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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신과 자기 기만 ( 렘37:1-10 )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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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신과 자기 기만 ( 렘37:1-10 )

주하인 2010. 4. 29. 10:40

제 37 장 ( Chapter 37, Jeremiah )  

 

어찌 연이

저 외로운

저 산

저 나무 위에

걸려 있어야 했을까

 

저 높은 곳에 있으면서

저 연은

무엇을 보고 있을까

 

혹여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빨리오실

가장 아름다운

하늘의 하나님

재림하실 예수님을

고대하고 있지 않을까 

 

 


1.  요시야의 아들 시드기야가 여호야김의 아들 고니야를 대신하여 왕이 되었으니 이는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그로 유다 땅의 왕을 삼음이었더라
  누가 되어도 마찬가지다.


 
2.  그와 그 신하와 그 땅 백성이 여호와께서 선지자 예레미야로 하신 말씀을 듣지 아니하니라
  주님 말씀을 경외하지 않는 자들이 움직이는 세상은..


 
3.  시드기야 왕이 셀레먀의 아들 여후갈과 마아세야의 아들 제사장 스바냐를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보내어

    청하되 너는 우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라 하였으니
  주님을 믿는 다하지만

' 하나님' 그 분을 자신의 영달을 위하여 존재하는 분으로 인식하거나

기도를 하되 기복 만을 위해 하는 기도는

주님이 기뻐하시지 않으신다.


 
4.  때에 예레미야가 갇히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 가운데 출입하는 중이었더라
  예레미야님의 40년 기간동안

그 분의 예언이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감금과 자유의 몸과 도피 생활이 되풀이되며 

그는 어떤 마음으로 버티었을까?
 

 
5.  바로의 군대가 애굽에서 나오매 예루살렘을 에워쌌던 갈대아인이 그 소문을 듣고 예루살렘에서 떠났더라
 예언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 같고

갈대아 인에게 멸망한다는 무서운 예언이 바로군대가 나오자 마자

떠나가버리지 않는가?

 하나님 말씀을 예언하는 예레미야가

사람들에게 조롱거리가 되지 않았을까?

예레미야님 스스로는 이루어지지 않는 말씀이 얼마나 부담이 되었을까?

 
 
6.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어리석은 생각일 뿐.

그 분은 늘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셔서 견디실 수 있었다.

견디는 것은 우리의 생각일 뿐.

그 분은 흔들림이 없었다.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은 이루어진다는  확신이 있었다.

이게 '문제'다.

확신.

확신이 인간적인 품성에 의한 '의리' 내지 '충성'에 속하는 범주라면

당연히도 위에 말한 대로 40년의 기다림동안

어찌 단 한번이라도 흔들림이 없었을 것인가?

흔들림이 있었다면 영적인 최전방에 서 있는 선지자에게

사단의 공격이 없었을것인가?

그게 어찌 가능한가?

그렇다면, 그의 '확신'은 어디에서 근거하는가?

   
9.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는 스스로 속여 말하기를 갈대아인이 반드시 우리를 떠나리라 하지

     말라 그들이 떠나지 아니하리라  
10.  가령 너희가 너희를 치는 갈대아인의 온 군대를 쳐서 그 중에 부상자만 남긴다 할지라도 그들이 각기

      장막에서 일어나 이 성을 불사르리라
  늘 동행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들을 수 있는 '영성',

그게 그의 확신의 이유다.

 

 

 어제는 수영을 마치고 집에 들어가서

느즈막히 '기도원'을 향했다.

수요 예배를 빼먹기를 다반사로 하고도

조금 늦게라도 기도원 예배를 드리면 될 것을..

주님이 기뻐하시는 예배의 통쾌함 - 진심으로 통쾌하다 -의 기억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더 사모하기보다는 그 통쾌함 후의 여유로움을 빌미로

자꾸만 미루다가 이렇게 게을러지기를 수도 없이 되풀이 하고 있다.

이 어리석은 주하인.

이 게으른 자.

그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게으른 나 마져 기뻐하실 것을 멈추지 않을 것을

나름대로 확신하고 늦게라도 올라갔다.

성전에 앉자마자 헌금송을 부르고 축도를 하신다.

이런..

