지 않는다.
아무리 사랑, 인간의 이해, 다양성, 소수....등이라는 미사여구를 바쳐도
그들은 고장나 있음이 사실 일 뿐이다.
그러한 것을 세상에 나와 '아니~~'라고 .. 떠드는데 .. 싫증이 난다.
물은 오염되고 공기는 형편없이 탁해지고
먹을 것은 날로 줄어가고
기온의 변화는 전 세계를 강타해서
설국열차가 미국에 내려 앉은 것 같다는 소리가 나온다.
더운 나라에 '눈'이 내리고
당연히도 '먹을 것'은 줄어갈 것이다.
곧... 예상되는 '계시록적 '상황이 펼쳐질 것이다.
............
다 ......떠나서.......
그냥 세상 만을 바라보면 아무런 '재미'가 없다.
살고 싶은 마음이 별로 들지 않는다.
의욕이 없어지려 한다.
'삶의 의미'가 '하나님 '께 있다는 것을 알지만,
영적인 의미가 인생전체에 매시 매초 영향을 미치기엔
나는 너무 지혜롭지 못하고
신앙의 연륜이 적으며 (38살에 예수님 믿기 시작했다. )
옛 성질이 너무~~ 강한 자다.
그래서.........넘어지는 횟수가 많다. ^^;;
그러니 자주 잊는다.
오늘 '성경구절'을 묵상하려 들어보니
참........오래들도 살았다...........는 게 첫 느낌이다.
이 지루한 삶, 오십몇년 사는 것도 힘든데
이리도 오래 살면서 어떻게 버텼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요즈음은 '백세 시대'라는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나는 가슴이 섬뜩하다.
하루 사는 것도 힘든데
더더구나 퇴직후의 암담한 베이비부머들을 볼 때 ....그것
축복이 아니고 저주라는 생각이 든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것을 몇십년도 아니고 900세 넘게까지도 살고
심지어는 에녹은 삼백 몇십년 산게 '단명'이고
비교되는 묵상의 주제 (주석에서 ㅜ.ㅜ;;) 니 이것을 어찌 받아 들일까 싶다.
그러면서 곧 눈에 들어오는 게
'참 많이도 낳았구나' 하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의 선조들이 하루하루 먹구 사는게 힘들어
삶이 지루할 틈도 없다가
자식들이 북적 거리면서 그들의 삶이 단조로울 일은 없었겠음은 알지만
그래도 몇백년은 어렵다.
그렇다면 매일을 버티고 , 몇백년을 버티는
다른 '삶의 의미'가 있지 않았을까?
아마........그게.. 인생 전부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명령과 관계가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당연히도 '생육하고 번성하는 의무' ,
그것이 그들을 오래살면서도 아무런 삶의 고민을 하지 않고 살게하는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사람들에게 '본능적'으로
일반은총으로 하나님의 명령이 그들의 유전자에 각인되면서
그들은 '고민'조차 할 이유를 느낄 수 없이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게 '축복' 아닌가?
그들에게는 삶의 의미는 '열심히 일하면서 정직하게 소출하고 자녀를 가능하면 많이.. '
구백여년씩 살면서 자식을 열심히 낳게 해야
지구가 하나님의 뜻대로 풍성해질 것이란..
그 상황에도 '불임'은 있었다.
노아를 보라 .
오백년을 불임으로 살았다ㅠ.ㅠ;
그 오백년은 어떠한 고통이 그를 짖눌렀을까?
지금이야 홀로 사는 사람들이 많으니 덜하지만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불임은 '칠거지악' 중의 하나였으니
그 시대에는 훨씬 더 .. 그랬을 것이다.
더구나 그 기간이 오백년을 넘어서니 ..
그 시간동안을 과연 '노아'는 어떻게 지냈을까?
지옥 같았을 시간.
난.. 이해가 아주 많이 간다.
비록 난.. 불임은 아니었지만
아마도 '소망'없는 불안의 시간들을 거쳐온 자로서 같은 마음 고생은 있었을 것으로 믿는다.
하지만, 노아가 어떤 사람인가?
방주를 수백년에 걸쳐서 산위에 만들어 낼 정도의 사람 아닌가?
그는 '하나님의 뜻'가운데 '연단'을 이겨낸 자다.
오백년.
더구나 하나님의 지상 명령인 '번성'을 이루어내지 못하는 자의 고뇌의 연단...
그에게 '삶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여기서 돌아보는 '삶의 의미', 그게 왜 중요한가?
당연하지만 의미가 없으면 왜 살까?
그냥 머리놓고 육신의 쾌락을 쫓다가 사는것도 젊음이 사라지면 줄어들고 마는것.
아니면 추악한 욕정의 추구자로 수십년을 더 살아도
그게 '돼지'의 그것과 무엇이 다른가?
설령 그리 산다해도 어찌 그렇게 해서 그들이 '수백년'을 더 살수 있을까?
삶의 의미를 다시 정리하지 않으면
산다는 것은 사는 것이 아니다.
