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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앞에 의로움[창7:1-24]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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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앞에 의로움[창7:1-24]

주하인 2014. 1. 12. 13:45

 

주일 예배후

조용한

아무도 없는 방안.

창문 통해 비추어드는

햇살 만이 나를 위로한다

 

그런데 그 고요가 기쁘다

이제 곧 다시

주신 말씀 들고

주님을 만나뵈러 갈 것이기에 그렇다

 

그 주님

노아님의 오백여년 간 연단하여

비워진 영혼에

햇살처럼 녹아들어가 채우셨을 때

그 분은 어찌

하나님으로 그득함을 느끼지 않을 수 있었을까

 

주님은 그를 보고 그러셨다

네가 내앞에 의로움을 내가 보았다

그 의로움

그 놀라운 에너지로

이 시간도

당신을 사랑하는 자들의 영혼에

채워주시길 기도합니다

 

 


1 여호와께서 노아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이 세대에서 네가 내 앞에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
 
'이 세대에서'

이 세상의 큰 사조, 그것에서 벗어나 홀로 있는 다는 것.

독특한 것.

어려운 것.

외로운 것.

그것을 오백년이나.....

그러함을 주님이 '이 세대에서'란 말씀으로 읽어 주셨다.

 

'네가 내 앞에서'

그렇다.

뼈를 깎는 인내도 ,참선도 면벽도, 명상도.......아무 필요없다.

오직 그것은 '자기' '자아'만이 살아 나게된다.

오직 '비운 후 주님 앞에 서야 한다.

아니 !

오직 하나님 앞에서 비우고 하나님으로 채워져야 한다!!

그 길은 어려운 인내의 길이기도 하지만

실은 온전한 기쁨의 길이기도 하다.

의로움의 길이다.

 위의 명상...등 인간적 비움도 마음이 가벼움을 일시적으로 허락하고 깨달음도 가져오지만

결코 '하나님의 영', 성령으로 인한 전율의 기쁨은 있을 수 없고

결국 그 비움은 다른 것으로 채워지기에 위험하다.

 노아님은 '하나님 앞에서 ' ,

그 하나님께서 '내 앞에'...라는 표현을 하시는

그 인격의 하나님을 만나면

그 삶은 오십몇년이 아니고

오백년이 되어도 결코 지루하거나 힘듦이 아니게 될 것이다.

은혜로 깊은 관조의 지경까지 들어간 사람들 만이 깨달을 수 있는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상황.

우주와 내가 하나가 되는 듯한 온전한 느낌.

강항 성령의 합일로 그의 영이 채워져

그는 그의 행동거지의 옳고 그름과 상관없이

그는 늘 의롭게 된다.

'네가 내 앞에 의로움'...

 

 "그 의로움을 내가 보았다"

하나님이 그러하신다.

위의 우주 합일.. 의 거창한 단어를 쓴 이유를 이제 성경을 통해서

추론 해보고자 한다.

 

 

 

2 너는 모든 정결한 짐승은 암수 일곱씩, 부정한 것은 암수 둘씩을 네게로 데려오며
3 공중의 새도 암수 일곱씩을 데려와 그 씨를 온 지면에 유전하게 하라
15 무릇 생명의 기운이 있는 육체가 둘씩 노아에게 나아와 방주로 들어갔으니 

 암수 일곱씩, 혹은 둘씩

짐승을 데려오고 공중의 새도 그래라..하셨다.

 

처음 알았다.

난 모두 한쌍 만 데려온 줄 알았다.

그런데 일곱 쌍씩 .. 두쌍씩.. 이었다.

그렇다.

난 의학하는 자다.

그러기에 한쌍씩 만 했다면 그 유전인자는 당연히도

근친상간으로 열성 유전이 나올 수밖에

세상은 온통 더러운 괴물로 그득했을 텐데..

미련하게도 오늘에야 그것이 아님을 알았다.

할렐루야다.

 하나님은 그 유전 법칙까지 헤아리는 분이시다.

솔직히 이것은 새로운 사실을 깨달은 기쁨으로 적은 것일 뿐..

