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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음성으로 읊조리오니[시77:1-20]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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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음성으로 읊조리오니[시77:1-20]

주하인 2022. 2. 24. 09:17

 

 

1. 내가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내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

 당연히도 부르짖으면 

'하나님께서 귀를 기울이시고'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실 것을 믿는다. 

 

그런데 때로는 

하나님이 얼굴을 보이시지 않으시고 

응답하지 않으셔서

우리의 환란이 배가 되고 배가되어 

너무 견디기 힘들 때도 있다 .

 

그러할 때

'내 음성으로' ....'내 음성으로 '라 하는 표현은

자꾸만 눌려서 

기도마져 잘 안나오게 되는 

그런 상황에 있을 상황에 

힘을 내 '소리'내 부르짖자는 다짐으로 들린다. 

그게 가슴이 아프다. 

그리고, 그러함에도 

우리가 해야할 일은

'내 음성으로 내 음성으로 ' 외치고 부르짖는 것이 맞다. 

보이지 않아도 

 

 

8. 주께서 영원히 버리실까, 다시는 은혜를 베풀지 아니하실까,
9. 그의 인자하심은 영원히 끝났는가, 그의 약속하심도 영구히 폐하였는가,

하나님의 속성 상

전혀

단 일푼의 가치가 없는 상상이지만..

마치 버려진 외톨이같이

잘믿는 우리에게도

지속적 고난과 고통,

거기에 얼굴을 가리우신 듯 느낄 수 없는

하나님의 임재로

마치 버리심을 받은 것 처럼 너무 힘들 때가 있다. 

의혹과 혼돈...........

이 고통보다 더 심한 외로움과 막막한 고통으로 다가올 때........말이다. 

 

이 시편의 기자의 상황이 

지금 

그러한 것 같다. 

 

십자가 성요한의 '감성의 밤'에 대하여 안다. (글 아래 쪽에 복사해 놓았다. ^^*)

그 분의 표현... 과 비슷한 상황이라 생각된다. 

 

 

12.또 주의 모든 일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며 주의 행사를 낮은 소리로 되뇌이리이다

그 때 .. 

그 마음고생은 하나님의 허락하신 

또 다른 연단과정,

우리 영혼의 성장을 위하여 허락되어진 영성의 과정이지만

견디기 힘든 상황에

시편 기자는 

몸부림을 친다. 

그러면서 

그는 온전히 하나님께만 집중하여

은혜의 느낌이 없는 ,

하나님께서 안계신 듯한 처절한 외로움의 상태에서

나오지 않고 눌리는 목소리를 발하여

마치 '신음하듯이라도' 

내 음성으로 ... 내 음성으로.. 라며

주님의 모든일을과

주의 행사 , 모든 간증의 체험들을 .. .

작은 소리 읊조리고

낮은 소리로 되뇌이라고 한다

 

 내 기뻐하는 표현,

작은 소리로 읊조리고 

낮은 소리로 되뇌이는 것... 

수년전 존경하는 P목사님께서 

너무도 적나라히 표현을 해주신후 

그 읊조리고 되뇌이는 의미를 알게 되었다. 

 영어로 Roaring... 

정확히는 사자가 그르렁 거리듯, 중얼거리는 뉘앙스의 기도 .. 그런 느낌이란다. 

 

 그 후로 중얼거리듯 roaring 하듯

작은 소리로 읊조리는 기도를 자주 즐겨하는데 

그 때

내 육신이 조금씩 그 그르렁거리듯

읊조리는 소리에 맞추어 진동하는 게 느껴지고 

그럴 때마다 

그 차갑고 외롭고 머리가 빙빙 돌듯 절망적인 느낌들이

조금씩 조금씩 

마치 진동파로 먼지 떨구듯 

내 육신과 심령에서 떨어져 나가며

오히려 은혜와 감사로 내 마음이 꽉차오는 체험들을 많이 했다. 

