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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그러나 그럼에도 (렘 37:12-21 )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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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그러나 그럼에도 (렘 37:12-21 )

주하인 2010. 4. 30. 08:57

제 37 장 ( Chapter 37, Jeremiah )  

 

그렇습니다

 

밤이 깊어만 갔습니다

비는 하염없이 오고 있었고요

날은 유난히도 차가왔습니다

바람은 마구 불어왔습니다

사람이 어디에도 없습니다

시간은 자꾸만 깊어만 갔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리

흔들리지 않았음은 

 

그러나 그럼에도

든든함이

그리 사라지지 않았음은 

 

그러나 그럼에도

오히려

아름다움이

힐끗 힐끗 발견되었었음은

 

주님이 절 보고 계심이었습니다

주님을 제가 바라봄이었습니다

 

주의 빛에 비치는

빗줄기가

아련하게 느껴집니다

 그  밤의 비가

포근히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사랑합니다

주여

 


  
12.  예레미야가 베냐민 땅에서 백성 중 분깃을 받으려고 예루살렘을 떠나 그리로 가려하여 
 백성 중 분깃을 받는 다는 이야기는

베냐민 땅에 사는 사람 중에 재물을 나누어줄 자가 있기에

그리로 받으러 가던 중 이라는 이야기다.

 예레미야님도 '생활인'이다.

그도 삶에서 유리되어 사는 사람은 아니었다 ^^;; 

 

 

 
14.  예레미야가 가로되 망령되다 나는 갈대아인에게 항복하려 하지 아니하노라 이리야가 듣지 아니하고

     예레미야를 잡아 방백들에게로 끌어가매 
  이리야라는 자는 '예레미야'님의 말을 '듣지 아니하고 '

제 고집만 부려서 그 분을 힘들게 했다.

 

 오늘, 귀를 활짝 열어 남의 말을 경청하고 이해하는 하루가 되련다.

 
 
16.  예레미야가 토굴 옥 음실(뚜껑 씌운 웅덩이,  NIV:vaulted cell in a dungeon)에 들어간지 여러 날만에
  예레미야님이 '지하감옥의 둥근 뚜겅을 씌운 칸 '에 갇혀 버렸다.

그리고는 여러날을 잡혀 있었다.

 그도 '갇힌 자'였고

갇힌 곳이 물도 없고 바람도 통하지 않고 전기불도 없는 토굴이었다.

지하 토굴이었다.

그것도 작은 Cell(칸)에 갇혀 아마도 움직 달싹하지도 못했을 거같다.

그 더운 중동의 지방에서..

 그 안에서 그 분은 얼마나 많은 두려움과 억울함과 싸워야 했을까?


 
17.  시드기야 왕이 보내어 그를 이끌어 내고 왕궁에서 그에게 비밀히 물어 가로되 여호와께로서 받은 말씀이

      있느뇨 예레미야가 대답하되 있나이다 또 가로되 왕이 바벨론 왕의 손에 붙임을 입으리이다 
 그래도 예레미야는 다르다.

그는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을 강하게 흔들림없이 전한다.

그가 다름을 알기에 '시드기야'가 찾아왔다.

 

 그도 두려워 했다 .

하지만 그는 갇힌 사실 자체를 두려워 하고

삶의 고난 자체를 힘들어 했을 뿐이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있어서 흔들리지는 않았다.

하나님은 '선'이시고

자신은 '하나님의 선지자'라는 정체감에 대하여 흔들리지는 아니했다.  
  
  
 
20.  내 주 왕이여 이제 청컨대 나를 들으시며 나의 탄원을 받으사 나를 서기관 요나단의 집으로 돌려보내지

     마옵소서 내가 거기서 죽을까 두려워하나이다
 보라.

그 분도 이리 두려워 하지 않는가?

그 지하토굴의 적은 웅덩이가 얼마나 힘든지

요나단의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애원하지 않는가?

'내가 거기서 죽을까 두렵다'라고 절규하지 않는가?
 그도 두려워 하고

그도 힘들어 했다.

그는 중보의 눈물의 선지자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는

하나님의 은혜가 폭포수처럼 생수의 강처럼 흐르는 자이긴 했지만

그도 삶의 힘듦은 힘들어 했다.

 


21.  이에 시드기야 왕이 명하여 예레미야를 시위대 뜰에 두고 떡 만드는 자의 거리(NIV: street of backery)에서

     매일 떡 한덩이씩 그에게 주게 하매 성중에 떡이 다할 때까지 이르니라 예레미야가 시위대 뜰에 머무니라 
 그럼에도 그를 살리는 것은 시드기야 왕이다.