 

놀라운 것은

그 분 노아가 어찌 일곱씩, 그것도 전부...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잡아 왔을까?

하나라도 빠뜨리면

하나님이 창조하셨던 생물이 하나 멸종 되는 것인데

그게 얼마나 큰 죄악일까?

그렇다면 '지렁이'나.. 땅속의 벌레들,.

그가 알지 못했을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많은 그 생물의 종류를

어찌 다 챙겼을까?

 만일.. 아들을 얻은 500살 이후 부터 방주를 준비한게 아니고

그 전부터 작업을 했다면 어쩌면 그럴 수 있다해도

그때부터 획득한 동물들을 어떻게 관리했을까?

먹이는?

보관장소는?

수백년간 모아서 길르는 것이 상식적으로 가능할까?

사료값은?

더구나 그것들은 '두 마리씩, 암수 한쌍'이 방주에 자발적으로 걸어 올라간 뉘앙스다.

그것도 하나님이 일주일 기한을 준 그 시간에 올랐으니

일주일간 방주 앞에서 기다렸다가 올라간 것은 아닐 것이다.

그냥 하나하나 나타나서 들어갔을 것이다.

마치 그런 거처럼...

.....

 

그러기에

아마도....

하나님이 그에게 명령하셨을때는

그도 짐승과 새와 벌레..모든 동물에게 '명령'했을 것이다.

아마도 이렇게......

 

방주 문 앞에서 세상을 향해

' 지금 부터 하나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모든 짐승과 새들과 살아움직이는 모든 것들아..들어라..

 ...............'

아니면

많은 시간 동안 들로 산으로 돌아다니면

새나 짐승들이 하나 둘 그 주위에 몰려 들었을 것이고

그 분은 조근 조근 하나님의 명령을 그들에게 전했을것이고

그들은 각 짐승의 대표자가 되어

그들 만이 아는 에너지파로 그들 족속에게 전하여

자연스레이 그날을 준비하고 모여들게 된 것은 아닐까?

동화 같은 이야기라고?

하나님의 이야기는

우리 인간의 머리로 어찌 이해가 되는가?

그렇다면 이런 추론의 바탕에는 무슨 전제가 있는가?
그는 ' 하나님의 영', 즉 성령 합일 된 분이시란 이야기시다.

프랜시스 성인은 짐승과 통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

 

기도하다 은혜가 깊이 오면

'그것도 가능할 것' 같은 어떤 감동 같은 것이 가슴에 슬그머니 밀려오고

인싸이트가 생기고

그 일을 진행하면 되는 체험을 가~끔 했다.

 

 
6 홍수가 땅에 있을 때에 노아가 육백 세라
 아들들 낳기 시작 100년 만이다.

 

 

7 노아는 아들들과 아내와 며느리들과 함께 홍수를 피하여 방주에 들어갔고
 그리고 그들이 결혼을 하고 아마 몇십년이 남지 않았을 것이다.

아들들과 세 며느리들.

세상이 그토록 악한데

그들과 다른 '아버지, 시아버지'가

백년 가까이 산 위에 배를 만드는 작업을 하고

그도 모자라 방주로 모두 가자고 했을 때

그들의 심성에 '순종'하여 '배'로 들어가는 것 만 가지고도 기적이다.

미친 아버지, 정신없는 시 아버지가

드디어는 배에 타잔다.

그 영이 반항하지 않고 방주에 타는 것 만도 기적이다.

 

그 기적.

거부할 수 없는 영적 권위가 있어서임을 추론할 수 있다.

이것은 위의 동물 추론에 '성령합일'된 자의 기적 말이다

 

 

 

23 지면의 모든 생물을 쓸어버리시니 곧 사람과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라 이들은 땅에서

    쓸어버림을 당하였으되 오직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던 자들만 남았더라
  또 하나의 기적.

방주 안.

사정 없이 내리는 빗소리와 배의 울렁거림.

기름을 이용하여 불을 켰겠지만 어두움은 피할 수 없을 것이고

그보다 더욱 힘든 것은 '동물'들의 냄새가 습기와 더불어 다가오는 악취.

