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권한 이양[롬9:19-29] 본문
20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21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어리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 이 사람아'.. ^^*
웃음이 나오려 한다 .
나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눈이 느껴지려 한다.
어이없는 자녀, 조금 성장하여 사춘기에 들어서서
마치 어른 흉내내는 .. 그래도 순진한 아들을 보며
아이구 이사람아.. 하는 듯한 느낌.
하나님의 사랑이 느껴지며
내 어이없음이 그래도 봐줄 만한 ,
주님의 예수 안에서 씻긴 후에 티 묻은
그래서 '얼른 회개'만 하면 될 만한 조금은 덜 죄책감 가져도 될만한
그런 내 모습인 것 같이 느껴져서 그렇다 .
흐뭇하다.
그러면서 말씀이 이어진다.
너무나도 유명한 '토기장이' 비유 구절.
정말
권한은 모두 주인에게 있는데
불평은 모두 '질그릇'인 내가 하는게
어이없고 어불성설인 일이 아니던가?
어찌..
그릇이 그릇 만드는 분에게 무어라 할까?
그렇다면
그것을 받아 들이지 못하는게 무슨이유이던가?
왜 나는 지금까지 온전히 받아 들여
하나님의 진짜 사랑하시는 제자,
'이 사람아'의 사랑담은 질책마져 듣지 않는
그러한 귀한 제자가 되지 못했던가?
그것은 우선
난 내가 '그릇'인 줄 몰라서였다.
그것도 투박한 '질그릇'인줄..
이거..
불신자들에게 이야기 하거나
단지 구원 만 받은 선데이 크리스찬이거나
자신의 욕망을 믿음과 버무려 착각하시는 이질적 신앙인들에게는
그리해당하지는 않는 이야기다.
그들은 이해조차 못한다.
세상에 오직 주인이 '자기'인 시대인 것을..
내가 홀로 만들어졌고 자기가 주인인 세상이 어찌 가능한가?
아니면 그들은 아무 의미없는 '정자'와 '난자'의 결합과
그것들의 체세포 분열에 의해 형성된 존재고
생명이 다하면 썩어 문드러지고 더 이상의 자신의 존재는 없다 생각하는 자들에게는
만들어진 그릇이라는 의미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을 것이다 .
그런 자들 말고..
진실을 알기를 원하고
진리를 접한 자들.
예수 그리스도의 그 몸바쳐 자신을 찢으신 놀라운 십자가의 이유가
정말 가슴저리게 궁금한 자들에게는
자신이 누구인지 궁금할 것이고
그것만이 사는 '이유'를 알게 할 것이고
그래야 살아갈 목표와 방향을 잡게 될 것이지 않겠는가?
우리는 '그릇'이 맞다.
어제그제는 'tent' ,육신의 장막이라 표현 한
우리의 자기인식의 근원이 '영혼'을 담고 있는 그릇.. 말이다.
이 사람들아.. !
그렇다면
나는 그릇임을 아는데
내가 바라보는 세상은 어때야 하는가?
질그릇... 인지 놋그릇인지 유리.. .인지 알아야 한다.
내가 나를 바라볼 때 어떻던가?
혹시 질그릇임을 싫어하고 좌절하며 유리난 반짝이는 상아그릇을 질투하지 않던가?
거기에서 '좌절'이 싹트고
욕구 불만이 싹트고
환경이든 유전적 소인이든 ....어떤 이유든 나를 바라보는 그 스스로의 생각의 오염이
인생을 힘들게 하는 것을 모르지 않는가?
오늘 말씀의 표현대로
'질그릇으로 어찌 만들었는가.. ' 따짐을 하는 것은
그래도 '조물주'이고 토기장이이신 하나님을 인정하는 사람이기라도 하다.
그냥 끝없는 , 좌절덩어리 ... 세상을 향해 투영하는 자들은
끝이 없는 나락일 뿐이다.
이제 내 모습이 어떻든
그 모습을 받아들임이 필요하다.
그 받아들임이 쉽지는 않다.
많은 인생의 연단과 고통이 있어야 한다.
