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해는 해다( 요 8 : 41-50 ) 본문
제 8 장 ( Chapter 8, John )
구정 전날
고향 내려 가는 길목의 서해 대교.
눈발은 휘몰아 흩날리는데
해가 보인다.
대교의 철 기둥에 가려지려 하고
쏟아지는 눈발이 시야를 막고
눈 구름이 막아서지만
그래도 해는 보인다.
해는 해다.
주님은 날 보내셨다.
세상이 날 흔들어도
세상속에 내가 흔들려도
난 여전히
주님 앞에 서 있다.
말씀 앞에 서 있다.
주님이 아직은 보이신다.
주님은 주님이시다.
주님은 내 아버지시다.
주님이 날 이 땅에 보내셨다.
나는 보내임을 받았다.
42. 예수께서 가라사대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께로
나서 왔음이라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
난 누구인가?
아버지께서 보내신 자다.
그것이 맞는가?
맞다.
예수님이 그러셨다.
그렇다면 왜 그동안은 내가 누구인줄 모르고 살았는가?
많은 생각들이다.
상처로 인한
욕심으로 인한
무지로 인한.
내가 누구인 것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차이는 무엇인가?
내가 누구인 줄 아는 것 즉, 정체감은 흔들리지 않는 당당함을 의미한다.
상황에 따라 변하지 않는 자연스러움이다.
흔들리지 않는 자연스러움이기에 불안감이 없음이다.
그것은 다른 말로 평안함이다.
주님을 인한 정체감은 '평강'이다.
평안을 넘어서는 전율의 평화다.
세상을 평화중에 살다가 영생을 행운으로 산다는 전제조건이
주님으로 인한 나의 정체감이다.
'나는 아버지 하나님의 아들이다'
다시 한번 나를 돌아본다.
내가 정말 아버지 하나님의 아들이 맞는가?
아버지 하나님으로 불러도 덜 부대끼는 게 감사하다.
43.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함이로다
하지만, 내가 왜 그동안 잘 몰랐던 것일까?
왜 내가 그 분의 아들인지 지금도 확실한 확신은 없는 것일까?
왜 이제야 따스한 기운이 가슴에 도는 것인가?
예수님을 조금씩 알아갈 때마다
내 존재의 정체와
내 존재의 이유가 확실해져 가는 것이다.
많은 길이 있지만
난, 말씀에 집중하기에 가능해져간다.
말씀을 기뻐하고
말씀을 묵상하고
말씀에서 날 발견하고
말씀으로 적용하려는 노력으로 인하여
가능한 것이라 생각한다.
위의 말씀은
'말'에 대하여 나온다.
말을 깨닫지 못하고 듣지 못함으로
마귀의 편에 섰다한다.
참 감사하다.
난 말씀으로 '아버지' 편이다.
말씀은 살아 있다.
말씀 행간행간에 흐르는 성령의 운행을 발견함은 전율이다.
그 분은 말씀을 통하여 임하신다.
말씀은 성령의 통로이시다.
말씀은 하나님이시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
말씀은 하나님이시다.
말씀을 듣지 않는 하루는 죽은 하루다.
말씀을 듣지 않는 아들은 아버지를 무시하는 아들이다.
말씀을 듣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간다.
참 아들.
50. 나는 내 영광을 구치 아니하나 구하고 판단하시는 이가 계시니라
이제 내가 할 일은 무엇인가?
내가 아버지 하나님의 아들로서 어찌해야 하는가?
착한 일을 해야 하는가?
어디까지 해야 하는가?
답은 예수님을 닮아 가는 것이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따라 가고자 노력하는 것이다.
주님 예수님은 그러셨다.
'내 영광을 구치 않는다.'
'구하고 판단하시는 분이 계시다'
모든 영광을 주님께 돌리고 철저히 주님의 판단에 맡긴다...는 것이다.
그렇다.
난 하나님의 만드시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자이다.
당연히도 그 분은 전능자이시다.
따라서 그 분의 기뻐하시는 뜻에 맡겨야 한다.
그 분이 판단하시는 대로 그냥 내려 놓아야 하는 것이다.
문제는,
그 분의 뜻을 아는 것이지만
말씀 묵상이 있다.
말씀에 따르고자 하는 의지를 도우시는 성령이 있으시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우리는 무엇이든 은혜 가운데 할 수 있다.
내가 해야 할 일은
말씀을 묵상하고 기다리는 것이다.
당연히도 의문이 든다.
내 좋아하는 것을 내려 놓을 수가 있는가?
