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그러므로 이제의 주하인[롬8:1-17] 본문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제'다.
그러므로 이제다.
무엇을 깨닫고 정신을 차리고 세상을 바라볼 때
세상이 갑자기 이전과는 다른
훨씬 명료한 색과 선명한 다른 무엇으로 보일 때가 있다.
그때 이런 감탄사가 붙을 것 만 같다.
'그러므로 이제'
그런데 그러므로 이제와 같은
그런 돌발적이고 확달라진 게 오늘 내게 있는가?
이전에는 여러 차례 그런 경험을 했다 .
가장 큰 것은
'예수님 첫사랑'을 체험하고
정말 몇개월을 '둥~둥 '떠다니는 것 같았다 .
강력한 성령의 간섭하심.
그리고 말씀 묵상을 시작하고 얼마 안되어
기도하자 마자 '전율'과 더불어 주시던
도서관 (안양 시립도서관 - 무엇인가 해야할 불안감 때문에..ㅜ.ㅜ;;)
단10:20) 다니엘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깨달으려 하여 네 하나님 앞에 스스로 겸비하게
하기로 결심하던 첫날부터 네 말이 응답 받았으므로 내가 네 말로 말미암아 왔느니라
이후 난 불안하여 늘 읽지도 않는 책을 세권네권
가방에 불룩하게 넣어가지고 다니던 습관을 버리고
말씀 만으로 내 삶의 대 획기적인 변화를 받았다.
그 말씀은 내 눈을 바꾸고
단 한칼에 수십년 해오던 내 불안에 기인하던 습관들을 정리하셨다 .
그리고도 셀 수 없던 많은 두 예보다는 경미하지만
깨닫던 기억들이
그러므로 이제.. 하는 단어에 맞도록 있었다 .
하지만.. 오늘 '그러므로 이제'는
그리 큰 드라마틱한 깨달음이 없었음에도
눈에 들어온다 .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은
그동안의 경험에 의하면 그냥 지나면 안됨을 안다 .
이어지는 말씀에 집중해본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
난.. 그 의미를 확실히 안다.
예수님은 내 안에 계시고
나는 주님 안에 있고
나는 주님의 성전.
주님은 나를 감싸시는 암탉의 날개.
서로 양립할 수 없는 개념들이
주님을 깊이 체험한 자들에겐
그게 단지 시적 표현이 아님을 안다.
아니다.
시적 표현은 감성에서 나온다 .
감성은 우리가 단지 육적인 존재로
도저히 양립할 수 없는 물질의 세계의 원칙을 넘어서는 것임을 알게 해주는
그래서 영성과 감성은 절대로 분리할 수 없음을 알게 한다.
시.
그것은 그의 영이 그것을 체험한 증거로
육신의 세계에 '단어'로 표현하게 함으로
비록 기억하지 못하고 육신의 세상에
거의 모든 영혼이 빼앗겨 고착되어 있는
심지어의 불신의 영혼의 소유자들 조차
그 본질을 잠시 깨닫게 하기에
감수성, 감성, 시성이 나오는 것임을 느끼게 한다 .
어쨋든
나의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아는 것은
아직 그 세상의 보통 수준보다
조금 더 깊은 수준이긴 하다 .
하지만, 오늘 그러므로 이제.. 라는 단어와 더불어
오늘 내게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주하인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확신을 넘어서는 온전한 믿음과 체험을 가진 자
그러한 수준 까지 들어오길 바라심이 신듯하다.
그러한 자들에게는
위에 고백한 '세상이 달라보이는' 수준을 넘어
실제로 진리의 세상을 살면서
이 허상의 땅의 현상들을 관조하는
그것도 잠시도 허상에 흔들려
쓸데 없는 욕심이나 고민으로 고통 당하지 않을 것을
예언하고
권면하고
기대케 하시는 것인 듯하다.
그런 그들.
그런 나,
그런 주하인에게는
결코
당연히도 '정죄'함이 없을 것이다.
비록 아직까지의 우리들,
예수님을 머리 속으로
단지 잠깐의 영적 감수성으로 느끼는 정도에 멈추는 자들에
해당하는 게 아니고 말이다.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그런 그들
그런 주하인은
이제 사망과 그들의 현상(불안 갈등 싸움 질투 포악.. )은
더 이상 흔들 수가 없다 .
생명
성령
... 이 귀중한 원리 앞에서
그것들은 떨구어져 버려
우리는 해방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아.
얼마나 행복한가?
잠시의 은혜
그 은혜 가운데
창밖을 비춰드는 이 오월의 따사로운 햇빛과
살랑이는 바람으로 느껴지는
이 피부를 간지름 만으로도
이리 행복한 것을...
해방되어 폭포수 처럼 밀려드는
잠시도 나를 놓아주지 않으시는 생명의 성령의 폭주가 있다면..
17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그러기 위해
아직은 거쳐야할 '고난'을
주님은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이제
더 이상 '고난'은 슬퍼하거나 두려워하거나 부끄러워할 것이 아니다.
그것은
주님 예수님의 영광을 위하여
고난의 십자가를 지신 그 모본을 따라서라도
기쁨으로 지어야 한다 .
영광의 천국,
생명의 나라
영생의 그 나라의 법칙이 성령으로 인하여
끝없이 나를 사로잡게 하기 위해서라도
이제 나는
기쁨으로 감사하여야 한다 .
모든 고난을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함으로 기뻐함이 마땅하다 .
그게 약할 때 강함이고
그게 '그러므로 이제' 그리해야할 원리다 .
귀하신 내 주님.
벌써 눈 깜작할 사이에 목요일이 되었습니다.
많은 블로그 친구들과 또 한주.. 하며 월요일 인사를 나눈게 잠시인데 말입니다.
그래도 헛되지 않음은
'그러므로 이제'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로서
조금 더 가까이 다가서는 하루하루가 되어가고 있음을 말씀하심입니다.
주여.
그래서 아무 의미가 없을 매일이
이렇듯 의미로 채워져 갑니다.
그래서 행복합니다.
주님은 모든 일에
이해할 수없는 것을 이해가 되게 만드는
소망이십니다.
매일 같이 움직이는 , 커져가는
생명의 성령의 원리이십니다.
내주님이시여
소망의 하나님.
그 하나님을 전 이리 찬양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감사하며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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