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난 주님을 향해 눈빛 만을 번쩍일 뿐입니다. (눅 18:15-30 ) 본문
제 18 장 ( Chapter 18, Luke )
아이들은
세계 어디에 가도
다 똑같이
이쁜 거 같아요.
아이들은
천사같아요.
아니,
아름다운 꽃 같아요.
한참 피어나는
생명력 넘치는 꽃요...
그들은
사진기를 들이대면
피어나는 꽃처럼
그 얼굴이 환하게 밝아져요,
아니면 부끄러워 해도
청초한 이슬먹은 백합같이
부끄러워 해요.
아이들은
꽃 같아요.
주님께서
아이들 같은 마음을
회복하라하신
이유를
알 듯도 해요....
지난 여름
후쿠오카
오호리 코엔의
불꽃 축제에서 만난
기모노 차림
, 참 유카 차림으로
꾸미고 나온 아이들을
찰칵 ~!
15. 사람들이 예수의 만져 주심을 바라고 자기 어린 아기를 데리고 오매
16. 예수께서 그 어린 아이들을 불러 가까이 하시고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1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아이들 같이 되어야
주님의 만져주심을
바랄 수가 있습니다.
천국은 이런 자의 것이라 하셨습니다.
분명히...
이런 자라는 것은
어린 아이와 같은 자라는 이야기로
그들처럼 받들어야 한단 것은
아이들이
주위에 반응하는
그런 마음 가짐으로
예수님과 이웃과 주위를 받들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어찌 그럴 수가 있지요?
나이가 들어가고
세상의 이유와 논리와
이해와 가치로
벌써 우리의 마음은
많이 굳어 있는데요.
어린 아이로 돌아간 다는 것은
세상의 것을 손해 보아야 한다는
전제를 동반할 수도 있는데요.
아니...
유치한 감성을 다시 지닌 다는 것이
세상의 흘러가는 흐름에
창피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일인데요.
제 진료실을 들어갈 때
소아과 진료실을 거쳐 갈 수 밖에 없기에
거기에
아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전
그 아이들 얼굴 하나하나를
들여다 봅니다.
아니,
제 주먹보다 훨씬 적은 크기의
그 작은 얼굴 들에
어찌나
하나님은 그리도 다양한 마술을 부리시는 지요.
다 달라요.
이쁜 아이
고운 아이
귀여운 아이
안스러운 아이
불쌍한 아이....
그 눈 하나 하나 짓는 표정에
그 움직이는 손동작 하나에
그 발하는 소리 하나하나에
힘없이 기대고 있는 그 몸사위 하나하나에...
어찌도 그리 다양한
안타까움과
사랑스러움을
제 가슴에 몰아올 수 있는지 모르겠어요.
하나님은
대단하신 분이 틀림이 없다는 생각 들예요.
그래서
가다 말고
폴싹 주저 앉아
아이들의 얼굴 높이에 까지
저를 낮추고
아이들을 한참 들여다 봐요.
물론
그냥 보지 만은 않지요.
양손을 들어
아이 들의 볼에 손을 옮기고
엄지와 검지를 펼쳐
그 볼의 일부를 잡습니다.
그리고는
제 이빨을 살그머니 힘을 주며
'이그~~' 소리를 발하며
잡은 양손을 살살 흔들어 줍니다.
저도 모르게요.
그러면
아이들이 대개는
절 보고 '까르르'하고 웃습니다.
아닌 아이,
특별히 부끄러움을 타는 아이나
소심한 아이들 중, 흰색까운을 보고
무서워 하는 아이들은
얼른 엄마 뒤로
뒤뚱거리며 숨어 버리는데요.
그 몸짓이 또 얼마나
내 영혼을 흔드는지..
귀여워 못 견디겠어요.
ㅎㅎ
그 기뻐하는 아이들이 발하는
눈 빛의 번쩍 거림은
내 영혼을 온통 분홍색으로 물들입니다.
부끄러워 도망가는 아이들은
제가 일어나
제 방으로 가려다가
누군가 뚫어지게 보는 느낌을 느끼고
돌아다 보면
틀림없이
그 아이들이 나를 쳐다 보는 데요.
그 순간
영화의 한장면 처럼
아이와 나의 공간이 순간 멈추어 지며
그 아이가 카메라 줌업 한 거처럼
나를 당겨
아이와 나 사이에
그 아이와 나만 있는 것처럼
멈춘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킨답니다.