그리고 '모든 동물을 사십일간' 먹일 음식은 충분했을까?

먹인다면 '육식'동물들은 어떤 음식을 먹였을까"

배변 처리는?

..

 

기적으로 하나님이 모든 생물체를 동면 상태로 들어가게 했고

사십일을 잠재웠다고 추론하기엔

너무 영적인 의미가 쇠퇴가 되지 않는가?
싱겁다는 말이다.

아마도 '말씀'으로 인한 어떤 견딤이 있게 되었을 것이다.

사십일을 금식해도 살 수 있고

냄새가 나도 너무 감동하면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노아 및 가족 들에게 '은혜'가 크게 넘쳤을 것이란 이야기고

동물들에겐 적당한 하나님의 어루만지심이 있었을 것이다.

 그 이야기.

외부적 조건을 잠재우기 보다는

내부적으로 강하게 되었다는 의미다.

은혜로 가득찼다는 이야기다.

 

 

그렇다.

오늘 추론의 본질은 이것이다

노아가 영적으로 크게 성장하고

(그의 하나님 앞에 연단 받은 시간, 불임의 시간동안

그는 오백년을 보내야 했다. 

 그 시간 동안 그는 '하나님 앞에서만 매달렸다'는 추론이 얼마든지 가능하며

그렇다면 그 오백년에 하나님을 얼마나 깊이 만났을까..? )

그의 영이 하나님의 성령으로 직접 하나님과 연결되어

스바냐 3:17에서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잠잠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

내 안에 계신 하나님이

온전한 구원을 이루셔서

오직 '나', 나의 의로움,

하나님으로 온전히 의로움을 사모함을 보시고 그로 말미암아

도저히 기쁨을 이기지 못하셔서

나를 잠잠히 즐거이 부르시고 기뻐하시는 '

그 현상 .

바로 그 현상이 지속적으로 있으셔서

배에서 생수의 강이 폭포수처럼 흐르는

성령의 온전한 합치가 이루어져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은혜가 끊임없이 '흘러

그의 말 한마디가

공중을 울리고

땅 속을 울리며 퍼져

온 지구에서 가장 뛰어난 몇 몇 짐승들이

시간을 맞추어 방주로 몰려들고

시대의 악한 사조,

그 거대한 물결 같은 풍조를 물리치고

백여년 가까이를 지나면서까지도

아들과 며느리들, 아내가 모두

그의 영혼의 공명 ^^*에 순종할 수 밖에 없는

영적 권위를 가지게 된 것이다.

 

난.. 이 말씀을 묵상하며

하나님의 말씀의 살아계심...

그 말씀이 성령의 검이시고

말씀이 곧 하나님이심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

그 공명을 얻은 노아의 심령은 어떠했겠는가?
아마.. 알지 모르는 촉촉한 기쁨이 물처럼 눈물처럼 흘렀을 것이다.

꽉 채운 감동이 그 심정을 자극하여

도저히 그 기쁨을 세상을 향해 표출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거 같았을 것이며

그때 세상을 향해 외칠 때 그 에너지 파를 듣고

짐승들이 몰려들고 새가 몰려 들었을 것이다.

그의 유전 인자에 포함되어 있던 '잠재능력'은

하나님의 성령이 자극해대시는 강력한 힘으로

마치 전기를 받아 움직이는 기구처럼 새로운 달란트들이 개발되어 나왔을 것이고

지혜로 충만하고

그의 인내는 인내가 아니고 기쁨이 되어갔을 것이다.

시간은 그 앞에서는 늘 똑같은 길이가 아니었을 것이다.

어찌 하루가 간지 모르는 감동의 시간들로

눈을 감고 잠을 자기가 아까울 정도로 하루가 급격히 지나가는 듯 느껴져

그의 오백년은 눈깜짝 할 때 지나갔으면

날이 갈수록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지는 그의 영적인 완성도는

아들들의 영혼에 자연스러운 감화로 인하여

차분한 가정교육이 되었을 것이며

세상의 딸들로 들어온 며느리들 역시

감동 감화로 하나의 목표를 가지고 융화될 수 밖에 없을 것이었다.

