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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그렇게[창19:1-11] 본문

구약 QT

그래도 그렇게[창19:1-11]

주하인 2014. 9. 22. 08:52

 

1 저녁 때에 그 두 천사가 소돔에 이르니 마침 롯이 소돔 성문에 앉아 있다가 그들을 보고 일어나 영접하고

   땅에 엎드려 절하며 
 
 저녁 때.

소돔 성문에 앉은 롯.

 의미하는 바가 있지 않은가?

세상이 저물 때, 황혼이 아름답기는 하다 .

하지만 그 황혼은 저무는 황혼이기에 '비감'하고 슬픈 황혼이다.

인생의 황혼.

주인없는 늙어가는 자들의 비애.

거기에 롯은 앉아 있었다 .

성문에.. ?

그가 왜 성문에 앉았을까?

그가 누굴 기다리던가?

성문지기이던가?

 

믿는 자로서 세상에서 열심히 살기는 하지만

그의 뇌리를 지배하는

인생의 허무함과 그에 대한 해결하기 힘든 갈등.

그렇지만 예수님의 은혜를 체험한 자들이 겪는 고뇌.

그 고뇌가 '저물 때 성문 앞에 앉아 있는 '

그래서 저녁빛이 그의 허탈한 얼굴.. 아니다. .. 모든 세상의 의미를 찾지 못하는 자들의

갈등하는 자들

즉 나름으로는 고뇌하는 자들의

갈길 모르는 허무함한 얼굴에 비치는 것 아닌가?

 

 

그래도..

그는 그래서

천사들, 성령의 도우심을 다시 만났다.

그래도 갈구하기에

그렇게 만났다.

 

 

3 롯이 간청하매 그제서야 돌이켜 그 집으로 들어오는지라 롯이 그들을 위하여 식탁을 베풀고 무교병을

   구우니 그들이 먹으니라
 드디어

예수님을 아는 자가

인생의 허무함 속에서

은혜를 다시 체험하고

견디지 못하는 감동에 '간청한다'

'주여..

부족한 죄인이지만

제발 저를 떠나지 마소서.'

 

그렇다.

그 집.

이 육신의 빈깡통,

다 비어있는 영혼의 지성소에

'그 집으로 들어오는 지라'처럼

성령이 임재하시면

식탁이 차려지고   

누룩없는, 거짓없는 무교병이 차려져

하나님 말씀을 먹어야

영혼의 잔치가 시작되는 것이다 .

시끌 벅적, 활기..

 

 또 그렇다 .

나이가 무슨 문제이던가?

가지고 못가짐은 또..

세상것의 풍요로움은 무슨 문제일까?

 롯 역시 가진 재산이 많았던 자다.

굳이 '주석'의 재산이 많았음을 상기하지 않더라도

그의 일 없이 성문에 앉아 있고도

먹을 것 금방 대접할 정도의 윤기는 느껴지지 않는가?

 그것.

가진 것이 문제가 아님이다 .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영접하고

성령이 충만함 만이

인간이 진실로 살 이유를 알 수 있게 하고

그것은 그의 전부를 생기로 돌게해

인생이 젊음으로 차게 된다.

 

 

6 롯이 문 밖의 무리에게로 나가서 뒤로 문을 닫고
 롯이 '뒤로 문을 닫았다'는 표현

그의 결단을 이야기 한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 대한 세상의 저항이 느껴진다.

 

특별히 롯 처럼.. 예수님을 깊이 알았던 자들에게

그들이 세상에서 발을 떨구지 못할 경우..

아니면

특별히 선교사나 수도자로 부름을 받지 않은 세상의 보통 신앙인들.. .

그 중에서 선택 받은 소수들에게

세상의 삶을 살면서 도전 받을 수 밖에 없는

수없이 많은 영적 도전들.. .현실적 어려움을 통한 , 기름 때 낀듯 태만한 도전을 통한

붙듦과 힘듦이 얼마나 많던가?

그런 그들 , 그들을 상징하는 롯 같은 자들에게는

'뒤로 문을 닫는 '

그럼으로 자신의 성령 충만함을 지키려는

그런 결단이 필요하다.

 

얼마나 대단한 결심인가?

죽음까지 가능한..

아니면 자신의 자식들까지 포기하려는 귀한 결심을 해야지 가능한

그런 위험한 순간에 내몰린 것을

'뒤로 문을 닫는 ' 행위로 표현하지 않던가?