ㅎㅎ
정말요.
아이들은
흰색까운 을 보면 울지만
저는
우락부락하고 180이 넘는 키에 90키로 육박하는 나이든
아저씨 의사인데도요.
아이들이 잘 안울어요..
실제로 대부분 아이들이 절
기뻐해 줘요.
이유가 있는 듯합니다
아이들은
영혼이 맑기에
영혼이 비슷한 사람을 보면
그런 가 보다 하고
착각을 해요.ㅎㅎㅎ
실제로
예수님 믿기전
아이들은 대부분 절 보면 도망가 버렸어요.
주님은
우리를
이렇게 보고 있는 듯합니다.
참 이쁜 아이.
그렇게 주님과 공감하기를 바라시는 듯 해요.
그렇게 하면
그 분이
눈 높이를 나에게 맞추시고
'얘~~ 너랑 같이 살고 싶구나..
내 나라에서..'
이렇게 고백하시지 않을까요?
날 만져 주시면서 말이지요.
만져 주실 때
아이들이 날 보며 웃는 표정이나
혹은
상처 있는 사람들은
엄마 뒤로 숨는 아이 같은
그 아련한 표정으로
날 보는 것 같은 심사가
바로
우리가 주님에 대한
진심으로 가지게 될
그런 아련하고 기쁜 마음이 아닐까 합니다.
오늘
천국은 이런 자의 것이란 말씀을 하시며
아이들을 말씀하시기에
순간 떠오른 그림이
그랬다는 이야기입니다.
21. 여짜오되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22.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이르시되 네가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23. 그 사람이 큰 부자인 고로 이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
24. 예수께서 저를 보시고 가라사대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떻게 어려운지
27. 가라사대 무릇 사람의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
보세요.
주님이 말씀하시는 거
다 지키는 거.. .
돈 많은 그 관리가
다 잘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사람의 논리로는
틀림없이 말씀을 잘 준행했으니
스스로 기특하겠지요.
어제 그제
아홉문둥이 중 몇은
주님 말씀 준행하여
제사장에게 갔을 것인데도
주님이 기뻐하지 않으신 이유와
비슷하지 않을까요?
아이들이 커가면서
사춘기 들어서면서
나름대로 자기의 비밀을 가지면서 도
아직은 부모님의 말씀을 따라
공부는 열심히 하지만
그 아이의 마음에
사춘기의 반항이 있다면
부모 보시기에
그리도 시원하고 기쁘지는 않을 지 몰라요.
재물을 버리라는 이야기는
그 속을 다 들여다 보는
아버지이신 하나님이
'공부는 못해도 좋으니
네 어두운 마음
네 답답한 마음이 해결되고
건강한 심령을 회복 했으면 좋겠다' 하는 말씀은 아닐지요.
공부도 잘하고
아이와 같은 마음의 건강을 유지하고
모두 잘되면
훨씬 더 좋겠지요?
오늘
재물을 버리라는 말씀은
부자는 모두 지옥에 간다는
그런 어리석은 이분법과는 거리가 멀듯 싶습니다.
재물에 관한 것은
늘 주님이 말씀하시지만
허락되어지신 재물은
훨씬 크고 건강한 재물을 허락도 하실 것입니다.
물론
바늘 귀 뚫는 거 만큼 힘들 기는 하지만
그 바늘 귀 뚫고 들어가는 낙타도
주님은 얼마든지
허락하시니깐
희망을 가지려 합니다.
주님
저도
주님 허락하신 부자로 좀
만들어 주세요.
ㅎ
29.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30. 금세에 있어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시니라
이 구절 도
역시 걸리는 부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철저한 금욕 주의자들.
그게
역시
하나님이 쓰시기 위하여
그러한 정체성으로 부르신 분들도 있고
그들을 통해서
이 어두워져 가는 세상에
잔잔한 감동과 더불어
그 영적 강건함과
맑음을 통하여
주님을 향하여 한걸음 더 나가는
교육적 모본이 되도록 하기도 하십니다.
그들은요.
정말 귀한 분들입니다.
주님이 오실 그날 에
그들에게 주어질 상급은
우리의 상상을 불허할 정도가 분명합니다.
그들의 심사는
분명코 단언하건데
어린 아이의 그것과
절대로 다름이 없을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이
어른들의 말에 하등의 의심을 가지지 않고
절대 순종하는
그 맑은 심성을 소유한 그들일 것입니다.