아마도 그들 가족 모두가 단합하여

그 산정상에 ' 방주'를 만드는데 힘을 합햇을 것이 틀림없다.

아들들은 나무를 해오고 대패질을 하고

여자들은 새참을 해오고 ^^*  역청으로 꼼꼼하개 빈틈을 채웠을 것이며

저녁이 되면 불 주위로 둘러 앉아

모두 같이 하나님을 드러내는 찬송의 노래를 불렀을 것이다.

틀림없이 하늘에는 놀라운 빛이 향연들이 벌어져

주위에 개똥벌레 날아다니고

별이 너무나 밝고 아름답게 반짝였을 것이며

달은 휘황찬란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에게 주시고자 하는 말씀은 무엇이신가?

' 당연히도 들 궁금증'  , 심지어 무조건 하나님의 말씀은 옳다고 생각하며

모든 생각을 맞추어 가는 나에게 조차

창세기 부분을 묵상하며 드는 여러가지 논리의 '구멍'들이 있다.

그 부분을 추론하며

가장 집중하게 하시는 것은

'노아의 내면'...

그 분의 그 심령에 느껴지는 그 강렬한 하나님의 임재

그러하심으로 하나님 보시기에 그 앞에 그렇게 의로운 상태.. 를 짐작해보는 것이었다.

 

 그렇다.

 진정으로 귀한 것은

모든 것...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노아가 오백년을 불임으로 견딜 수 잇었던 것도

그 후 백년 넘게 산 위에 방주를 만드는 그 어려움도

그 것을 비웃는 세상의 손가락질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하나님이 주신 것이란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의로워진 것'이다.

그의 외로움에 그가 한 일은

하나님을 놓치지 않은 것이다.

그가 지혜로운 것은

그 하나님의 함께하심의 기쁨이 세상의 그 어떤 유혹보다 큰 것임을 잊지 않은 것이다

 

나.

어찌 그리 단정하는가?

어찌 그리 쉽게 긴글을 이어가는가?

 

하나님께서 내 속에 비슷한 공감을 느끼게 하시고 계시 기 때문이다.

단, 문제는

내 삶의 문제들이 아직 너무 크고

내 본질적 성향의 미련함 때문에 ,

내 육성이 너무커서 자주 자주 하나님을 잃을 위험성이 크다는 것 뿐이다

 

지금도 그렇다

조용하고 외롭다.

나이 들면서 외로움이 커지려 한다.

그 외로움에 함몰되면 난 불행해지려 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있으니

내 영혼은 다시 따사로움 기쁨으로 채워진다

사진처럼  난 창문을 통해서 흘러드는 햇볕을 누리며

글을 쓴다.

행복감이 밀려온다.

세상의 누구보다 행복하다.

부디 간절히 빌기는 노아의 그 의로움이 곧 내것이 되길 원한다.

그 의로움의 온전한 영성이 내것이 되길 바란다.

늘 하나님의 영으로 합일이 일어나길 간구한다.

 

 

 

주님.

귀한 주일

홀로 영광 받으소서.

온전하신 주님.

인간적인 눈으로 보면

노아님의 그 오백년의 불임,

그 후의 그 엄청난 시간의 방주를 만드는 고난을 생각하면 안타깝고

두렵기까지 하지만

하나님의 영혼이 내 영혼에 강하게 임하시면

그런 의로움도 가능하다는 생각이 살그머니 듭니다.

주여.

저는 그 분처럼 온전한 심령적 크기를 가지지 못한 것은 확실하고

내재된 아픔이 절 가로막아 이곳 저곳

그 분처럼 온전한 모습으로 비쳐지지 않고는 있음을 잘 알지만

오직 하나님의 영이 합일되면

불가능한 일이 모두 이루어져

하나님의 원하시는 도구로 사용됨을, 알고 있사온즉

주여.

저도 기대합니다.

주의 영으로 합일되게하소서.

승리케 하소서.

간절히 빕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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