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레갑과 집시 (렘 35:1-19 ) 본문
제 35 장 ( Chapter 35, Jeremiah )
동백 같은
저 붉은 열정으로
주님 뜻
순종할 수 있길 원합니다
예수님의
핏빛 붉은
그 십자가 순종을
닮길 원합니다
주님
사랑 안에서
온전한 자유 누리길
간절히 원합니다
2. 너는 레갑 족속에게 가서 그들에게 말하고 그들을 여호와의 집 한 방으로 데려다가 포도주를 마시우라
'레갑 족속'
여러번 구약을 읽었지만 처음 눈에 들어오는 이름.
아래에 곧 나오지만 그들은
'선조' 의 말을 순종하여 -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 ^^;; - 포도주를 마시지 않고
거처할 집도 안 만들고
포도원이나 밭이나 종자도 두지 아니 하는 사람들이었다.
문제는 그런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그들을 하필이면 '여호와의 집'의 '한 방'으로 데려가서
포도주를 마시게 하라 하신다.
너무 희한하다.
아무래도 'test'하시기 위한 목적도 있으시고
그들을 통하여 세상에 , 특별히 주하인에게 알리시고자 하시는
의도가 있으시긴 하는 데
'여호와의 집'에 '하나의 방'에 데려가라시는 게 이해가 가질 않는다.
8. 우리가 레갑의 아들 우리 선조 요나답의 우리에게 명한 모든 말을 순종하여 우리와 우리 아내와 자녀가
평생에 포도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9. 거처할 집도 짓지 아니하며 포도원이나 밭이나 종자도 두지 아니하고
10. 장막에 거처하여 우리 선조 요나답의 우리에게 명한 대로 다 준행 하였노라
좀... 부러운 사람들이긴 하다.
'집시'나 '히피'를 닮은 냄새를 풍기면서도
그들과는 다른 훨씬 절제의 , '정결한 느낌'이 나는 그런 사람들이다.
그런 그들이
'선조'의 말은 들어가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인 포도주 마시라는 말씀에는 '불순종'하는
단호한 태도를 보인다.
이거 당황스럽다. ^^;;
13.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하노라 너는 가서 유다 사람들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가 내 말을 들으며 교훈을 받지 아니하겠느냐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신다.
그러시면서 그 분은 자신의 정체를 '만군의 여호와'이시라 하신다.
하나님은 엘로힘, 여호와, 여호와 라파......등 하나님 스스로를 일컬으실 때
수 많은 이름으로 당신의 정체를 말씀하시지만
오늘은 특별히 '만군의 여호와 '라는 표현을 두번씩이나 쓰신다.
그것은 어떠한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다.
19. 그러므로 나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하노라 레갑의 아들 요나답에게서 내 앞에 설
사람이 영영히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그러시면서 '여호와의 집 , 한 방'에서 과감히 하나님의 말씀이신
포도주를 마시라는 명령에 불순종하는 '레갑자손'을 칭찬하신다.
묘하다.
여호와를 순종하지 않음을 가장 싫어하시는 하나님이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지 않고 대신 선조의 명령-300년 묵은-만을 순종하는 레갑자손을
칭찬하시고 과감히 축복하시면서도
불순종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하여 질타하신다.
위에 열거했지만 이러한 '괴리' 를 어찌 이해할까?
성경을 읽으면서 매일 매일 읽을 때마다 그날 그날 달리 느껴지는
이 괴리 속에 꼭 그날 말씀하실 영적 의미를 두고 계심을 잘 알고 있다.
왜 하필이면 레갑족속이셨을까?
레갑 족속처럼 조상의 유전을 숭배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바리새인들에게는
왜 진노하시고 계셨을까?
다르다면 무엇이 다르던가?
그렇다면 앞으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바리새인들도 '선조'들의 유언을 따라 지키는 것은 레갑족속 못지 않았을것이다.
하지만 레갑 족속은 다른 것이 있을 것이다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레갑과 요나답이란 인물 들에 대하여 '검색'을 했지만
아래에 정리해놓은 요나답에 대한 것 이외에는 특별히 데이터가 없다.
동명 이인 요나답이 둘 나온다.
1) 번은 악한 요나답,
2)번 요나답이 맞는 것 같다.
그 요나답은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히 준행하려는 자.
그래서 자손 들에게도 엄명을 내려 하나님 앞에 서게 하였던 자.
그러기에 하나님은 동일한 '두 부류'의 불순종에 대하여 보시면서도
레갑 자손에게는 다른 면을 보신 것 같다
그들의 '영적인 상태' 를 보신 것 같다.
바리새인들은 선조들의 유언을 똑같이 순종하기는 하되
그들의 기본은 하나님의 본래 뜻이신 '사랑', '믿음' 등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본 원리가 무시되어 있고
단지 조상의 뜻 만이 '우상'처럼 자리잡고 있는 상태이되
'레갑자손'들은 철저히 '선조 요나답'의 비전을 물려 받아 행실로 순종하고 있는 상태인 것이다.
