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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QT

사라로 보기[창17:15-27]

주하인 2014. 9. 19. 09:11

 

 

15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사라라 하라
 사라.

새로운 정체성

그것.

사라에게 직접 말씀하지 않고

사라의 남편에게 말씀하신다.

 

무엇인가?

내게 '예수님'의 자녀로 거듭난 사람들을

거듭난 자로 보란 말씀이신 듯하다 .

 

내게 '의롭다'하고 도장 찍으신 날 이후

난.. 어쩌면 엉터리 같은(^^;; 엉터리 같은 세상의 사람들의 행동들이 많이 눈에 뜨인다.  ) 사람들

그 중에서 리더라고 자처하며 지속적인 미련함을 행하는 자들에 대하여

자꾸 눈에 걸린다.

 그런데 문제는

가만히 돌아보면 이전에 내가 힘없고 약하다 생각할 때는

말씀에 맞추어 존중하려 애쓰면서

속으로는 그래도 적응되었던 문제들이다 .

그런데 ...

기도하지만 갈등은 밀려온다.

 

그것.

오늘 사래를 사라로 보라심은

그들 역시 그들의 단점을 가지고는 있지만

예수님 십자가 ,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 난 자들이다 .

사라된 사래일 수 있다는 말씀이시다.

사래는 내 눈이지만

사라는 하나님이 보시는 그들의 모습이라는 이야기.

 

 

 

16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가 네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여러 왕이 그에게서 나리라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내게 복을 주신다.' 고..

그 복은

사라를 통하여 주어진다는 것이다 .

 

사라.

임신부가 된다.

나이가 그렇지만 하나님이 그러시라니 그러신 것이다 .

내 눈...

그들을 사래로 보고자하는 내 눈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사라이고

그 사라인 그들을 통하여

내게 '복'을 주신다 하신다.

 

 무슨 복인가?

그들은 하나님 안에서 엮여진 형제 자매다 .

부족해도 그러하다 .

엉터리 같아도 그렇다 .

그런 그들을 통하여 주님은 내게 '복'을 존재로 보자

 

복.

그 복의 정체는 그럼 무엇일까?
아들.

새로운 생명이다.

그들이 나에게 새로운 생명을 안겨줄 사라이다.

그들을 귀히 여겨야 한다.

 

 

 

17 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으며 마음 속으로 이르되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출산하리요 하고
 그러나.. 그게 쉬울까?

내 머리 속에 벌~써  깊~이

'엉터리' , 뼈다귀까지 골다공증 심한 나이의 사래처럼

더 이상 발전할 가능성이 없는 자들로 보이는데...

이 '의로운 주하인 (^^;; 하나님이 그러셨음을 믿는다 ) 소리에 귀를 막는 

어이없는 영혼이 늙은 그들.. 말이다 .

 

아브라함은 엎드려서 비시식~하고 웃었다 .

마음 속으로 ..

하나님의 소리를 들어가면서도 말이다.. ㅠ.ㅠ;; ..

그런 만큼

인간의 눈은 세상에 고정되어 있고

인간의 한계는 쥐꼬리 만큼의 길이도 되지 못한다.

 

하나님이 계심...하나님이 하실 것임.. 하나님이 들려주시는 목소리.. 를

현실감있이 느끼고 보면서도

저리 한다.

 

그렇다.

인간의 눈으로는 늙음은 다시 돌아가지 못한다.

빠진 뼈가 다시 채워지지 못했을 - 지금은 골다공증 약이 있지만..  - 시대다.

누구르져 구부러진 척추는 아기를 배면 죽을 만큼 쪼그라져 있고

그 골반으로 아기를 날 수 없으며

말라 비틀어져 종이장 같아진 자궁과 질로는 대형사고를 유발할 뿐이다.

