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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란과 위로의 진짜 의미 [고후1:1-11]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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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란과 위로의 진짜 의미 [고후1:1-11]

주하인 2013. 4. 4. 09:32


 

 

5.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고난과 위로는

그리스도인에게는 '필수'의 단어다.

고난은 원죄적 우리의 때를 빼기 위한 '도구'이고

위로는 그 연단의 과정을 이겨나가는 힘이 되는 하나님의 도우심이다.

따라서 고난이 없이는 위로도 없고

위로 없는 고난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세상의 위로는 '힐링', '소통', '상담', '우정'등의 아무리 고운 단어를 붙혀도 정답이 아니다.

유한하고 불완전한 그들의 그것은 정답이 아니다.

오직 위로는 주님의 주시는 은혜 뿐이다.

 그제야 고백할 수 있는 것이 "고난은 유익이다. "다.

 반드시 있어야할 필수 불가결한 영적인 원리다.

고난을 기뻐해야할 이유다.

 

 

6.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그런데 '우리의 환란과 위로'와 '너희의 환란과 위로'이 나온다.

우리는 누구인가?

바울 ... 이다.

너희는 누구인가?

고린도 교인이다.

 그것은 '나'에 대한 말씀이시기도 하다.

이 말씀을 묵상하는

말씀 앞에 겸허한 어떤 분들에게 대한 말씀이시기도 하다.

 

 고난.

나에게 주어진 고난이 너무 어렵고 힘들어 전혀 소망이 없을 때도 있었다.

예수님 영접하고도 오랫동안 그랬다.

말씀을 들어가면서도 이해와 받아 들여짐의 괴리는 오래 되었었다.

그러나 점차 '고난'이 유익임을 깨달아 갔다.

시간이 지나며 매조키스트는 아님에도 고난이 기쁨이 될 수도 있음을 알아가게 되었다.

그것은 '고난' 을 고난으로 몸부림쳐 벗어나고져 애쓰는 것이 아니어도

하나님의 내 그 고난을 하나님  쪽으로 승화시키려는 약간의 '기억' 만 가지고도

놀랍도록 주시는 '은혜 "때문이었다.

진짜고 정말인 고백이다. ~~^^*

시간이 지나면서 고난이 있으면 '은혜'에 대한 기대도 솔솔 불어 오기에

고난은 안받았으면 좋을 것이지만

불가피한 고난이면 '은혜'를 더 기뻐하게 하시기도 했다.

 그리고 , 고난은 '기도' 의 기회임을 깨달아 알게 하시고

기도하면 만나주시는,

그 깊은 위로와 평강을 통해

"'기도'할 수 있음이 진정 '복'의 정체" 임을 내 입에서 고백하게 되어 간다.

그렇다.

어쩌면 그것을 깨달아 알게 하시고

그것을 넘어서 진정 영혼 속에서 '확신'으로 자리잡아

'기도하는 삶을 살게 하기 위하여 모든 인생의 희와 비가 허락이 되고

하나님과 매일 대화하며 살아갈 수만 있다면 그것이 진정 제대로 사는 것이 아닌가... 하는

너무나 당연하지만 깊이 내 마음으로 오기는 힘든 깨달음들이

하나하나 자리 잡아가게 하는 것도

'고난'이 있음과 그 고난을 통한 '은혜'의 기쁨이 증폭된 탓이다.

문제는 '시간'이 더 필요하고

더 깊이 주님을 사모하여 필요없는 '고난'의 원인을

어서어서 내 속에서 제거하고

필요한 지혜를 더 얻음이지만..

 

오늘... 그 고난과 은혜의 당연한 원리 뿐 아니라 다른 것을 생각케 하신다.

'나의 환란과 은혜'가

나 혼자 만의 환란과 나 혼자 만에게 주시는 '은혜'가 아니고

그 환란과 은혜를 주신 이유가

'그들의 은혜'를 위하심이고

그 은혜를 체험한 그들의 영혼이 '그들에게 허락된 고난의 의미'를 깨달아

하나님께 한걸음 더 다가가게 하심을 위하심이다.

 

 

7.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 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소망'이다.

'소망의 견고함'이다.

그렇다.

인생 살다보니.. 별의미가 없다.

아니... 아무 것도 의미가 없다.

돈.. .아니다.

명예... 아니다.

재미.. 도 한계가 있다.

자아의 만족.......도 그럴듯 하지만 아니다.

마지막 하나... 인간관계.... 그럴 듯하다.

인생의 모든 것을 '자식'에게 걸 수도...

타인을 위한 '이타주의' 를 인생의 목표로 삼고

그것의 개념을 확장 시켜 ' 자아의 실현'을 목표로 삼으면

어쩌면 조금은 그럴 듯한 '삶의 의미'로 삼아 갈 수는 있겠다.

 

그러나,

그런게 과연 '소망'이 될 수 있을까?

그러다 아니면.......

죽어서 영혼을 구원해줄 '구세주'가 어디에도 있음을 발견한다면...

누구처럼 죽을 때 '죄가 수미산 보다 높다'고 소리쳐 외치고 죽어갈 수 밖에 없지 않던가?