주님의 판단은
겉으로는 당신을 불순종하는 듯 보이시나
그 분은 그들의 상황에서 그럴 수 밖에 없는 '문화적 차이'를 인정하시고
그들의 영혼 속에 깊이 박혀 있는 조상의 유업을 지킴을 통한
하나님 사랑과 믿음에 대하여 읽으신 것이다.
그러시기에 그것은 'test'이고 세상에 본받게 하시게 하시고 싶으신 것이고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세상을 바라보시는 폭'에 대하여
세상 사람들이 옳게 이해하길 바라시는 것이시다.
다시 말하면 ' 상황'에 따라 방법론의 변화는 '약간'의 차이는 인정은 되지만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는 기본에 있어서는 변화가 있으면 안된다는 것이고
그것은 주님은 그 영을 다아시는 분이심을 은연 중 나타내 보이시는 것이고
그러기에 그런 기본을 유지하면
세상에서 어떤 모습이든 '자유'가 우리에게 주어진 것임을 보이시는 것이다.
사도 바울님이 '자유'롭다는 선언을 하신 이유가 거기 있을 것이다.
그 분은 영적으로 그것을 느낀 것이다.
옳게 믿는 자들이 누리는
흐름.
자유.
평안.
기쁨과 기쁨의 눈물
해방
평강.......
난 오늘 저들의 저러한 '무소유'와 물질로 부터의 자유를 통하여
저들이 누리는 저 '평강'을 공감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그들이 '히피'나 '집시'와 다른 점을
그들이 그 본질적 , 영적 자유를 위하여
다른 것을 절제 하되
절제만을 추구하다가 실족하고 변질되어 버린 '바리새인'과
또 다른 것은 '하나님을 의식하는 자유'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집시는 인도에서 유래된 방랑민족이고
지금 동유럽을 중심으로 유럽 전역에서 퍼져 살고 있는
방랑 민족임은 누구도 잘알고 있으며
그들의 삶의 고단함과 우울함은
'길'이라는 명화를 통해서 잘 알려져 있기도 하고
히틀러에 의해서도 대학살을 경험 받기도 했던 민족이기도 하다.
그들은 예술과 전통의 계승자 역할에 일조를 했다.
히피는 1960년대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서구에서
기존 세력에 반항하여 생긴 '행복'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허무주의적 성향의 방랑의 삶을 추구하는 자들이다.
세 부류 모두 '무소유'를 추구하고
자유롭게 사는 삶으로 인하여
이 세상 삶에 찌든 현대인,
특히 주하인에게 매력적인 유혹으로 다가오지만
그들이 레갑과 다른 점은 삶의 목적이
단지 무소유를 통한 '자유', 가벼운 행복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들은 흔들릴 수 밖에 없다.
그들에게는 대마초나 마약등이 가까이 있고
우울이나 폭력이나 섹스등이 많이 들어가 있다.
레갑은 다르다.
' 만군의 여호와'라는 표현의
하나님의 이름이 여기에서 이유가 짐작이 된다.
레갑 민족이라고
그 300여년의 기간동안 어찌 유혹이 없었겠는가?
사람이 사는데 다양한 목표가 있다.
재산, 명예, 자식, .........
이 '욕구'라는 것.
본능이라는 것.
원죄라는 것.....어찌 조상의 유언하나로 다 지탱이 될 것인가?
그들은 매일매일 삶 속에서 싸우고 또 싸웠을 것이다
저런 유혹이나 죄의 억압과 하나님의 말씀사이에서...
인생은 '전쟁터'이다.
영적인 전쟁터..
주님 뜻대로 살려는 레갑에게 그 도전은 만만치 않았을 것이고
그런 그들에게 '만군의 여호와'께서 도우셨을 것이다.
이 땅의 얼마나 많은 수도의 그룹이 망하고 변질되지 않았던가?
카톨릭 수사들은 모두가 건전하신가?
중님들은? ㅜ.ㅜ;;;
그것은 사람은 목표가 있어도 그 안에 수많은 영적 싸움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 싸움을 이기게 하시는 것은
'만군의 여호와' 밖에 없다는 것이시다.
그러기에 그들 레갑 민족이 '하나님의 명령'이신
이해할 수 없는 '포도주'를 마시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그들 안에 흐르는 고고한 흐름은 '하나님의 깊은 뜻'안에서의
자신들이 지켜온 영적 자유함에 따르면
그것은 어떤 'test'일 뿐이란 것을 짐작한 것이다.
그러기에 흔들리지 않은 것이고
만일 그것이 정말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뜻으로 인식이 된다면
그들은 '여호와의 집'에서 순종하여
포도주를 마셨을 것이다.
그것을 아시기에
하나님은 영적인 그들의 상황을 보호하고 만지시기 위해
그들을 하나님의 집 '방'으로 불러 들이신 것일 것이시다.
그렇다면 '나'에게 주어지는
오늘의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지 않아도 좋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늘 이해하고 순종하는 자는
그 안에서 자유를 누릴 수 있음을 말씀하시는 것이시다.