우습다.

가장 그 분을 싫어하는 자의 손을 통하여 Bakery street  , 빵가게가 주욱 늘어서 있는 거리에서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니고 하루에 빵 한덩이씩 주어져서

빵이 떨어질 때까지 이어진다.

 

 선지자 예레미야님도 고난을 받았다.

그 고난은 그 분도 힘들어 했다.

그리고 그 고난은 40년이나 이어지는 지루하고 견디기 힘든 것이고

때로는 깊은 토굴 웅덩이 - 요셉의 '물 없는 깊은 웅덩이'가 생각난다  -에서 갇혀

두려워하고 답답해하고 더위에 지쳐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흔들림 없는 영성을 유지했다.

이것이 중요하다.

난 조금의 어두운 상황에도 자꾸만 습관적으로 '불안'해지려 한다.

오래된 부정적 생각과 사고의 결과다.

그래서 느낌이나 상황에 따라 주님이 계셨다 안계셨다 하는 것 같이

인식하려 하고는 했었다.

 그러나, 오늘 예레미야님은 다르다.

그 분은 그 흔들림 속에서도 '시드기야' 왕의 질문에 단호한 대답을 한다.

그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전혀 의심치 않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삶에서의 유약함은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 들이고 있었다.

 우리 생각에 저정도 경지의 사람이고 성경에 그리 많은 이름이 등재될 정도의 인물이면

다니엘 처럼 , 요셉처럼 환경에 흔들리지 않는

담대하고 꿋꿋한 '초인적'인 모습을 보여야 하지 않는가?
그럼에도 그는 그렇지 않았다.

  그 분은 '만성 고난'을 겪는 분이시다.

만성이라함은 급성처럼 강력한 '발열' 및 '통증' 의 세기는 없으나

지루하게 낫지도 더하지도 않는 짜증나는 고통이 6개월 이상 되풀이 되는 것을 말한다.

 어떤 사람, 장교 중 한사람은 이빨이 자꾸 빠져 '자살했다'는 이야기를 아주 예전에 들었다.

남자들 중 '전립선 염'으로 만성적 불쾌감 때문에 우울해지는 분들 많다.

여성 분들.. 폐경기 증상이 삶의 답답함에 어우러져 '우울증'걸린다.

그 뿐이랴.. 만성적 자극은 사람으로 하여금 우울하게 한다.

그런데 저 예레미야님은 40년이시다.

토굴에 갇혀서 '수일'이다.

그 분도 사람이라서 고난을 힘들어 하지만

그 분이 다른 것이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다.

그는 최소한 우울해 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그가 온전히 주님 안에서 흔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를 세상의 사람들은 '인정'하고 있다.

비록 모든 사람들은 아니지만

가장 세상적인 사람이라 할 '시드기야 '왕이 그의 영성을 인정한 것이다.

 그리고는 그에게 몰래 찾아와 상담할 정도다.

그에게 '빵'을 만족할 만한 정도는 물론 아니지만

지속적으로 제공하는 '만나' 제공자의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

주님을 믿는 길은 반드시 '넓은 길' 만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좁은 길이다.

그길은 영화가 보장된 길 만은 아니다.

축복은 주님이 허락한 부수적 현상일 뿐이고

절대적으로 주님의 영역이지만

축복과 기복만을 추구함은 넓은 길이고

그길은 사망의 길이 될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좁은 길의 현상인 '고난',

특별히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의 외로운 고난일 지라도

주님을 잊지만 않는다면

주님의 은혜를 사모하고

특별히 환경이나 느낌이나 혼란된 생각에 사로잡히지 않고

그 환경 등이 힘듦은 온전히 받아 들이고

힘들땐 힘들어 하기도 하고

어렵고 외로울 때는 그런 자신을 인정하면서도

주님의 말씀 만을 붙들고 있고

주님의 말씀 만이 진실이란 사실을 잊지 않으면서

인내하고 기다리면

어느 순간에 전혀 그러리라 예상치도 않았던 상황에서

우리 소수의 좁은 길 가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당연히 받을 수 밖에 없는

'피할 길'을 예비하실 것이란 사실이다.

 그러기에 정말 중요한 것은

내 우울한 마음이나 느낌에 사로잡히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너무 안그런척 하려 애쓰지도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냥 그런 사실을 십자가 앞에 나와 주님께 고하고 아뢰고

그 분 앞에 기도하라는이야기다.