 

어디에도 '구원의 길'은 없다.

'소망'을 걸만한 진실이 없다는 이야기다.

'예수님' 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길과 진리와 생명을 붙든 자,

그 붙듦은 세상의 삶 속에서 확신하고 사는 자,

흔들릴 일이 없다.

고난도 의미가 있어지고

은혜는 더욱 감사하게 된다.

그게 .. '소망'을 가진 자다.

 

 나.

부디 바라기는

그 주신 기쁨, 확실한 소망이

더욱 더 견고하게 유지되어

이땅의 삶이 흔들릴 일이 없길 간절히도 바란다.

오늘 고난은 그 소망을 더 뚜렷이 하는 도구다.

은혜를 통해서 그 단단해진다.

소망이 날로 커지는 것이다.

타인을 위한 고난과 넘치는 은혜.

감사하다.

 

 

8.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생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보라.

바울 님 들은 이처럼 죽기까지 심한 고난을 받았다.

얼마나 심한지 '살 소망까지 끊어질 지경'까지 고생을 했던가?

 

 

9.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인간의 깨달음으로만은 가능치 않은 일이다.

샤르트르가 '수만명'의 불신자를 양산할 만큼

불신자중 최고의 지성을 자랑하는 사람이었지만

그는 죽을 때가 되어서는 가까운 사람들에게 물건을 집어던지는 등

히스테릭한 두려움을 보이면서 죽었다고 한다 .

 위에 말한 모 스님은 죽을 때 ' 내가 큰 죄인'이라고 탄식하며 죽었다한다.

 우리 믿는 자들,

주님 안에서 고난과 위로로 인한 소망을 깨달은 자들은

죽을 만큼 힘이 들어도 '소망'이 있다.

'그 안에 임하시는 하나님의 뜻' 을 알기에 그렇다.

그렇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의지하게 만드시는 ' 모든 인생의 원리를

알아지기에 그렇다.

 

 

주님.

괜히 바빠서

주님 자꾸만 말씀 묵상이 단속되어 죄송합니다.

하지만 말씀 묵상의 내용이

환우 들... 몇분에게 적용되어 전해졌습니다.

불신의 환우 분에게는 '날 것'의 예수님 말씀을 그대로 전했고

그분은 반항을 멈추고 감사하며 돌아갔으며

선교사 부부들께서는 오셔서 위안을 받았다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어떤 방법으로든 역사하심이 있으심을

다시한번 느낍니다.

 딱딱한 열심도 게으른 듯하지만 자유로운 은혜도

제가 고난 중에 있을 때에도

말씀으로 은혜를 누릴 때에도

묵상을 일찍 다 마무리하고 완성된 레마로 외침도

자꾸 단속되는 오늘 같은 상황에서도

주님은 주님의 방법대로 이끌어가시는 하루임을 느낍니다.

 

주님.

그래서 점차로 자유로와 집니다.

소망이 견고해지려 합니다.

고난이 올때 위안이 넘칠 것을 기대하게 되고

고난이 축복의 또다른 변장이라는 말씀도 이해가 가려합니다.

주님.

무엇보다 기도하게 하시려는 뜻의 인생의 고난임을 깨닫게 되고

감정부분까지 그러함을 기뻐하고

기도하는 사람이 세상의 어떤 사람들 보다 귀하게 보이는 것도

모두 주님의 연단 덕임을 기억합니다.

주님.

그래서 점차로 '주님이외'의 그 어떤 것도

의미로 자리잡지 못하게 되어가고 있음을

전 느낍니다.

예.

아직 조금의 큰 자극이 올때 흔들려 가라앉으려 할 때도 있지만

그럴 때마다 다시 주신 은혜의 때를 기억하고 사모하고

 기도의 기쁨을

기도하는 것의 소중함을 깨달아

다시 주님 앞으로 다가와 '소망'을 유지하는 시간이 짧아짐을 느낍니다.

하지만 더욱 바라옵는 것은

그러한 간격이 있지 말고

이제는 '반사적'으로 기뻐하는

소망이 전혀 흔들리지 않는

늘 평강의 상태로 절 만들어 주소서.

주님.

이제 간절히도 바라옵기는

고난과 이어지는 은혜의 원리가

나 혼자 , 내 속의 평안함에 만족하고 자족하는 데 머물 지 않기를 원합니다.

바울님처럼 처절한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받기까지

그리 못할 지라도

내 주위.. 를 위하여서라도 주님 ... 인내하고 기뻐하게 하소서.

주님.

인간관계의 회복을 목적으로 하기보다는

관계 속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화합을 목표로 삼게 하소서.

그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원리에서

잘 익어갈 수 잇도록 하소서.

그들을 위해서 인내하고

그들이 저를 보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위안'을 체험하게 하기 위해서

더욱 기뻐하게 하소서.

주님.

말씀대로 역사하는 모습을 보여주게 하소서.

말씀 묵상의 힘을 알게 하소서.

하나님 앞에 매일 나가 서는 자의 삶이 얼마나 힘있고 아름다운지

제가 증인이 되게 하소서.

내 주여.

감사하신 우리 주 그리스도의 이름 받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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