흔들리는 것.
당황할 것 아니다.
주님의 말씀에 붙어 있는 한, 난 자유다.
느낌은 중요치 않다.
주님의 약속이 중요하다.
또 오늘 말씀의 의미는
나에게 좀더 순종의 의지를 발휘하라시는 것 같다.
적당히 말씀의 깨달음으로 느껴지는 영적 달콤함 만을 추구하다가
또 하루를 보내고야 마는 그런 자가 아니길 원한다.
특별히 세기말적 상황이다.
주님은 말씀 구석구석 육신적 소욕을 낮추라 하신다.
커피 덜 마신다.
식사 줄인다.
말 줄이겠다.
순종으로 300년은 못하겠지만 오래 지키려 노력하자.
무소유를 지향하되
주님의 허락하시는 한에서 그리하자
새로 더 펼치는 욕심은 자제하겠다.
아침에 제법 일찍 일어나서 오랫만에 강변을 따라 걸어나와
대로변에서 '버스'를 탔다.
내릴 지점이 가까워서 버스 내리는 문 근처에 서서 있었다.
한 정류장 앞에 팔십은 족히 넘으셨을 할머니가
허리는 반쯤 구부러져 계시면서
짐보따리는 당신보다 더 큰 것을 메고는
버스에 겨우겨우 올라 타셨다.
그리고는 제일 앞자리에 앉으신 아주머니 보고 막 뭐라하신다.
아주머니도 잘못하셨지..
그 할머니 겨우 겨우 버스 손잡이 잡고 계단을 기어 올라오시듯 오시는데도
가만히 쳐다만 보고 있다가 봉변당하시고는
부리나케 튀쳐 일어나 뒤로 가신다.
그리고는 할머니는 그 자리에 앉으신다.
그 짐이 할머니를 반쯤 의자에 밀어서 겨우 엉덩이만 걸터 앉으셨지만
그 버스의 좌석이 할머니 앉으시기에 그리 부족하지 않아 보였다.
사진이 찍고 싶었다.
그 등에 담긴 짐이 꼭 우리 인생들이 짊어지고 다니는
그런 짐의 무게처럼 느껴졌다.
그러면서 할머니가 많이 불쌍해 보였다.
난 언제나 되어야 저런 걱정의 등짐을 벗고
온전히 주님이 주시는 평강 안에서 자유로울꼬..
하루 바삐 '소유'에 대한 미련을 내려놓을 수만 있다면.. .
주님께서 주시는 매일의 만나에만 만족할 수 있다면...
또한, 기도하겠다.
집시나 히피같은 무소유는 싫다.
주님의 말씀이 목적이 되는 삶을 원한다.
성경 4장 읽겠다.
4장 깊이 읽는 것도 괜찮다.
중보의 삶을 산다.
아버지 학교 가겠다.
무엇을 해도 하나님 집 안, 하나님의 집 방에서 해결하겠다.
흔들려도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안에서 흔들려라.
주님이 붙드신다.
주님이 내 대신 싸우신다.
당당하라.
흔들려도 흔들리지 마라 . ..
주하인 !
기도
그렇습니다.
주님은 자유이십니다.
주님 안에 붙어 있는 자의 자유.
그것을 깊이 아는 하루하루 되길 소원합니다.
주님.
제 육신은 아니라 소리치지만
소유를 내려놓을 수 있길 원합니다.
내 통제의 욕구를 내려놓을 수 있길 원합니다.
자존심의 소유를 내려 놓길 원합니다.
자아가 들고 일어서려 합니다.
내 것이라는 개념을 내려놓길 원합니다.
주님 원하시면 주님이 말씀하시면
다 내려놓을 수 있는 결단을 원합니다.
방해하는 세력을 막아주소서.
성령으로 인도하소서.
주님.
주님 뜻 안에서 자유하기 원합니다.
주여.
레갑 족속의 그 대단한 순종을 배우길 원합니다.
주여.
도우소서.
오늘 하루
주님 뜻대로 살 수 있는 하루되길 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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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 : 여호와는 관대하심
[1] 시므아의 아들로 다윗의 족하인데 다윗의 아들 암논과 친하여 암논이 압살롬의 누이 다말에 대한 연고로 발병하였을때 간교한 계교를
가르쳐 주었다(삼하13:3-5).
[2] 겐 족속 레갑의 아들 (대상2:55, 렘35:5-19).
(1) 그는 이스라엘왕 예후 당시에 레갑족속의 족장으로 지혜가 있고 경건하여 극히 존경함을 받았다(왕하10:15-16)
(2) 모세의 장인 이드로의 후예인듯하다 (삿1:16)
(3) 예후가 바알 숭배자들을 진멸할 때 협조하였다(왕하10:23).
(4) 자기 자손에게 절제생활에 대하여 훈계한 것을 거의 3백년을 내려 오도록 엄수함을 칭찬하는 동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의 율법을 준수하지 않은 것을 책망하시고 요나답을 축복하셨다(렘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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