좌절을 거쳐서 다시 일어섬의 반복이 필요하다.
그거.. 아주아주 힘든 과정이다 .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어서지 못하고 포기한다.
하지만,
우리는 다르다.
우리는 토기이고
우리를 그리 만드신 분은 토기장이이신 하나님이시고
그러기에 당연히 '이유'가 있지 않을까...기도와 말씀과 삶 속에서
투영하고 깨달아 가는 자들에게는
그 깨달음의 번뜩함이 있게 된다.
성령이 그리하신다.
그리하여 예수그리스도께서 피흘리신 이유를 깨달아 알고
세상의 갈리고 닦임의 과정을 통하여
질그릇의 이유를 알아 내어 받아 들이기 시작하면
그제야 하나님의 보배로운 영광이
그 그릇에 담기는
'보배그릇'이 되는 것이다 .
그렇다.
그게 의미다.
인생의 의미는 그것이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
내가 질그릇 토기임이 아무렇지 않아질 것이다.
그때는 '금 그릇'은 더욱 촌스러워 보이고
질그릇은 담긴 보배만이 더욱 드러나게 보이게 하여
나는 낮아지고 하나님은 높아지시니
나의 질그릇적 목적이 더욱 환하게 드러나게 된다.
나.. 안다.
그러함에도 아직 난 내가 '토기'이고 '질그릇'임이
일상에서 그리 잘 적용되지 못한다.
나를 질타하는 조금의 소리라도 있으면 금새 얼굴이 굳어진다.
눈빛이 사나와지고 목소리의 톤이 올라가려 한다.
조금이라도 놀리는 소리가 있으면
급히 쪼그라들려한다.
그거.. 왜 그런가?
나의 깊은 곳에
아직도 '내'가 주인임을 놓치 않으려 하고
내가 질그릇임을 들키지 않으려 하는
몸부림의 반작용이 아니던가?
그것 ,
예수께서 내 토기장이 이심을 알면서도
자꾸만 일상에서 잊어 버리게 만드는
내 자아의 퍼덕퍼덕 거리는 살아있음 탓이 아니던가?
그렇다.
이제는 '권한 이양'이 더 일어나야 한다.
내 주인은 내가 아니다.
내 주인은 예수님이시고
내 주님은 하나님이시다 .
그 사실을 불철주야 가르치시고 인도하시려는 성령하나님이
내 영혼의 그릇에 담겨 계시지 않는가?
토기 장이이신 하나님과
그 분의 빚으신 토기인 나를 인정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세상의 어떤 것도
나를 흔들 수가 없다.
내가 하나님의 피조물인 사실은
궁극의 자존심이다.
나는 내 부족함으로 인하여
주님을 더 드러낼 수 있음이
가슴 깊숙이 묻혀 있으면
언제나 어디서나 나를 흔들 수있는 외부적 자극이 있을 수 없다 .
더구나 그러함을 보호해주시는 '보혜사' 하나님이 늘 계시지 않던가?
감사하다.
하나님께서
오늘 아침부터 '이 사람아'.. 하신다.
나.. 질그릇 토기에게
내 주인되신 예수께서
이사람아 하시는 아침이다.
주님.
귀하신 내 주님.
너무 귀한 진리,
너무도 좋아하는 구절임에도
잠시 눈만 뜨고 세상에 시선을 돌리면
전혀 기억이 없어지고
어느새 세상의 주인은 내가 되고
내 모든 것은 내것이란 개념이 제 영혼을 그득채우고 맙니다.
그러다가 조금의 외부적 자극이라도 있으면
부르르 ..
죄송합니다.
내 주님.
주님이란 주인님이시라는 것임에도
그리 부르면서 아직도 주님을 제 옆으로 비껴 놓은
힘없는 집안의 어르신을 뵙는 불효자 같이 행동하고 있었습니다.
주여.
오늘도 내 안의 주님은 하나님이시고
제 일상은 주님을 담고 모시는 '토기'의 일상임을 고백합니다.
주여
잊지 않게 하시사
주님 뜻대로
주님께 권한 이양한 하루로 살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받들어
감사하며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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