그들의 눈은
맑은 보석보다 맑을 것이며
청명한 하늘 보다 훨씬 더 청명한
표정과 태도와 말의 구사를 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들의 영혼의 지성소는
늘 주님의 임재의 은총으로 가득하여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더워도 더워하지 않고
슬퍼도 슬퍼하지 않고
기뻐도 너무 기뻐하지 않는..
늘 강력한 주님의 평강이 그들을 흐를 것입니다.
하지만
모두가
그들이 되지는 못합니다.
깊은 상처를 가지고
그 아픔의 존재를 이해하지 못하여
현실을 도피하다가
자신을 금욕으로 내모는
영적 바리새인도
많을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
세상을 버리라는 말씀은
그야말로
타오르길 원하는 콜타르에
불을 붙혀주는
빌미가 될 것 같습니다.
한동안
열심히 타오르며
마치
관리가 돈을 탐하면서도
지킬 행위를 다 지키고 나서
난 할 일 다했다고 착각하다가
주님의 질타를 받은 것과
다름없이
심하게 자신을 쳐서
과도하게 절제하다가
주님께 혼날 위험도 없지 않다는 생각입니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이런 위험성을 극복할 수 있는 지요.
오늘
주님이 분명코 말씀해 주십니다.
"아이와 같은 심사를 회복하라."
이것이 우선입니다.
아이처럼 바뀌어야 합니다.
창피하기도
가끔은 손해 나기도 하지만
아이처럼
순수해져야 합니다.
의심할 수 없이 천진해져야 합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분명코 알아야 합니다.
아이들은 배고픈지 졸린지 .. 확실히 압니다.
그리고는
단순해야 합니다.
단순하게 믿고
단순하게 원하고
단순하게 생각합니다.
전제가 있습니다.
아이들은 부모를 믿습니다.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아이들은
부모님을 기뻐합니다.
하나님을 기뻐해야 합니다.
주님을 믿고
말씀을 붙들고 있는 동안
주님이 참으로 기뻐집니다.
그 기쁨이 좋아
그 분의 허락하신 깨달음이 너무도 좋아
그 깨달음을 일상에 하나하나 적용함이 기뻐
삶에 점차로 힘이 있어집니다.
내 눈은 점차로 맑아질 가능성이 많음을 느끼고 있습니다.
하루 하루 양식은
주님이 마련해 주실 것임을 느끼고 있습니다 .
걱정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두려움이 옅어 지고 있습니다.
건강은 오히려 좋아졌습니다.
앞으로도 그리 걱정은 되지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영혼이 먼저
맑아지길 원하십니다.
그 후에
재물도
주님의 행사도 하시길 원하십니다.
특별히
그 원하심을 강하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원하면 이렇게라도 해라.'
집과 자녀와 자식과 .......모두라도 버리라면 버리라'
예.
제가 자격이 되고
제 때가 가까워 지면
주님은 그리 말씀하실 수도 있겠지요.
그렇다면
그리라도 하겠습니다.
주님은요.
깊은 상처를 주시면서 까지
저에게 과도한 주문은 하지 않으시리라는
그런 믿음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게 과거의 제 육신의 아버지의
그 무섭고 두려운 요구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그래도 주님이 선언하신 바
온전한 사랑의 원류라고 하실 수가 있을까요?
아닙니다.
전
주님이
손잡고 눈망울 반짝거리는
그 아들의 손을 뿌리치고
내 동댕이치고
후려 패는
어그러진 아버지는
아님을
확실히 인식하고 있습니다.
만일 그분이 뭐라시면
제가 잘못할 때겠지요.
도저히 이대로 있으면 안될
오래된 古罪가 있겠지요.
난
주님 말씀대로 따르렵니다.
주님이
알아서 하소서.
주님이 주시려면
재물도 주소서.
주님이 주시려면
영적인 넓은 깨달음도 허락하소서.
주님이 허락하시면
전 세상을 향해서
당신의 살아계심을 전파하게라도 하소서.
바라기는
제 가진 거를 통해서지만
그것도 버리라면
때가 되어서 버릴 수 가 있겠지요
모든 거
주님의 장중에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난
당신
주님 하나님을 향해
아이처럼
호기심어리고
믿음어린
자랑스러운 눈빛 만을
번쩍일 뿐니까요.
감사하신 아버지.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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