정말로 성장하길 원한다면,

그래서 이렇듯 자주 굴곡과 부침을 되풀이 하는

어리석은 영성에서 벗어나

주님의 뜻 가운데 굳건히 서기를 원한다면

더 열심을 보이고

더 절제와 인내와 노력을 드려야 함을 앎에도 불구하고

이 오래된 게으른 유약함은 날 놓아 두질 않는다.

 그래도 '속이는 소리'와 '그래도 주님'이라는 최소한의 소리에서

주님을 선택하고 올라간것이 다행이다.

 다들 하나 둘씩 기도를 마치고는 돌아간다.

난 성전의 뒤편에 앉아서 벽을 향해 돌아 앉아 기도를 했다.

찬양, 감사, 회개, 찬양, 중보, 또 찬양, 감사.....

혼자만 조용조용히 그랬다.

 

 

 

 

 

 

마침 수요일.

Silkroad 중창팀 연습이 있는 날이었다.

점심시간 남자 의사 중 찬양에 관심있는 자들로 모여서 이루어진

꽤 괜찮았던- 지금은 많이 퇴사하는 바람에 줄었지만- 팀이다.

 중창팀의 지휘자이신

유명 테너 김형철 선생께서 덕분에 개인지도처럼

발성 연습을 잡아 주셨다.

' 성대를 비빈다는 느낌으로 ...

 아랫배에 힘을 주고

 연구개와 경구개를 열고 소리를 돌리듯...'

  찬양을 혼자 할 때

배운 발성법을 이용하여 한다.

그러면 놀라운 은혜가 임한다.

내 몸이 하나의 '공명통'이 된 듯한 느낌이 든다.

그리고 주님께 악기가 되어 내 영혼을 울려 노래하는 듯하다.

벽을 바라보고

창밖에서 비내리 바람소리 약하게 들리는 가운데

난 내 속에서 내 성대를 타고 나오는 공명의 떨림 가운데

주님의 기뻐하심을 느꼈다.

소리는 작지만 작아도 발성이 된다.

고음 조차도 막힘이 없다.

이전에 목으로 부를 때는 고음을 내기 위해서는 큰 소리로

압력을 가해야 고음이 나왔는데 이건 아니다.

 기쁘다.

은혜가 날 사로잡고

또 한번 난 내 삶 속의 움직이는 반경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쓰임을 발견하고

그 쓰임을 통해서 또 한번 내 달란트의 개발이 이루어져 가고 있는

'신행일치의 삶'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있다.

그리고 그 행동이 그냥 내 의지적 발휘가 아니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성령의 충만함'이 에너지가 되고

그로 인하여 나이에 상관없는 기쁜 삶이 이어진다는 사실...

그것을 다시한번 깨달았다.

이전에도 그랬다.

사진이 찍고 싶었다.

그래서  똑딱이 디카 제일 싼것 사가지고 찍었다.

그러니 아름답다고들한다.

그러다가 그게 블로그 글과 연결 되고 사진 시화가 나왔다.

그 가운데 내 의료적 능력도 마찬가지였다.

................

 

 예레미야님.

나와 다른 분이시다.

아니, 내가 도저히 비교조차 감당할 수 있을 그런 평범한 분이 아니시다.

그런 그 분은 40년의 기간 동안

얼마나 많은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체험하고 있었을 것인가?

그의 눈물은 그의 하나님 기쁨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어리석은 이스라엘 인들에대한 강렬한 안타까움의 눈물이고

긍휼의 눈물이고 중보의 눈물이었다.

그런 그 분이

겨우 몇년의 착오와 기다림으로

흔들림??

아니리라 난 확신한다.

 더구나 때가 되면 이렇게 임하셔서 강력히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계시니 그는 흔들림이 없었을 것이다.

 

확신.

세상에 살면서 흔들리지 않고

자기길을 갈 수 있다는 것.

그 길이 사망의 길 만 아니라면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일까?

 저들,

바벨론의 힘으로 왕에 오른 시드기야와 그의 일행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확신이 있었던 듯싶다.

그러기에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 '예레미야'의 예언을 무시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면서도

스스로는 '예레미야가 잘못된 거짓 선지자'로 합리화하고 있었을 것이다.

스스로 속이는 것이다.

그들을 속이는 '거짓 확신'은 무엇인가?