그때부터 기도의 맛 (표현이 맞는지는 모르지만... 기도가 즐겁고 기쁘다는 느낌 !) 을 

확실히 알게 되었었다 .

그리고 그 후부터 기도가 훨씬 덜 힘들어졌고.. 

 할렐루야.

 

( 단, 당연히도 그 때는 지금 이 시편 기자의 그것보단 훨씬 덜 영적으로 성숙된 상태기에 

 그 기간이 짧았었을 것임은 알고 있다 .^^; )


19.주의 길이 바다에 있었고 주의 곧은 길이 큰 물에 있었으나 주의 발자취를 알 수

   없었나이다

 분명코 

주님은 살아계시다. 

그 분은 내 작은 결점과 잘못(내 잘못이 작지 않을지 몰라도 그 분의 품, 그분의 사랑 안에서는 작아질 수 밖에 없다... 는 의미다.^^* ) 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분명코 나의 선, 나의 옳음을 위하여 

손을 내미실 것이 분명하고 

또 그리 하여 오셨었다. 

 그 표현을  19절에서 이리 한다. 

'주의 길이 바다 에 있고 주의 곧은 길이 큰 물에 있었'다... 라고 ..

주의 길이 바다에 있고 길이 물위에 있음 자체가 '기적'이 아닌가?

그 놀라운 기적이 기적임을 알아듣고 볼 수 있고 느낄 수있는 것이

우리네 믿음의 정도이고... 

그 것.. 

분명코 바다에 길을 큰 물위에 길을 내셔도

인생들이 그 길을 보고 알았어도 

금새 지워져 버릴 그 길을

언제까지 보고 기억하고 느낄 수 있을까?

 그 길을 기억하고 언제까지나 감동으로 있을 수 있다면

그게 정말 영적으로 많이 성장한 상태가 아닐까?

 

 오늘... 

정말 열심히 기도하고 믿는 상태임에도 

오래된 아픔과 고난과 환란을 통해서 

하나님의 임재감 마져 놓치고 

깊고 긴 메마름의 느낌으로 

혼돈의 외로움과 괴로움에 있으면서도

그분의 하셨던 뚜렷하신 일들,

그 분의 절절하신 느낌들을 놓치지 않기 위하여

그래서 이 괴로움 마져 그때의 기억처럼

순식간에 해결받기를 기대하지만

눌려서

외마디 신음소리조차 입밖으로 내기 힘든 

오래된 연단(제련..)의 결과로 지치려는 '감성의 밤'을 거치는 

많은 옳은 신앙인들의 어려움을 보여주는 것 같다 .

그 때.. 억지로라도 소리를 내어 

작은 소리로 읊조리면서 

하나님의 하셨던 일들, 하신 큰 증거들을 기억하고 

오히려 감사로 바뀌며 기대 하고 있는 상황이다. 

 

아... 

 

 

주여.

저도 많은 굴곡 겪으면서 

하나님의 얼굴이 뵈오지 않을 메마름의 시간, 

감성의 밤들을 자주 겪어왔습니다. 

주여.

그럴 때 더욱 주님을 바라고 외치고 싶지만

물위에 난 주님의 길 처럼

대단하고 놀랍고 경이로운 감동마져 

물 위에 흐려진 것  보다 더 빨리 흩어져

정말 주님께서 계셨던가.. 하는 의혹이 

그 때의 힘듦에 더 배가 되는 것을 경험합니다. 

 

 주여.

아시오매

기도하는 자,

앞서서 더 기도하는 아내의 오랜 아픔,, 육신의 그러함을 보고 있습니다 .

의사로서 다양한 옵션,

거기에 나름 영적인 원리를 아는 의사 남편으로서 

다양한 것을 도움 주고 싶었지만

그 모든 것을 못하게 까지 

아내는 힘든 어려움을 호소합니다. 

만성통증과 만성피곤함으로 힘들어 하네요.