 

10 그 사람들이 손을 내밀어 롯을 집으로 끌어들이고 문을 닫고
 놀랍다 .

'그 사람들이 손을 내밀어.. 끌어 들였다. '

 

문을 활짝 열어 납치하듯 끌고 들어간 뉘앙스는 아니다 .

마치 만화 영화에서 ' 문이 조금 열리고 손이 쑥나와서 '

그를 잡아다니니 문의 열리지 않은 상태에서도

허리가 뒤로 폴더처럼 구부러지며  

연기처럼 뒤로 빨려들어가며

문이 '탕'하고 닫히는...

 

우리는 ...

인생의 변곡점에 서게 된다.

여인들은 특히 '폐경기 ' 시기

남성들 역시 은퇴시기 가까이..

그 뿐이 아니라 우리의 존재를 위협하는 상황들이

도처에 마치 살얼음처럼 버티고 서 있고

그렇지 않아 많은 세상의 이룸이 있을 지라도

결국 죽음에 이르고야 말 유한한 존재인 우리는

'불안에 이르는 병'을 가지고 태어날 수 밖에 없다 .

세상이 편하여

죽음을 잊기 위하여 망각에 빠지려 애쓰지만

그런다고 그 인생이 편할까?

 롯이 저녁녘 성문앞에 앉아 있음이 대변하듯

결국 회의와 권태와 우울이 인생을 잡을 수 밖에 없다

결국 '하나님 앞'에 와

영생의 약속을 받고

성령의 충만함으로 매일을 살아야

하루하루를 살수 있는 에너지를 받아

주님이 진정 원하시는 그런 모습이 될 운명이 우리 믿는 자들의 그것이다 .

아니다.

모든 살아있는 인간의 숙명이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지 못함은

세상의 권세잡은 자, 사단의 영적 도전으로 그렇다 .

그러함은 롯의 뒤로 문을 닫는 결단이 있어야

이길 수 있음이다.

그는 결국.. 나중에 소돔이 망할 때 구원을 받는다 .

 

나.

오늘 무엇을 원하시는가?
혹여 난. .성문 앞에 나가 앉아 있지 않는가?

갑자기 상황이 변곡점을 지나며

풀리는 양상이자

또 예외없이 나른한 나태함이 날 사로 잡으려 한다 .

그러니 영혼이 피곤하다.

하지만 나를 붙드는 편안한 나태함은

새로 이사간 집의

푹신한 기능성 소파의 유혹으로 날 붙들려 한다 .

 

그래도 억지로 주님 앞으로 다가가려

기도하지만

깊이 들어가기가 힘들다 .

힘을 쓰고 있음을 아시는 지..

그래도 그렇게 애쓰고 있음을 아시는지

위태하도록 방치하지 않으실 것,

'손을 내밀어 나를 잡아다니실 것'임을 말씀하시고 계신다 .

 

내가 할일은

더 무교병을 구어야 한다.

유교병이 아니다 .

잔치, 하나님의 영을 내 속에 초청하여야 한다 .

더욱 그렇게 하여서

이 나태해 머리 무거운 빈듯한 마음에

하나님의 기쁨으로 채워야 한다.

그게 더 이상 생길 인생의 위험도 막는 길이다.

 

 주여.

하루하루가 매일매일 도전입니다.

산다는 것은요.

어려울 때는 어려워서 힘들고

편할 때는 나른한 나태로 힘이 듭니다.

그래서 저녁이 되어

성문앞에 나가 막연히 '멍하게' 앉은 롯의 심사가

남의 것 같지 않습니다.

주여.

그러함에도 끝까지 기다려

마침내 나타나신 하나님의 천사들을 만난 것 처럼

오늘 그렇게

불현듯 다시

내 부족한 심사를 채우실 성령님을 기대합니다.

주여.

부디 저를 놓지 말아 주소서.

그리하여 늘 하나님의 생명으로 그득찬 삶을 살게 하소서.

외적 상황과 상관없는

그 놀라운 충만함을 기억하는 저 올시다.

다시금 그리하게 하시사

제 삶을 붙드소서.

그리하시고 저로 하여

제 가진 하나님의 살아계신 증거를

제 가족과 제 이웃과

세상을 향해 보일

올바른 증거가 되게 하소서.

내 주여.

간절히 빕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였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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