' 바벨론'의 힘이 자신을 밀어 주는 것을 보아서

즉, 세상이 자신을 원하는 것으로 보아서

그리고 왕궁내의 선지자들 무리가 공통되이 자신들의 축복을 약속하는 것으로 보아서

예레미야의 소리가 거짓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확신과 확신으로 오인되는 '스스로 속이는 이 거짓 확신' 사이의 차이는 무엇일까?

어떤 차이가 있을까?

'든든함'

'기쁨'

'청명함'

'평강' 등이 있으면 진실로 믿을 만한 확신이겠지만

저들에게는

욕심과 허영과 이익 등에 의한 짜릿한 쾌감은 있을 수 있겠지만

위에 나열한 '성령 하나님'의 주실 은혜의 느낌과는 거리가 멀지 않을까?

 

 그렇다면 오늘 나에게 주시는

말씀의 요지는 무엇일까?

' 흔들리지 않는 믿음'

' 확신'에 대한 것인가?

 

 조그만 자극에 때로는 크게 흔들릴 때가 있다.

그럴 때 난 나혼자 당혹스러워 하곤 했었다.

하지만 조금씩 말씀 으로 잡아가는 시간의 길이가 짧아진다.

그게 감사하다.

심지어는 심히 흔들리는 경우에도 말씀이 먼저 생각난다.

아침에 눈 뜨면 먼저 '주님 먼저 ' 떠오른다.

물론 늦어서 죄송하다할 때가 대부분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이 조금은 위안이 된다.

 어제 기도원의 그 흐뭇함.

그 흐뭇함이 꼭 내 잘한 일이 아니었음에도 누리게 되는 현상.

추후...

많이 흔들릴 상황이 와도

거의 자동화 시스템으로 주님의 말씀이 내 영혼을 지배하는 원리가 되고

그 분 말씀이 하나도 의심이 되지 않는 상황이 오리라 생각한다.

그때가 되면 난 상황에 전혀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나이가 더 들어가도 안흔들릴 것이다.

내 경제적 환경이 나빠져도 안흔들릴 것이다.

어떤 일이 있어도 주님이 주시는 평안으로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반드시 주님은 '선'이심을 확신하는 그 확신이

내 전 영혼에 흥건하게 젖어 있을 것이다.

 

 이제 필요한 것은 '절제'다.

조금의 인내가 더 필요하다.

주님의 인내하심과 어루 만져 주심도 아이 때에 국한 되어야 하지 않는가?

 

수영장에 가면 많은 장애우 들이 있다.

대부분은 '자폐아' 들로 아이들과 대화 소통이 그리 쉽지는 않지만

그 아이들도 아이들마다 특성이 있다.

어떤 아이는 고 3짜리인데 굉장히 귀엽다.

아이는 말도 잘 못한다.

뜻없는 소리만 되풀이 하다가 마치 생각난 듯

내 말을 따라서 되풀이 하면서도

얼굴이 밝다.

'화이팅' 하며 손을 들면 한바퀴 턴을 해서 저만큼 가다가도

다시와서 천진 무구한 웃음을 지으면서 다시 돌아와 하이파이브를 하고 간다.

그 아이의 얼굴이 얼마나 행복해 보이는 지

나이나 병의 정도에 상관없이 귀엽다.

 어떤 아이는 덜 심하다.

나름대로 대화도 되다가 갑자기 자폐적 성향을 보인다.

그러다가 집에 갈 때는 일일히 하나둘씩 인사를 하면서 간다.

아이는 조금  느글 맞다. ^^;;

손버릇도 안좋다.

또 어떤 아이는 '조폭' 같은 느낌의 자폐아도 있다.

굉장히 무서운 분위기...

그러면서도 아이 같은..

아이들을 보면서 모두 이해하고 감싸 주어야 할 상대임을 알면서도

그들이 똑같은 행위를 해도 조금씩 귀여움의 정도나 안쓰러움의 정도가

달리 느껴진다.

 

 주님이 날 보면서

어찌보면 나이는 있지만 영적으로 아직 순진 무구한 아이 같은 부족함 탓에

조금은 인내를 하시는 유예기간을 두시지만

언제까지나 그 분 앞에 크지 않는 아이로 두시길 원하실까 ..하는 생각이

아이들을 보면서 들 때가 있다.

 

 나.

예레미야님 처럼 크고 싶다.