그리고 말씀의 약속을 믿고 기다리고 인내해야 한다.

주님은 그 사이에 놀라운 은혜로 기다릴 수 있게 하신 후

때가 되면 '시드기야 '같은 자라도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붙혀 주셔서

우리의 일상을 다 책임지실 것이란 사실이다.

세상의 빵이 다 떨어질 때까지

충분한 양은 아닐 지라도

비록 갇혀 있는 듯 답답은 할지 몰라도  - 예레미야님은 특별한 좁은 길이라서 더 힘드실 것이다.

우리는 그보다는 덜하지 않겠는가? ^^* -  먹이실 것이시다.

감사하다.

예레미야님의 약함이 내 약함과 다름없음을 보아서 감사하고

그 분의 고난은 예수님 보다는 못하지만

나보다는 훨씬 더 심했음을 알기에 위안이 되고

그럼에도 그 분의 솔직한 감성이 그대로 느껴져 더욱 감사하고

그 감성을 부끄러워 하기 보다는 있는 그대로 나타내 보임을 배워서 고맙고

누구나 그 분이 그러셨어도 인정할 수 밖에 없게 되고 

또한 그 분의 영적 권위는 세상의 어떤 권위보다 높게 세워지는 원리를 보아서 감사하다.

 

 오늘은 금요일.

일찍 퇴근하는 날.

어제 당직후 날씨조차 개운하니 마음이 더욱 좋다.

내일은 토요일.

근로자의 날이라서 마음이 더욱 여유롭다.

주님이 근래의 답답한 상황에서 조금 풀어주심을 보는 것 같아 기쁘다.

한가롭다.

 

 

적용

1. 성경 세장 깊이 묵상하며 읽겠다.

 느낌이 오면 더 많이 읽는다.

 

2. 예레미야님의 고난을 보면

 고난은 누구도 필수 임을 묵상하자.

 고난은 위안을 체험하는 도구이며

 고난을 솔직히 주님 앞에 내려놓고 털어버리는 신앙인이 되자.

 그리고 가벼워 지자.

 

3.  예레미야님의 권위에 대하여 묵상하자.

 난 묵상하는 사람이다.

 난 세상에 우선한다.

 어떤 그들의 놀림과 이리야 같은 무대뽀도 날 누르지 못한다.

 주님이 날 그리 만드실 것이다.

 

4. 늘 기도하고 준비하는 삶을 살자.

 누가 와서 어떻게 물어봐도 주님을 증거할 수 있어야 한다.

 난 특별히 더 겸손해야 한다.

 시간만 주어지면 주님을 뒤 세우려는 교만이 있다.

 무섭다.  경계하자.

 

5. 남의 말을 들어주자.

 이리야 같은 자 되지 말자.

 어이없어 보이더라도 주님의 뜻 안에서 바라보자.  

 

 

 

기도

 주님.

오늘도 깨닫는 바가 많았습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특별히 예레미야님의 상황에 따라 나오시는 그 분의 감정의 변화가

살아있는 실제임을 느끼게 해주심을 감사합니다.

그 분의 마음이 제 마음과 그리 다르지 않음이 친밀하고 그 분의 고난이 공감이 갑니다.

특별히 어둡고 답답하고 외롭고 변화없는 그 토굴의 고난이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자신이 세상에 낳게된 정체감과 인생관과 세계관의 굳건함을

다시한번 확인하였을 시간일 줄 압니다.

그러기에 시드기야가 찾아왔을 때

조금도 신경정신과적 병변을 보이지 않게 되었을 것입니다.

주님.

오직 주님이십니다.

세우시는 것도

낮추시는 것도

먹이시는 것도

가두시는 것도

모두 다 주님의 손길이심을 압니다.

주여.

저 올바로 세상을 보게 하소서.

세상을 살면서 올바로 주님 뜻 적용하게 하소서.

그 가운데 교만 나오지 않게 하시고

어이없는 감정이나 느낌이나 생각으로 날 휘두르지 않게 하소서.

주님 말씀에만 고착되게 하소서.

특별히 제 자식들도 그리하소서.

세상에 성공도 중요하지만

그로 인하여 하나님의 업적을 드러냄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주님과의 깊은 인격적 동행을 하고

체험을 하는 자들이 되길 원합니다.

늘 주님.

늘 주님 말씀 대로 살게 하소서.

주님 ..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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