지구에 '죄'를 짓는 것이고
생명을 깍아먹는 행위일 뿐.
여기서 '에녹'을 들여다 본다.
겨우 ^;;; , 겨우란다.ㅎㅎ .. 365세까지 밖에 ^^;; 살지 못했다.
(오늘도 이모티콘이 여지없이 많이 남발되는 것을 보니
하나님께서 내게 하시고 싶으신 이야기가 많은 가 보다 ㅎㅎ)
그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일찍 죽었다.
그러면서 '자식'들은 많이 낳은 것으로 보아
그의 삶은 충실하게 수행했다.
그러면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얼마나 충실히 살았기에
하나님이 산채로 천국으로 데려 가셨을까 싶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오래 사는 게 '복'일까 복이 아닐까?
특별히 그 시대에는 그렇게 사는 것이 당연함에 비추어
단명한 것이 '복'일까?
과연 '노아'와 '에녹'을 통해서
또한, 세상에 일반적으로 내려진 기준 (하나님의 뜻에 따라 '다산'하고 오래사는 것')에 비추어
그렇지 못한 것이 과연 '복'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고
인생의 과정 중 '일반적인 복'이 아닌 경우가 과연 ' 옳지 않은 것'인가 다시 돌아보게 된다.
그렇지 않음은 위의 두 분을
일반적인 축복을 받고 평범~하게
잘 낳고 오래 잘 사는 ,
나름 특별한 예외가 없이 성공하는
소위 잘 나가는 '신앙인'의 경우와 비추어
또 다른 의미가 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렇다면 세상에 살 때 '삶에 의미'를 꼭 그들에 비추어 찾아 보려 애쓸 이유는 없다는
간단한 결론이 나오는 것이 아닐까?
예수님을 영접하고
나름 기쁨에 겨워 열심히 절제하고 봉사하고
내가 가진 것을 '내 놓고 ^^;; ' ........하며
세상에서 주지 못하던 기쁨,
그 놀라운 은혜에 보답하며 살려고 노력하면서
나름 '기준'을 삼았던 것들이 있다.
주위에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면서
자손이 번성하고 많은 축복을 받던
그러면서 그들이 보여주는 '선교적' 삶, 헌신의 삶,
규제된 도덕적 정결의 삶을 모본으로 보아가며
나도 저리 될 것을 목표로
한동안 열심히 ~ 노력하던 ... 아니.. 솔직히 말하면 부담 ㅜ.ㅜ;; 을 가지던 때가 있었다.
그러다가 다른 '길'을 알았다.
'묵상'과 그에 따른 매일 정결화의 노력.
누가 알아주던 못 알아 주던 간에
하나님이 주시는 그 귀한 기뻐하심의 증거... 은혜.. 로
충만하게 ..
그러면서 하나하나 내 삶의 외적 변화 역시 덩달아 나오고..........
그래서 그렇게..
그 분과 나 만의 동행의 길을 걸어 오고 있다 .
그게 .. 내 삶의 의미로 날 풍성히 만들어 주었었다.
그러나... 한번씩 외풍에 흔들릴 때가 있다.
아직도 가라앉지 않은 내 속의 문제와
세상의 거대한 풍조,
거기에 내 삶의 터전에서 벌어지는
도저히 누구에게도 이해시킬 수 없고
이해시키고 싶지도 않은
나의 문제와 연결된 삶의 고질은
때로 '턱턱'...하고 내 무릎을 꿇게 만들려 하고 있다.
솔직히 '노아의 불임' 등을 묵상하며
그 길기도 긴 .. 500년의 불임시간 동안
하나님의 약속은 믿었겠지만 솔직히 너무 긴 시간 이 아닌가?
그 가슴 조이는 , 뼈를 말리는 시간이 길어짐에 따라
그 영혼의 타는 아픔은 어떻게 표현할 까?
어쩌면 내 순간순간 겪는 어려움을 영적으로 표현하면
저 마음을 함축한 것은 아닐까?
어찌되었든 그러면서도 '여기~' 까지 왔다.
여기까지라 함은 그 뜨거운 연단의 힘듦이 몰아 치고 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하지만이다.
그래도 내 시야는 이전처럼 흐려지지 않고
내 머리는 비교적 청명하다.
마음 한구석에는 고요한 중심은 있다.
어제 책을 읽었는데
거기에 그런 표현이 나오더라.
' 태풍이 휘몰아쳐도 수심 깊은 바다의 아래는 고요하다. '
정확한 표현은 아니어도 그런 마음이란 이야기다.
그런데 , 그러기에 내 스스로 '성장'은 인식하고
비교적 잘 나간다는 생각은 하고 있어
그 회복이 빠르기는 하지만
자꾸 되풀이 되는 인생의 고난에
앞으로도 또 흔들리지 않을 자신은
그리 당당하게 고백하지 못하겠었다 .
그것...
오늘 묵상 주제의 말대로
' 삶의 의미'를 더 뚜렷이 깨닫지 못하는 데 있지 않을까?