목소리만 들어도 갈라진 그녀의 성대로 보아

임신 중 늘어나는 황체 홀몬으로 인한 우울감은

어쩌면 자살을 초래할지도 모를 위험한 상태고

늘어나는 혈액량은 느리게 뛰는 사래의 심장이 견뎌내지 못하고

터져 버릴 것이며

태어나는 아기는 노산모의 기형위험률을 극도로 높여 놓을 것인데..

어찌.. 어찌... 다.

그러니.. 그런 것 모르는 아브라함 조차도 '피식' 웃지 않는가?

 

내 눈.

사래라 보이는 자들에 대한 비판의 눈이

그정도까지 일지 모른다 .

하나님은 그래도 그들을 '사라'로 보시려 하시는 데

나는 사래에서 멈출 수 밖에 없는 그들을

경멸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이야기다 .

 

하나님은 이렇게 나를 깨우치신다.

 

그들을 용인함이 '내게 복이다'

그들을 용인함은 내 영혼에 새로운 생명의 기운을 안길 것이다.. 라신다.

 

나..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말씀을 받아들인다.

말씀대로 하길 선택한다.

말씀대로 이루어주실 성령님을 기대하고

피식 웃는 아브라함의 미련한 불신을 예수 십자가에 내려 놓겠다.

그게 . ...오늘 붙들고 살

내 결심이고

그게 내게 원하시는

하나님의 레마시다.

 

 

내 하나님

나의 주님이시여

 

제가 요즈음

영적 게으름에 빠졌던 것 같습니다.

주님의 도장찍으심을 경험한 후

나름의 나태에 빠져

제 주장과 제 의식이

주님의 말씀과 주님의 원하시는 당연한 원리를 앞서서

저의 모든 판단을 사로 잡으려 했던 것 같습니다.

다행이도 어제 당직방.

많은 시간을 묵상을 하려 노력했습니다.

기도 중 .. 머리속은 많은 사래에 대한 오해의 소리...

그 달콤한 파괴적 유혹에 힘들었지만

그래도 주님 앞에 가려 노력을 했습니다.

 

그게 기쁘셨던지요.

아침에 생각지도 않았던 말씀의 인도하심...

주님 앞에 더 열렬히 섰을 때 인도하시던

그 자연스러운 말씀의 인도하심이

아침에 느껴졌습니다.

 

주여.

저는 제 단점을 잘 알고 있습니다.

있으면서도 사래를 사라로 보기는 너무도 힘듭니다.

제 굳건한 믿음,

인간의 한계를 무너뜨리기가 너무도 힘듭니다.

본질적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면

어떤 한계도 넘어서는 것이 당연함에도

그것을 '미욱'하게 믿지 못합니다.

주여.

용서하소서.

주님이 허락하신 이 의로운 자격은

주님의 말씀 가운데 거할 때에야 효력이 있음을 잊지 않게 하소서.

그러기 위해서는

사래를 사라로 보아야 할 줄 믿습니다.

마음에서 여러 송곳 같은 찌름이 밀고 올라오려 합니다.

그때 .. 주님이 인도하셔서..

자연스럽게 도우소서.

아브라함이 피식웃음을 주님이 모르셨을리 없지만

그의 한계를 인정하시는 하나님께서

끝까지 그를 열국의 아버지로 이끄신 것처럼

제 부족함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앞으로도 계속 '의롭게 ' 인도하실 것을 믿어 의심하지 않으렵니다 .

제 부족함보다는

주님의 완전하게 하실 것임을 믿고

제 의로움 보다는

하나님의 의롭게 하심을 기대하는

제가 되어

더욱 일상이 힘이 있게하시고

미움과 더러움,

비교와 속상함,

억울함과 원망이 없어지도록 도우소서.

그 어이없는 불신의 뼈다귀들이

제 마음에서 사라져

주님 말씀하시니

그대로 믿어지는 제가 되게 하소서.

이나라 ..

이 병원..

모두를 주님께 의탁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감사하며 기도했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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