주님.

깨달았습니다. 

그것... 

하나님 보다, 하나님과 동격으로 

세상의 것을 의지하려는 

제 잘못도 그 어려움에 일조함을 요.

 

주여.

그래서 빕니다. 

더 빕니다. 

음성을 내어 기도하고 빕니다 

아내와 저희들의 힘듦을 기억하시고 

물 위에 내셨던 길을

또 지금 내어 주소서

흐트려져 보이지 않는 듯 한 물 위의 길들이

다시금 저의 삶, 아내의 매일에 임하시고 

같은 고난 겪는 믿는 자들의 흐느끼는 기도에 

속히 응답하소서.

말씀이 있으셔서 발하는 

작은 소리의 읊조림에 응답하소서.

그들의 육신을 공명하는 기도의 소리에 

병들이 떠나가게 하시고 

회복과 생기가 크게 늘어나게 하소서.

내주 예수 그리스도... 

거룩하신 이름들어 감사하며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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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의 밤에서 영혼이 메마름에 빠지도록

하나님께서는 여러 가지 폭풍과 고생을 보내주신다.

성도들은 닦달질을 당해서 스스로 몸과 마음을 닦아 나가고

합일에 들어가기 위하여 감각과 기능을 정화해 나가야 한다.

사실 고생과 유혹을 거쳐서 단련과 시험을 치르지 않은 영혼은

감성적 생활 때문에 합일의 경지에 도달할 수 없다. 

 

 또한 합일에 들어가기 위해 가장 효과적인 닦달질은 '마음 고생'이다.

이 '마음 고생'으로 말미암아

나약한 의지가 집착하고 연연해하던 정욕적인 것과 쾌락적인 것들을 통해서

맛과 위로를 느끼는 자신의 부족함을 발견하고 정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성도들의 영혼은 여기에서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겸손해지면서 진보하게 된다.

그런데 이 「감성의 밤」을 통과하는 기간이 얼마나 걸리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말할 수 없다.

모든 성도들이 똑같은 시련을 당하지도 않으며 각자가 죄를 범하는 정도에 따라 하나님께서

알맞게 연단 하시기 때문이다. 

 

 또 하나님께서 합일의 경지까지 성장하게 하시려는 뜻에 따라서 시간을 길게 하거나 짧게,

혹은 정도를 높이거나 낮추시면서 그 영혼을 짓부수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험을 견디어 낼 수 있는 힘과 의지가 강한 성도라면 하나님께서 더 빨리,

더 호되게 연단하여 정화되게 하신다.

하지만 연약한 성도에게는 예사롭지 않은 관용을 베푸시고 시련도 가볍게 해 주시어

이 밤의 기간이 오래 끌게 된다. 

 

이런 성도들은 이 땅에서 완전한 순결 곧 합일의 경지에 도달하기 어렵다.

그들은 연단을 받는 것도 아니고 안 받는 것도 아니다.

그들은 호되게 연단을 받아 빠르게 성장하지는 못해도

자기의 불완전함을 발견하여 회개함으로써 점차적으로 정화되도록

얼마동안 저 시련과 메마름을 겪게 하신다.

그리고 그것을 감당하지 못할 경우에는 이따금씩 위로를 베푸셔서

한번 놀란 그들이 다시 세속의 것을 찾지 않도록 하신다. 

 

아주 약한 성도들에게는 신령한 체험들을 맛보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을 배워나가게 하시는데,

이러한 '푸대접'이 없으면 하나님께 좀더 나아가려고 할 그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랑의 합일이라는 복되고 아득히 높은 자리로 올라갈 영혼들은

제 아무리 하나님의 빠른 인도를 받는다해도

상당한 기간동안 이 메마름과 시련의 밤을 통과하게 되는 것이 보통이다

 

[십자가의 요한, 『어두운 밤』 최민순 역. 성 바오로 출판사, 1988, 9-59면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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