그 분이 크게 느껴지는 것은

그 분은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변개치 않으시는 완전한 선이심'을 확신하고

그의 일생을 그 분에게 온전히 맞기고 사는

확신의 삶을 살기에 그러신 것 같다.

그러기 위해서 그는 '40년'을 인내했다.

남들에 대한 사랑과 긍휼로 40년을 한결 같이 목뇌어 주님의 말씀을 전했다.

흔들리지 않고..

나도

그 분을 닮고 싶다.

절제하고 싶고 인내하길 원한다.

그리하여 조금은 더 주님 안에서 성장한 신앙인의 모습을 보이길 원한다.

 

 

적용

 

1.  흔들린다.

 말씀으로 이겨낸다.

 이게 절제다.

 이게 성숙함을 위한 연습이다.

 그러는 나를 기쁘게 받아들인다.

 

2.  식사 량을 줄인다.

 아직도 그러지 못한다.

 그러자. ^^;;

 

3. 성경 세장을 깊숙이 묵상하며 읽겠다.

 

4. 인내한다.

 화를 내지 말자.

 웃자.

 어떤 이유라도 오늘 만큼은 인내하고 웃자.

 

 

기도

 

 주님

주님은 살아계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걱정할 이유조차도 없습니다.

아니, 늘 기뻐해야 함이 옳습니다.

그리고 그 기쁨을 누군가에게 긍휼한 마음과 함께 알려 줘야 합니다.

가끔은 주님의 안타까움을 절실히 그들에게 알려 주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흔들림이 있으면 안될 것이란 생각입니다.

예레미야님을 보았습니다.

그 분은 40년이란 장구한 시간동안

마치 자신의 선언이 틀리기라도 한듯이

이집트 군사가 들어오자 마자 갈대아 군사들이 쫓겨나가는 등

이해할 수 없는 일 들이 다반사로 벌어짐을 되풀이 되풀이 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그를 미워하는 리더들의 비아냥과 협박으로 도망과 감옥에 투옥을 번갈아 가며 하고 있습니다.

그의 삶 속에 인간적으로 생각하여

하등 견딜만한 에너지가 남아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아니... 요새 우울증이 유행이고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그가 삶을 지탱할 에너지가 하나도 남아 있을 것 같아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자주 임하셔도

그의 마음이 ' 흥.. ' 하고 콧방귀라도 한번 뀌게 되면

주님 말씀은 우리 인생에서 버거운 짐처럼 만 느껴지게 될 것임은

이 부족한 신앙인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분은 어떠한 흔들림도 없습니다.

흔들리지 않고 그의 눈물을 뿌림을 되풀이 합니다.

참 .. 배우고 싶습니다.

그의 인격적인 흔들리지 않음이 문제가 아님을

최근에 알게 되어 갑니다.

오직 깊은 주님의 인격적 만남을 통한

성령 충만함, 아니 그를 넘어서는 성령의 끊임없는 폭주 만이

그로 인하여 흔들리지 않는 확신 가운데 거하게 할 수 있음을 요.

그렇다면 저도 힘이 납니다.

부족한 자질이지만

어차피 사람의 자질이 결정하지 않는다면

주님께서 온전한 선이시고

주님이 임하시는 그 놀라운 기쁨의 체험만 나에게 키워 간다면,

그리고 절제의 결심과 더불어 기도만 되풀이 하고

그러함의 결과가 온전한 기쁨이고

그 궁극이 주님 계신 나라의 주님 곁의 안식임을 인식하기만 한다면

결국 '흔들리지 않게 하심'도 주님의 역할이심을 요.

감사합니다.

저 지금 부족하지만

아직 고쳐가고 있는 중이시고

어제 아내의 위안의 말대로

'나를 보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할 자신이 있다'고 했고

'사람의 인격이 변할 수 있음'을 나를 통해서 확신하고 있다는

그 말을 힘입어 다시한번 확신의 과정을 밟아가겠습니다.

 

 주여.

귀하신 주여.

흔들리는 이 땅을 잡아 주소서.

곳곳에서 보이는 갈대아 물러감 같은 현상들을 보고 안심하기 보다

주님의 말씀대로 거의 시대의 끝이 다가오는 현상을 통해

깨닫고 돌이킬 수 있는 우리들이 되길 소원합니다.

주여.

하나더 간절히 바랄 것은

저로 인하여 자제하고 절제할 수 있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받들어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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