혹여 내가 아는 삶의 의미..
그 하나님과 동행하며 매일 나를 말씀 가운데 투영해보며 나를 바꾸어간다.. 는
그당연하지만 어쩌면 '아파트 몇평, 아들.. 어디까지. .. 노후 준비 몇억... ' 처럼
주위에 비추어 위의 존경 받을 만한 신앙인( 므두셀라 같은 잘살고 잘 낳고 오래사는 축복의 일반적인 기준)에 들어 맞지 않은 것에 그리 흔들리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것을 '삶의 의미'로 다시 confusion 하는 것.
오늘 말씀은 뚜렷하다.
에녹과 노아등은 세상에서 그리 탐탁하지 못한 행태를 보였다.
본인이 원튼 원치 않든..
하지만 두 분 모두 확실 한 것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다른 분 보다 크다는 점이다.
그들은 온전히 '하나님의 뜻'에 삶의 의미를 두고
그외 다른 것은 돌아보지 않았을 공산이 크다.
당연하다.
다시 바꾸어 말하면 '좁은 길'을 가는 자들이다.
나.
그런가?
어차피 세상의 유혹들은 나에게는 더 이상 흔들림이 되지 못하다는 것은
이자리에서 확실히 스스로 다짐할 수 있는 것으로 보아
그렇다.
그렇다면, 잘나가는 신앙인들의 일반적인 모습이
내 기준이 되는가?
아니라고는 못한다.
그들의 기준에 부합하지 못하는 외적 번성을 누리지 못함을
조금은 아쉬워 한다.
또 하나. ..
난 고난이나 고통을 어찌 받아 들이는가?
그것을 하나님의 허락하신 것으로 달게 인내할 수 있는가?
아.. .
여기서 걸린다.
아직도 고난은 '무조건 피하고 싶다'
오늘 말씀의 주제를 돌아보면 그런 것 같다.
어차피 .. 내게 벌어지는 일련의 내부적, 외부적 환란은
내 오랜 과거의 잘못 해오던 행태의 결과들이기도 하지만
그게 꼭 내 '죄' 탓 뿐 만은 아니고
앞으로 있을 더 큰 축복,
세상이 이해하지 못할 더 큰 축복,
오직 '하늘 나라의 상급'이 될 지 모르지만
그것은 내 한계 너머의 것이다 .
하나님은 어쨋든 날 '크~게 사랑하셔서'
크고 오래된 고난을 허락하신 지도 모른다 .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이 넘칠 때 더 큰 은혜가 넘치는 것 같다고 선언하신
그 원리처럼..
하나님은 내가 알 수 없을 큰 사랑으로 나에게
오늘, 내 인생을 걸쳐 내내 그런 어려움을 허락하셨다.
그렇다면
이제 다시 '삶의 의미'를 정리하자.
흔들리던 삶에대한 '귀찮음'과 '무기력'한 시선을 정리하자.
하나님은 끝없이 날 사랑하신다.
그들 에녹과 노아에게 그리하셨듯
세상의 현상들은 그리 큰 문제가 아니다.
그분 하나님이 날 귀히 보시는 것은
내 하나님과 동행하여 살려는 노력을 아심이다.
그것 뿐이다.
그리 그리 살다가
하나님 부르시는 날.. .홀연히 가면된다.
아니면 때 되어 노아님처럼...
'주하인아 세상에 배 만들어라' 하시면
더 오래 살면서 눈에 뚜렷이 보이는 성과들을 만들어 내면 된다.
그래서 하나님은 어쩌면, 내 달란트들을
그리도 만들어 내셨을지도 모른다.
기다리자.
기대하자.
기도하자.
인내하자.
주님.
아침에 바빳습니다.
말씀을 틈틈히 정리하다가 수술을 들어갔다 오니
눈이 천근만근 무거워져
죄송하게도 이제야 정리했습니다.
그러면서 전 스스로 다시 깨달았습니다 .
저는 '일반적 축복'을 뚜렷이 받아낼 존경받을 만한 '신앙인'은 아닌것 같다고요.
그러나, 그럼에도
그들과 다른 방향에서 또다른 사랑을 표현하시던
에녹과 노아님 처럼
저에게 허락되어진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통해서
저도 삶에 다른 의미가 허락되었음을 믿고 나갑니다.
주여.
부디 삶의 외풍으로 인하여
내 그에 따르는 내적 허약함으로 인하여
갈등이 커지고 비록 자꾸만 흐려지는 방향으로 흔들릴 때마다
다시 잡아 주시고 은혜로 인도하여 주시어
마침내 정확하고 강건한 삶을 이루어낼 수 있도록 그리 도우소서.
이제 .. 후회하거나 좌절하거나 연민하거나 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
주여.
주의 뜻 가운데서
늘 내 삶의 의미를 찾아내서
다시 힘을 내어 나가길 원합니다.
내 주여.
그리그리 도우소서 .
간절히 소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받들어 기도하였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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