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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QT

인내의 靈性[창6:1 - 6:12]

주하인 2014. 1. 10. 10:41

 

 

2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4 당시에 땅에는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로 들어와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은 용사라 고대에 명성이 있는 사람들이었더라 
 성경에서 이해하지 못할 구절이 이거 뿐인가?

솔직히, 가인이 자손을 번성시킬 때 자손들의 아내들을 어디에서 구했을까?

.......................

 

하여튼, 이런  신학적 논쟁들은

학문에 조금 더 뜻을 두고 계신 불특정 다수 인 '그분 들' ^^;; 에게 맡긴다.

내게 주시고자 하는 의미는 '배경'일 뿐.

 

오늘 날처럼

세상은 '아주 아주' 악이 횡행하고 있던 시대라는 것.

거기에 '하나님을 잘 믿는 자'들의 영적 탁함이 극을 이루는 것... 

다원주의 .. WCC .... 동성애.. 양성애...

아주 아주 악함이 극을 이루면서도

옳고 그름의 기준조차 구분할 힘을 잃어버려

그 혼돈에 모두 휩쓸려 다니는 현상... !!!!

 

내게는 이 구절들이 작금의 현상들과 너무 유사하다는 것만 의미가 있이 다가온다.

 

 

 

5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6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하나님이 '한탄하고 근심하신다?'

 

하나님이 능력이 없으셔서 예측을 못하셨을까?

사람을 만드시고 우주를 말씀으로 창조하실 그 분이?

그것은 말이 안된다.

 

'자유의지'다.

자유의지를 주시고 스스로 우리의 미래를 들여다 보지 않으시기로 약조하신 것이시다.

그것은 우리를 창조하신 이유,

우리가 살아갈 삶의 의미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최선을 다해서 만들어 주시고

주님과의 동행을 통해 아름다운 찬송을 불러 올림을 기다리시는

그 분의 '기다리심'에 부응하는 삶.

그것이다.

 

그러나, 오늘 날 어떤가?

또 하나님의 마음을 한탄하게 하시고 근심하게 하고 있지는 않는가?

 

 

9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12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부패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부패함이었더라

 당대에 완전한 자.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

 

 나름 존경하던 균형잡혔던 목사님께서

WCC에 깊숙이 관여 하셨고

그 분의 변론이 무엇이든 간에

그 분의 진정한 목표가 무엇이든 간에

그 것의 옳지 못함을 알고 있는데

설교 때 아주 조금씩 흘러 지나가듯 '관계된 이야기'를 집어 넣는다.

그런데 그 말씀을 들으면서

그 분의 이전에 해오셨던 너무나 좋았던 이미지를 생각하면

마음이 '흔~들' 하려 한다.

만일 내가 '중심'을 놔 버리고

비본질 적인 것 ( 그 분이 본질과 비본질에 대하여 명쾌히 가르치셨었다 ^^;;) 인

그 분의 인격, 그 분의 차분함, 그 분의 실력......을 기준으로

본질적인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 길이 없음'과 ' 성경의 무오성'과

성경의 말씀대로 '우상을 멀리하고..'라든가

믿음 적은 자를 위해서라도 의심받을 자리에서 멀리하라'며

베드로를 질타하던 사도바울의 하신 말씀대로

옳지 않은 곳은 '자신의 판단과 옳은 목적'과는 상관없이

근처에도 가지 말아야 함.. 등을 어지럽히는 것은 옳지 않음의 판단을 놔버리면

난.. 여지없이 ' 다원주의'의 어지러움을 못느끼고

그 안에 슬그머니 발을 들이게 될 것이다.

그만큼 , 사단은 유혹적이다.

보라.

아무 부족할 것 없는 이브가

뱀의 혀 낼름에 갈증을 느껴 선악과를 먹어 버린 것을..

 이쁜 여자.

난... 산부인과 의사지만

길거리 다니다가 이쁜 여자를 보면

다 ~ 착하고 지혜롭고 ..천사의 현신처럼 보이기도 한다

^^;;

그러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이쁜~ 사람의 딸에 쉽게 넘어갈 수밖에 없지 않는가?

 

그런데 하나님 아들, 사람 딸??

그거..

학자들마다 다양한 의견이 있음을 안다.

 

 그런데 '사람'의 특질이 무엇인가?

사람은 '원죄적' 존재다.

다 자기 중심적이다.

데일 카네기는 "인간은 '자기 존중감' 때문에 산다"라고 단언했다.

그것 때문에 그토록 성공하려 하는 것이다.

그것 없는 사람들은 우울해하고 자살하고

그것 때문에 위로 받으려 '소통'을 주장한다.

오늘날, 사람들은 '사랑', '소통'.. 을 앞세워

'모든 것이 다 옳다'고 하며 모든 것을 다 정당화 했고

결과로 세상엔 정의와 악의 구분이 모호해졌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그들 사람의 세상의 풍조에 물들어가며

신앙인들 조차 선악의 구분이 흔들리고

심지어는 절대진리인 하나님 조차

맘 깊숙한 곳에서는 부인하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

그들은 그들의 시간 날 때는 '신앙인'의 모습을 보이나

그들의 이익이나 판단과 어긋나는 영적 원리를 제시할 때 거부한다.

그것이 불신앙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것이 다원주의 세상의 무서운 점이다.