아직도 내 속에서는 상처를 이유로
'내 자랑'하고 싶어하고
'내 존재'가 들어나기를 원하며
'존재감'이 없는 것이 그리도 가슴 아픈 것으로 인식되는 데
어찌 나의 자랑을 내려 놓을 수가 있다는 것인가?
주님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영광 만을 구하고
그 분의 판단을 구하고 그 분이 판단을 다 하심을 앎에도 불구하고
내 속은 아직도 드러내길 원하는
이 강렬한 욕구 사이에서의 갈등을 짊어지고
어찌 내가 '하나님 아버지'를 아버지를 모시는 아들의 '나'로서
자랑스럽게 공포할 수 있다는 말인가?
실제와 실제를 인식하기 위한 현재의 나 사이의
이 괴리감을 어찌 해야 좁혀갈 수 있다는 말인가?
난 늘 그랬다.
안다.
알지만 따르지 못하는 공간의 무게가 너무도 커서
자꾸만 좌절해 왔었다.
그러나,
안다.
하나님의 원리는
시간이 지나면서 이 엉터리 같은 자도 변화가 되어 가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날 용서하며 기다리는 것이 필요하다.
그 괴리감, 그 죄책감, 그 실패감은
십자가 앞에 늘 내려 놓고
말씀으로 녹여 내야 한다.
그러한 선택을 하면 주님 성령께서 알아서 녹이신다.
결과는
난 하나님의 아들임을 강력히 인식하는
최고의 자기 정체감이며
그것은 행복이며 행운이며
이 세상을 살아가는 무게가 가벼워 지는 것이며
결국
세상을 주유하다가(난, 그것을 이리 표현하게 된다. ) 주님 계신 그 천국에
기쁘게 가게 되며
그 분이 허락하신 때가 되면 부활체의 몸으로 부활되어
영생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논리의 장난이라구?
아니다.
확신이다.
시간이 갈 수록 말씀이 확신으로 다가오려 한다.
아직은 솔직히, 위의 고백처럼 괴리가 있다.
괴리를 메우기에는
조금의 더 용기와
조금의 더 기다림과
조금의 더 기도와
조금의 더 눈물과
조금의 더 시행착오의 경험이 필요하리라 생각은 된다.
그러나,
난 내가 누군지 알고
난 나의 결국이 무엇인지 알기에
난 기쁘다.
난 행복하다.
난 가볍다.
그래서
난 세상을 흐른다.
흐르게 될 것이다.
적용
1. 난 아버지가 보내신 자다.
맞다.
잊지 않으려 노력하겠다.
2. 백번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 외우겠다.
3. 난 기쁘다.
기쁨을 전하겠다.
4. 나 혼자 내 삶을 유지하기도 버거웠었다.
내 주위를 보기에 여유가 부족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느낌 보다는 말씀에 서니 훨씬 자유롭고 힘이 있다.
더 그러리라.
말씀에 집중하리라.
5. 말씀 일곱장 읽겠다.
6. 말년 휴가나온 아들을 다정히 보리라.
7. 칭찬은 주님께로 돌린다.
최근에 쏟아지는 칭찬에 마음이 업이 된다.
실은 모두 다 주님의 것인 것임을 ..
8. 비판을 금한다.
주님의 자손으로 그리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
모두 주님께 비평을 맡긴다.
입으로 발설하고 눈으로 쏘지 않도록 조심에 조심을 다하자.
좋은 소리 만 한다.
9. 난 낮추리라.
10. 성령이여 도우소서.
기도
감사하신 하나님.
난 주님의 아들임을 믿습니다.
그것이 감사합니다.
아직은 내 정체가 그리 뚜렷하게 다가오지는 못하지만
그럼에도 난 아버지의 사랑 받는 아들임은 변화가 없음을 믿습니다.
그 믿음이 힘이 생겨가니 감사합니다.
주여.
이제
주님의 뜻대로 살기로 명심하고 각오하는 나에게 힘을 주소서.
의지를 주소서.
성령으로 강하게 잡으소서.
주님이 좋아하시는 대로 살수 있기를 원합니다.
내 칭찬은 모두 주님 것임을 명심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영혼 깊숙히 그것이 내 것이 아님을 명심하게 하소서.
주님은 내 모든 판단의 기준임을 잊지 않게 하소서.
도우소서.
도우소서.
주님의 뜻대로 살 수 있길 도우소서.
주님을 닮아갈 수 있길 도우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받들어 간절히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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