그런 '사람'의 딸들은

아무리 천사같고 지혜로와 보이고 소설 속의 이상적 여인처럼 보여도

하나님 없이 서로 어울리는 그들은

뱀의 '혀'들이다.

여기서 사람의 딸이 꼭 여자만 지칭하겠는가? ^^;;

 

 그렇다면

'대다수의 이런 사람'들 속에서

과연 노아처럼 소수로 살아남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우선 '혼란'이다.

내가 과연 옳은 것인가?

다 저런데 왜 나만 유독 이런가?

 또 , 그것은 '왕따'를 초래한다 .

왕따는 '외로움'의 극치다.

내면에 분노와 두려움...으로 안정되지 못함은

옳은 신앙인의 당연한 방향, 즉 평안의 없음으로 좌절하게 된다.

믿음이 차거워질 위험성이다.

또 그에 따른 현실의 '손해'다.

사회적으로 능력 발휘의 장이 줄어드는 것이다.

 

 노아.

어제도 묵상했다시피 독특한 사람이다.

불임이 오백년이다.

'당대에' 완전하다고 했다.

당대의 사조는 아마도 지금과 같은 혼란지경이었을 것이다.

그 당대에라는 표현의 강조는

그러한 시대 사조에 거슬러 사는 사람의 '어려움'을 의미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당대에 완전하다 함은

완전의 어려움은 누구나 안다.

눈을 뜨고 지금의 세상을 바라보면

일초라도 죄 안짓고 살기가 어렵다.

' 영적 혼란, 음란'... 화려함.. 폭력.. 기괴함...........거짓........

그러한 상황에서 '완전함'을 유지하는 것이

어디까지 가능할 것인가?

 세상을 등지고 산으로 들어갈 까?

아마존 밀림 오지에 들어가거나 사막에 동굴을 지어 홀로 산다해도

과연 '죄'의유혹으로 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더더구나, 그의 삶은 80몇년이 아니다.

오백년의 불임에 수백년 더 산다.

그런 그가 '완전한 행위, 온전한 마음'을 유지하는게

인간의 힘으로 가능했을까?

더구나 자식들을 기르는 부친이다.

알지만, 그들은 축복이기도 하지만 대단한 인생의 무게이기도 하다 .

그러함에도 완전함을 유지함... 정말 불가사의한 이야기다.

 

 도저히  육신을 가지고 이 땅을 사는 '나 주하인'을 포함한

모든 인간들이 할 수 없는 '초월적 '현상이다.

과연 하나님이 그런 사람을

모델링하는 묵상의 레마로 내어 놓으셨을까??

아니라 생각한다.

그러면 무엇인가?

 '하나님과 동행'이라는 단어에 그 답이 있다는 생각이다.

 

당대에 완전함의 조건은

'오래 참음'이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일을 '오래 오래 ' 꿋꿋이 ..

하나님과 동행한다함은

위의 '다원주의 적' 혼란,

사람의 딸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영을 흐리며

세상에 뿌려놓은

이것도 저것도 아닌 ' 불신앙'의  혼란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만 바라봄',

'하나님의 뜻에 의거하여서만 움직임'

그것을 '수백년'간 지속함..

즉, 하나님 만을 바라봄의 인내에 대하여

포인트를 주신 것 같다는 이야기다.

 

나.

어떤가?

솔직히 자주 흔들린다.

세상의 풍조에 비교하며 힘들어 할 때도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이외'

'예수님 말고'는 '길'이 없고

성령의 은혜 아니고는 내가 살아갈 힘과 이유를 찾을 데가 없음을

실제적으로나 영적으로나 확신하고 있다.

절대로 거기에는 타협이 없다.

어리석은 것 같기도 하다 .

때론..

그러나, 말씀을 들여다 보면

매일 매일 이렇듯 깨닫게 하시고 지도해주시고

은혜로 위로해주셔서

마음의 평강을 지속해 주신다 .

그래서 지금까지 왔다.

 

 노아를 보면서

그 분의 당대에 완전함에 대한 모습이

앞으로 훨씬 더 계속

내가 지켜야 할 하나님과의 동행을 보여주시는 것 같아

힘이 난다.

지치려 했고 무기력해 하던 나를 다시 돌아보게 하신다.

 

 

귀하신 내주님.

지난 당직을 지켜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오늘 하루 다시 맑은 하루를 허락하시고

피곤치 않은 몸으로 걷게 해주심을 감사드려요.

하루가 다르게 세상이 급변합니다.

더운 나라에 눈이

미국에는 나이아가라 폭포가 얼어붙을 정도의 추위가 오고

그보다 더욱 급하게

세상의 풍조가 변합니다.

사람의 딸들이 드디어는 하나님 아들들까지 거의 오염시키는 데까지 왔습니다.

주여.

참.. 암담합니다.

노아의 시대를 보는 듯합니다.

그 러면서 그 분의 외로움,

그 분의 인내

그 분의 결국 승리함,

거기에 임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봅니다.

주여.

하나님

저는 자격미천하지만

죽을 때까지 하나님 말씀을 붙들고

더욱 하나님 동행하려는 의지를 발휘하면

주께서 결국 선으로 인도하시고

당대에 완전한 자라는 이름을

이 부족한 성품의 저에게도 붙혀주실 것 같은 생각도 듭니다.

주여.

힘을 내게 하소서.

인내케 하소서.

제게 부족한 것이 그것입니다.

도우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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